034화 선물이라 생각하십시오.
점심을 먹고 오니 요키아에 보낼 문서를 최지훈이 제본하고 있었다. 박주혁은 최지훈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
“최 대리. 점심 식사는 했습니까?”
“네. 먹었습니다.”
영업팀 모두가 승진할 때 혼자만 낙오된 최지훈의 마음을 달래줄 생각이었지만, 최지훈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았다.
‘음. 생각보다 금세 털고 일어나려나?’
박주혁이 살짝 고민하는 찰나, 최지훈이 요키아에 제출할 문서의 제본을 끝마쳐 박주혁에게 건넸다.
“사장님. 제본 완성됐습니다.”
“아, 조 차장에게 시켰는데, 최 대리가 한 겁니까?”
“내 일 네 일이 어디 있습니까? 다 같이 하는 거죠. 그리고 제가 먼저 하겠다고 했습니다. 공기업은 이런 겉치레를 중요시하다 보니 반전문가가 되었거든요.”
최지훈은 환한 미소에 가슴 한구석 불편했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최지훈 방향이 틀렸던 것뿐이야. 보기 좋구나.’
박주혁은 최지훈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들겨 주며 말했다.
“최 대리. 앞으로 기대해 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박주혁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사장실에서 외투를 입고 나와 조 차장을 불렀다.
“조 차장. 출발합시다.”
“예!”
박주혁이 영업팀을 지나칠 때 최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힘차게 인사했다.
“잘 다녀오십시오!”
권선호와 있을 때는 한 번도 이렇게 인사를 한 적이 없었다. 변화된 그의 모습이 살짝 부담스럽긴 해도 싫지는 않았다. 박주혁은 씩 웃으며 최지훈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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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 어제 크리스틴골프대회에서 아마추어 선수가 우승을 차지했다죠?
- 맞습니다! 백희나 선수죠. 이미 92년부터 프로들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던 겁 없는 10대 소녀입니다.
- 떡잎부터 다른 선수였군요?
조광연은 백희나를 알고 있었는지 감탄사를 뱉었지만, 박주혁은 내용을 흘려들었다. 딱히 스포츠에 관심이 없기도 했거니와 지금은 요키아와의 미팅에서 어떻게든 주도권을 쥐기 위해 머리를 짜내야 했기 때문이다.
요키아에 도착한 박주혁과 조광연은 접견실에서 신지수 과장과 황기태 선임을 만났다. 조광연이 먼저 제본된 제안요청서를 신지수에게 내밀며 말했다.
“한국통신의 제안요청서를 먼저 완성하였습니다.”
“오. 정말 3일 안에 해내셨군요.”
신지수가 살짝 놀랍다는 듯 기뻐하자, 박주혁이 불쑥 끼어들어 죽는소리를 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저희 직원들이 밤을 새워가며 겨우 완성한 겁니다.”
박주혁의 말에 조광연이 눈을 힐끔 돌렸다.
번역연구팀이 최근 야근이 잦은 것은 맞지만, 제안요청서 때문이 아니라 OECD 프로젝트 때문에 바빴던 것인데.
조광연이 의문 어린 시선을 느끼며 박주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해야 상대가 우리에게 빚을 졌다고 느끼지.’
박주혁의 엄살에 신지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정말 고생하셨을 것 같습니다. 역시 IT 전문 번역업체는 다르군요.”
신지수는 제안요청서를 살짝 들춰보고는 황기태 선임에게 넘겼다. 황기태는 제안요청서를 천천히 넘기다 말고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신지수의 팔을 쳤다. 잡담을 나누던 신지수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요?”
“과장님. 이거. 드레프트에 없던 내용입니다.”
“그, 그럴 리가?”
신지수는 황기태가 가리킨 부분을 보며 깜짝 놀라자, 조광연이 당황하여 박주혁에게 속삭였다.
“사장님. 문서에 문제가 있나 봅니다.”
“아니요. 다른 이유일 겁니다.”
“예? 어떤?”
박주혁은 조광연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살짝 웃어 보였다. 조광연은 박주혁의 여유있는 미소에 마음을 진정하고 신지수와 황기태를 쳐다봤다.
문서를 다급하게 넘겨보던 신지수는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저희 말고 다른 업체에서도 의뢰했나요?”
조광연이 입을 떼려 할 때 박주혁이 조광연의 허벅지를 지그시 누르더니 답했다.
“죄송하지만, 파인랭스가 어떤 업체와 거래하는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신지수는 박주혁의 말이 무슨의미인지 바로 알아챘다.
“아, 그렇겠군요. 번역본은 저희가 의뢰했던 문서와 번역본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예. 드레프트가 아닌 제안요청서 최종 버전의 번역본입니다.”
박주혁의 말에 신지수와 황기태가 기겁하며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최종본을 구했냐고 물어보는 것일 테지만, 박주혁에게 그것을 답해줄 의무는 없었다.
“불편하시면, 드래프트 버전의 번역으로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박주혁은 태연한 표정으로 신지수와 황기태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이번 건은 선물이라 생각하십시오.”
신지수와 황기태는 상기된 얼굴로 박주혁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동종업계에서 알아주는 영업부를 구축한 요키아도 구하지 못한 최종본을 일개 번역회사에서 구했다니 미심쩍긴 했지만, 다른 업체에서 최종본을 구하지 말란 법도 없지 않나. 90년대에는 학연, 지연에 따라 영업력이 좌우되는 춘추전국시대였으니까. 아! 이건 지금도 통용되는 말이던가?
신지수는 거듭 박주혁과 조광연에게 감사를 표하더니 황기태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황기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황기태가 자리를 비운 후 신지수가 박주혁에게 넌지시 물었다.
“파인랭스에서 통역도 가능하시죠?”
“미리 일정과 통역 관련 자료를 주신다면 가능합니다. 통역, 필요하십니까?”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신지수를 쳐다봤다. 신지수는 웃는 얼굴로 상체를 앞으로 내밀더니 속삭였다.
“그럼 문제없겠군요.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요키아 구매부에서 소개할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지 감도 오지 않았지만, 박주혁은 덤덤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소개받아서 나쁜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황기태가 황급히 접견실로 뛰어왔다.
“과장님. 이사님이 지금 누굴 만나고 있다고, 직접 올라오라고 하시는데요.”
“음? 오늘 누구 만나시던가?”
“덩치 좋은 여학생이 있던데···.”
“아! 백희나 선수를 만난다고 했었지?”
백희나라는 말에 박주혁이 미간에 손을 살포시 올렸다.
‘백희나라고?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그때 조광연이 화색을 띠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 백희나 선수면 이번에 크리스틴 오픈에서 우승한 선수 아닙니까?”
조광연의 말에 박주혁의 눈이 번뜩 빛났다.
백희나.
한국의 레전드 골프선수를 뽑으라면 누구랄 것 없이 백희나를 선택할 것이다. IMF라는 거대한 암흑이 한국을 뒤덮었을 때 US 여자 오픈에서 맨발의 투혼을 선보이며 전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사한 선수였다. 그야말로 레전드.
‘백희나가 요키아에? 왜?’
박주혁이 의문을 가질 짬도 주지 않고 신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사님이 올라오라고 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그럼, 박 사장님 올라가시죠.”
박주혁과 조광연은 얼결에 신지수를 따라 요키아 사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박주혁은 조광연에게 백희나에 관해 물었다.
“조 차장. 백희나 선수를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아. 중학생 신분으로 프로선수를 상대로 우승을 차지했던 특급 유망주 아닙니까?”
“그래요?”
“지금도 아마추어 신분으로 오픈대회 2승째 일 겁니다.”
백희나 선수가 어려서부터 대단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아마추어 신분으로 오픈대회를 휩쓸고 있다니, 처음 듣는 얘기였다. 더불어 조광연이 골프에 해박한 지식이 있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조광연의 얘기를 듣고 있던 신지수도 침을 튀겨가며 백희나 예찬론을 펼쳤다.
“백희나 선수가 KLPGA 선수들 사이에서 칩인 버디하는 장면을 보셨어야 했는데. 정말 엄청난 선수입니다. 앞으로 크게 될 선수입니다.”
박주혁도 백희나 선수가 크게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요키아와 연결 고리는 오리무중이었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박주혁은 요키아 홍보부에 도착했다. 불투명 유리 너머 백희나 선수 특유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똑똑.
“들어오세요.”
이사라고 해서 남자일 줄 알았는데, 한 톤 높은 여자 목소리가 불투명 유리로 만들어진 룸안에서 들려왔다. 90년대는 여성보다는 남성이 고위직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절이었지만, 요키아는 해외 기업이니만큼 능력이 있다면 기용했을 터. 반대로 말하면 엄청난 실력자라는 소리다.
‘음. 조심해야겠군.’
역시 예상처럼 깐깐해 보이는 여자가 커다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는데 이제 겨우 30대 초반 처럼 보였다. 그녀는 쓰고 있던 안경을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 과장님. 아까 말씀하셨던 파인랭스 분들이시군요?”
“예. 박주혁 대표님과 조광연 과장···. 아, 이제 차장이라고 하셨죠?”
신지수의 말에 조광연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신지수가 자신의 상사를 소개했다.
“홍보와 구매부를 담당하시는 백연주 이사님이십니다.”
신지수는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는 듯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말씀들 나누시죠. 박 사장님. 잘해보십시오!”
신지수의 말에 박주혁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려 신지수에게 목례를 했다.
‘잘해보라니? 뭘 잘해봐야 하는 건데?’
백연주는 도망치듯 사라지는 신지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자리를 권했다.
“박 사장님, 조 차장님 앉으시죠. 이쪽은 제 사촌인 백희나입니다. 골프 유망주 들어보셨겠죠?”
박주혁과 백희나가 인사를 나누고 나자 조광연이 참기 어렵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팬입니다!”
조광연이 넙죽 고개를 숙이며 손을 내밀자, 백희나가 조광연의 손을 맞잡으며 웃었다.
“고맙습니다.”
조광연은 백희나와 맞잡은 손을 내려보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박주혁은 행복해하는 조광연을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 차장이 골프를 치나? 나중에 나도 좀 배워볼까?’
인사치레가 끝나자, 백연주가 먼저 입을 뗐다.
“구매부에 실력 좋은 번역회사가 있냐고 물었더니 마침 오늘 파인랭스분들이 방문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모시게 되었습니다.”
백연주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박주혁은 백연주의 눈 뒤에 숨어있는 구렁이 한 마리를 보았다. 작은 허점이라도 보인다면 당장이라도 덮칠듯한 포스가 느껴졌다. 조광연도 백연주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붉혔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역시 조심해야 해.’
박주혁은 경계심을 높이며 답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아, 별건 아니고요. 요키아 홍보부에서 나오는 번역도 의뢰하고, 여기 백희나 선수도 소개해 드리려고 했죠.”
백연주는 방울뱀이 꼬리를 흔들어 먹잇감을 유인하듯 떡밥을 던져놓고 박주혁이 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박주혁은 떡밥을 물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홍보부 번역을 몰아줄 테니 백희나가 필요할 때 번역을 제공하란 얘긴가? 나야 고맙지!’
웃는 얼굴이었지만, 은근히 사람을 노려보는 백연주를 향해 박주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키아 홍보부 번역이라면 보도문과 카탈로그겠군요?”
“어머, 잘 아시는군요?”
“그리고 백희나 선수라면···. 계약서?”
백연주는 놀랍다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뱀처럼 날카롭던 백연주의 눈빛이 조금 옅어졌다.
“이사님. 저희에게 이런 기회를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희나 선수를 도울 기회가 어디 흔하겠습니까? 파인랭스가 대기업처럼 후원을 할 수도 없고요.”
박주혁의 말에 백연주가 눈을 빛냈고 박주혁은 백희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나긋나긋 말했다.
“백희나 선수.”
“예?”
“파인랭스가 백희나 선수의 언어후원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무슨···?”
백희나는 백연주를 돌아보며 도움을 청했고 백연주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뗐다.
“박 사장님. 생각보다 배포가 있으시군요?”
“판을 다 만들어 두시고, 제게 그렇게 말씀하시면 민망합니다.”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박주혁과 백연주는 불꽃을 튀며 서로를 탐색 중이었다. 백연주는 박주혁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상체를 의자에 기대며 피식 웃었다.
“이미 제 뜻을 간파하신 것 같으니 솔직히 말하죠. 요키아에 파인랭스를 단독 번역업체로 등록시키겠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아시겠죠? 대신, 우리 희나가 필요한 지원은 파인랭스에서 해주면 어떻겠습니까?”
“어, 언니?”
백연주가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자, 백희나가 깜짝 놀라 백연주를 쳐다봤다.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조광연과 백희나일 뿐, 박주혁과 백연주는 이미 몇 합을 주고받은 상태였다.
“좋습니다. 단, CR도 없는 것으로 했으면 합니다만.”
CR이라는 말에 백연주가 잠시 당황하더니 재빨리 답했다.
“CR은 제 권한 밖입니다.”
‘에헤이 이렇게 빠져나가시면 안 되죠.’
CR(Cost Reduction) 매년 단가 인하를 요청했었던 요키아의 특성을 알고 있었던 박주혁이었기에 꺼낼 수 있는 카드였다. 매년 많게는 3%의 단가 인하를 요구했던 요키아 덕분에 마진이 점점 줄어들었었다. 이번에도 그러면 곤란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