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33화 (33/136)
  • 033화 이미 다 내 손에 있습니다.

    박주혁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목과 승모근의 피로를 풀었다.

    “으. 거의 다 했다.”

    트레이도스가 자동으로 TM을 생성했던 것과 달리 수작업으로 일일이 매칭하는 것은 상당히 고된 작업이었다. 물론 트레이도스도 처음에는 분명 이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랭귀지패스트는 이제 첫발을 뗐으니 지금의 괴로움은 언젠가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로부터 약 2시간 후 드디어 박주혁은 베이스 파일을 완성했다. 조심스럽게 베이스 파일을 저장한 박주혁은 긴장된 표정으로 극성텔레콤의 제안요청서를 랭귀지패스트에 등록했다.

    “이렇게 업로드해서 랭귀지패스트 포맷에 맞춰 변환해야 하는군.”

    박주혁은 망설이지 않고 변환 버튼을 눌렀고 잠시 기다리니 파일의 확장자가 달라졌다. 그리고 비활성 상태였던 번역하기 버튼이 활성화됐다.

    “이제 번역하기를 누르면 되는 거네. 트레이도스와 별다르지 않은데? 아주 좋아.”

    박주혁은 마우스를 움직여 번역하기 버튼을 클릭하려다 말고 마우스를 멈췄다.

    “아니지. 이건 영찬이가 클릭하는 게 좋겠어.”

    결과가 궁금했지만, 심영찬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라도 잠시 참기로 했다. 박주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랭귀지패스트를 종료하는 대신 ‘인사발령’이라 적힌 문서를 열었다.

    [승진: 조광연 과장 -> 조광연 차장]

    [승진: 한기훈 대리 -> 한기훈 과장]

    [승진: 심영찬 사원 -> 심영찬 대리]

    박주혁은 최지훈과 입사 동기인 한기훈을 과장으로 승진한다는 인사발령을 작성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최지훈에게 줄 수 있는 나의 배려다.”

    이번 인사발령으로 최지훈이 충분히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주혁은 최지훈이 권선호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면 이런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견딜 수 있을 만한 시련을 줌으로써 권선호의 비위행위를 보좌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이다.

    “불만을 품고 퇴사한다면, 인연은 거기까지겠지.”

    박주혁은 담담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인사발령 문서를 완성했다.

    #

    “좋은 아침입니다!”

    박주혁은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밝은 표정으로 출근했다. 권선호가 없는 영업팀의 분위기가 다소 처져있는 것 같았지만, 오늘 인사발령이 발표되면 반전될 것이니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 박주혁은 자신의 루틴대로 탕비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늘 있던 신문이 어디에도 없었다.

    “음?”

    박주혁은 주변을 몇 차례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신문의 흔적은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탕비실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영업팀을 향해 물었다.

    “오늘 신문 안 왔나요?”

    조광연이 문서를 작성하다 말고 일어나 답했다.

    “아침에 배달 왔었습니다.”

    “없는데요?”

    박주혁과 조광연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할 때 최지훈이 잽싸게 다가와 말했다.

    “신문. 제가 아침에 사장실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아. 그랬군요. 다음부터는 그냥 제가 알아서 가져갈 테니 최 대리는 업무에 집중해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최지훈의 마음을 알겠으나, 이런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최지훈이 안쓰러웠다.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말이다. 하지만, 권선호와 함께 해고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던 만큼 징계로 봐도 무방할 터. 그리고 상처는 상처로 치유하라는 말도 있다. 권선호로 인해 생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박주혁은 최지훈에게 상처를 줄 생각이었다.

    ‘죄책감을 떨치고 당당해지려면 이 방법이 맞다.’

    박주혁은 경직된 얼굴로 경영지원팀 허인아 과장을 불렀다. 과거에는 권선호를 따라갔다지만,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지금은 박주혁을 잘 따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번역연구팀 80% 이상이 권선호를 따랐었다. 대체 무슨 연유일까? 박주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거와 현재 달라진 점은 단 한 가지였다.

    ‘경영진이 회사에 애정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인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2년 넘게 회사를 방치했던 지난 삶과 하나부터 열까지 회사를 챙기고 있는 지금. 차이는 이것밖에 없었다. 리더가 있고 없고의 차이.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사장님?”

    허인아 과장이 어느 틈에 왔는지 눈을 감고 있는 박주혁을 조심스레 불렀다. 박주혁은 천천히 눈을 떠 허인아 과장을 마주했다.

    “아. 허 과장. 인사발령서인데 검토해보고 의견 있으면 얘기해보세요.”

    “인사발령이요?”

    허인아 과장이 박주혁이 내민 서류를 천천히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권선호 부장의 퇴사 이후 적절한 조치로 보입니다. 그런데 심영찬씨는 입사 4개월 차인데 너무 빠른 것은 아닐까요? 위화감이 생기면 불화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허인아도 심영찬이 프로그램 개발에 엄청난 열의를 보였고, 결과도 따라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초고속 승진이라는 상황이 조금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박주혁은 허인아가 무슨 의도에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기에 미소지으며 말했다.

    “허 과장도 박 팀장도 참 고마운 사람이군요.”

    뜬금없이 고맙다니. 허인아가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박주혁을 바라봤다.

    “회사와 조직을 걱정하는 마음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시간이 흘러 승진한다는 생각은 내려놓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능력과 실적에 따라 승진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직원들이 인지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조직은 더 효율적이고 또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허인아는 박주혁의 생각에 살짝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대로 집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허 과장님.”

    허인아가 사장실을 나가고 얼마 뒤, 사무실이 웅성이며 떠들썩했다.

    “어머, 조 차장님! 축하드려요.”

    “이제 한 대리가 아니라 한 과장이네?”

    “심 선수! 입사 3개월 만에 대리라니?”

    축하의 말이 오가는 소리에 박주혁은 살짝 미소지으며 창가를 바라봤다. 그는 따스하게 들어오는 햇빛을 즐기는 듯 눈을 감고 커피잔을 들었다. 오늘따라 유독 커피가 썼다. 커피를 마시다 말고 박주혁은 몸을 돌려 책상 위의 수화기를 들었다.

    “네. 심영찬입니다.”

    “이제 대리 아니던가요?”

    “억! 사, 사장님. 대리 맞습니다. 아직 적응이 안되네요.”

    “하하 익숙해질겁니다. 다름 아니라 내가 어제 베이스 파일을 다 만들었는데 말이야.”

    “지금, 들어가겠습니다!”

    박주혁은 컴퓨터 앞에 앉으며, 랭귀지패스트를 실행시키니 심영찬이 사장실로 들어왔다. 어제 하루 쉬었다고 다크서클의 길이가 제법 줄어있었다. 심영찬은 박주혁에게 재빨리 다가가며 놀랍다는 듯 물었다.

    “사장님. 하루 만에 베이스 파일을 만드셨습니까?”

    “궁금해서 말이지.”

    “그럼. 번역하기도 해보셨습니까?”

    심영찬은 얼굴이 상기되어 박주혁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의 결과가 무척 궁금했으리라. 박주혁은 심영찬의 심기를 알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예? 왜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에러입니까?”

    심영찬은 무척이나 실망한 표정으로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박주혁은 미소 띤 얼굴로 심영찬을 진정시킨 뒤 차분하게 말했다.

    “심 대리와 결과를 같이 보기 위해 아직 안 한 것뿐입니다. 이리 오세요.”

    심영찬은 박주혁 곁으로 다가가 모니터를 바라봤다. 랭귀지패스트의 화면에는 번역하기가 먹음직스럽게 활성화되어 있었다. 박주혁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심영찬에게 물었다.

    “눌러볼까요?”

    “으. 예!”

    - 딸깍.

    ‘번역하기’를 클릭하자 팝업창이 떠올랐고 번역 진행률을 표시하는 상태바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 꼴깍.

    박주혁과 심영찬은 누구랄 것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 기다리니 랭귀지패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멘트를 출력했다.

    [번역하기가 완료되었습니다.]

    “오.”

    박주혁과 심영찬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씩 웃었다. 박주혁은 랭퀴지패스트의 결과물을 열었다. 결과물은 생각보다 미완성 상태였다. 번역문이 들어간 곳은 붉은색으로 첨삭되어 있었고, 번역되지 않은 부분은 국문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한 눈으로 봐도 지저분한 낙서장 같은 모습이었지만, 분명 번역문이 원하는 위치에는 들어가 있었다.

    “정말 됐네.”

    “아. 실패네요.”

    박주혁이 반색하며 좋아하는 것과 달리 심영찬은 고개를 살짝 떨구며 실망한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박주혁은 그런 심영찬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심 대리. 하루 만에 만든 프로그램치고는 훌륭한 거지. 여기 봐봐. 영어 문장이 완벽하게 들어가 있잖아.”

    “아. 그렇긴 하지만, 이 상태로 문서를 사용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번역이 안 된 부분이 있어서 확인하며 수정해야 해. 일하는 시간이 확실히 줄겠어.”

    박주혁이 살짝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지만, 심영찬은 만족스럽지 않은지 미간을 좁힌 채 결과물을 찬찬히 뜯어봤다. 살짝 풀이 죽어 있는 심영찬을 쳐다보며 박주혁이 힘주어 말했다.

    “훌륭한데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어?”

    “많이 부족합니다. 좀 더 개선해야겠습니다.”

    “개선해야지. 완벽한 결과를 기대하진 않았다고. 너무 기죽을 필요 없어. 이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본 것으로 충분해. 사람 충원하여 본격적으로 개발해 보자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개념은 확실히 알았으니 선수들 뽑아서 본격적으로 개발해 보겠습니다.”

    박주혁은 심영찬에게 용기를 북돋우며 사장실 밖까지 배웅했다. 그리곤 밝은 얼굴로 박영희와 구경숙을 불렀다.

    “박 팀장. 구 과장과 함께 잠깐 들어와 보세요.”

    한참, 문서들과 씨름하고 있던 박영희와 구경숙이 서로를 쳐다보곤 일어나 사장실로 들어왔다. 박주혁은 프로젝터를 연결해 랭귀지패스트의 결과물을 스크린에 쐈다. 국문과 영문이 혼재되어 상당히 난해했고 문서의 상태를 본 박영희와 구경숙이 미간을 좁혔다. 완성형 파일을 만드는 그들에게 지금 눈앞에 문서는 미완성 그 자체였으니 상당히 불편했으리라.

    박영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박주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이것이 바로 랭귀지패스트를 사용해 번역한 첫 번째 결과물입니다.”

    랭귀지패스트란 말에 구경숙은 눈을 끔벅였지만, 박영희는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프로그램을 짜고 있더니 심 선수···. 아니 심 대리가 벌써 구현한 겁니까?”

    박주혁은 박영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구경숙뿐인 것 같았다. 박영희는 스크린에 비친 문구들을 천천히 살펴보더니 점점 얼굴이 상기되어 갔다.

    “오. 대단한데요?”

    “그렇죠?”

    박주혁과 박영희가 서로 놀라며 감탄할 때 구경숙이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엉망진창인 문서가 뭐가 대단하다는 겁니까?”

    구경숙의 말에 박주혁과 박영희는 서로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박주혁이 차분하게 랭귀지패스트에 대해 설명하자, 구경숙의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그, 그러니까. 지금 저게 그 결과란 말씀이세요?”

    “놀랍죠?”

    “허어얼.”

    그제야 구경숙도 스크린에 다가가 문구들을 살펴보며 한숨 섞인 감탄사를 내뱉었다.

    번역연구팀의 두 리더에게 랭귀지패스트의 결과를 선보인 박주혁은 뿌듯함을 감추지 않았다.

    “랭귀지패스트를 업그레이드해 나가면 비용 절감뿐 아니라, 시간도 절약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안요청서는 랭귀지패스트를 활용해 번역연구팀에서 진행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장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었겠지만, 비슷한 국문은 영문으로 바꿔놓은 결과물을 보니 분명 살짝만 손을 대면 완성본이 나올 것 같았다. 기존 번역 2부 팀장이던 구경숙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IT 담당이었던 제가 적임자인것 같네요.”

    “구 과장이라면 믿을 수 있죠. 박 팀장도 함께 작업하면서 랭귀지패스트의 개선점을 정리하는 것은 어떨까 싶은데요.”

    박영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심영찬··· 아이디어만 가지고 벌써 이렇게···.”

    프로그래머로서의 욕구가 자극받는지 박영희는 한참을 스크린 앞에서 떠나질 못했다. 구경숙이 얼빠진 박영희의 팔을 몇 차례 끌고 나서야 겨우 사장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박영희와 구경숙이 모두 나간 후 박주혁은 컴퓨터 앞에 앉아 탁상달력을 바라봤다.

    “오늘이 3일째지? 요키아에 배달해야겠군.”

    박주혁은 이미 완성된 한국통신의 무선설비 제안요청서를 인쇄한 후 플로피 디스켓에 복사했다. 복사가 끝난 후 박주혁은 조광연에게 전화했다.

    “조 차장. 요키아에 제안요청서 완성된 것 납품하러 간다고 연락하시고, 지금 인쇄되는 것 제본해 놓으세요. 점심 먹고 출발합시다.”

    “예? 벌써 완성된 문서가 있습니까?”

    조광연이 기겁하며 놀라자,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번역본은 다 내 손에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