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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32화 (32/136)

032화 당장, 짐 싸서 꺼져.

회의실에 들어선 권선호는 번역연구팀의 이민주 사원과 마주 앉았다. 권선호의 눈길이 부담스러운지 이민주는 눈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부장님.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지금 엄청 바쁜데요.”

“잠깐이면 됩니다. 민주씨는 번역사가 되는 것이 목표였죠?”

“그랬죠.”

“지금 업무에 만족하십니까?”

“으음.”

이민주는 권선호의 물음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분명 꿈은 유명한 번역사가 되어 높은 고료(번역료)를 받아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것이었지만, 확실히 현재 파인랭스에서 하는 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민주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자, 권선호는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유능한 번역사가 되려면 번역 커리어가 필수죠. 내가 그 커리어를 쌓을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제 꿈이 분명 번역사는 맞아요. 하지만, 부서가 이미 이렇게 통폐합되었잖아요. 그리고 아예 번역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요.”

“오롯이 번역만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음. 그, 그건···.”

이민주가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 찰나, 회의실 문이 열렸다. 이민주는 등장한 인물을 보고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말이다. 이민주의 표정 변화를 본 권선호도 재빨리 고개를 돌렸고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는 박주혁의 눈과 마주쳤다.

박주혁은 부드러운 어투로 권선호와 이민주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권선호는 순간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사라졌다.

“직원들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 면담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래요? 좋은 방법이군요.”

박주혁은 이민주에게 살짝 한번 쳐다보고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걸 왜 권 부장님이 하시는 걸까요? 경영지원팀도 있을 테고 저도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전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이민주는 박주혁의 시선에 기가 죽어 고개를 떨궜다. 잠시나마 흔들렸던 것을 박주혁에게 들킨 기분이었으리라.

“사, 사장님. 죄송합니다. 저는 일이 많아서. 이만.”

이민주는 황급히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스쳐 가는 이민주의 얼굴에 민망함과 곤란함이 역력했다. 잠시 이민주를 쳐다봤던 박주혁은 천천히 시선을 권선호에게 옮기며 차갑게 물었다.

“권 부장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권선호는 박주혁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회사를 위해 직원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것이 잘못된 일입니까?”

권선호의 맞은편으로 이동하던 박주혁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권선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권선호는 박주혁의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박주혁의 다음 수를 기다렸다. 박주혁은 양손을 깍지낀 채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며 권선호를 응시했다.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회사를 위한다···. 파인랭스 말씀이신가요. 아니면 베스트 번역원?”

박주혁의 입에서 베스트 번역원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권선호의 눈썹이 아주 잠깐 요동치듯 꿈틀거렸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박주혁은 권선호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당황스러우신가요? 제가 베스트 번역원을 알고 있어서.”

“그, 그러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베스트 번역원이라뇨?”

평정심을 유지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을 꿰뚫을 것 같은 박주혁의 눈빛이 매서웠다. 권선호는 손발이 떨리는 것을 감지하고 테이블 위에 올렸던 손을 잽싸게 내려 주물렀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권선호의 손은 그가 아물리 주물러도 다시 온기가 돌지 않았다.

‘저 새끼가 어떻게 알았지? 침착해라 권선호. 저따위 애송이한테 밀리면 어쩌자는 거야!’

권선호는 시선을 내린 채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칼자루는 이미 박주혁에게 있었다.

“얼마 전에 조 과장과 요키아에 방문한 김에 근처에 있는 ANT와 알파텔도 방문했었습니다. 거기서 조금 의아한 얘기를 들었죠.”

권선호는 용기를 내어 박주혁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말은 차분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아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포식자의 사나운 눈빛을 피하려는 피식자의 본능. 권선호는 본능에 따라 눈을 피하려 했지만, 스스로를 다그쳐 다시 박주혁의 눈을 마주했다. 의지와는 들리 권선호의 사지가 미세하게 떨렸다.

“대체 무슨 얘기를 들으셨길래. 베스트 번역원을 언급하시는 겁니까?”

“권 부장님이 더 잘 아실 것 같은데요?”

“전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이 업계가 상당히 좁다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눈앞에 사지를 떨고 있는 먹잇감이 있음에도 박주혁은 하이에나처럼 주변을 통제하고 퇴로를 하나씩 차단해 나갔다. 표적이 되었다는 것을 권선호, 자신만 모를 뿐이었다.

“대체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ANT에서 그러더군요. 기술부에서 계속 베스트 번역원을 추천한다고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베스트 번역원이라니···.”

박주혁은 말끝을 흐리며 권선호의 표정을 살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연기하고 있었지만, 권선호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박주혁은 권선호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살짝 미소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절대 모를 거로 생각했는데···. 그렇죠? 원래 자신의 비밀이 탄로나면 두려운 법입니다.’

잠시 텀을 준 박주혁이 이어 말했다.

“권 부장은 들어봤나요? 베스트 번역원이라는 곳을?”

“···”

권선호는 입을 앙다문 채 박주혁의 시선을 마주했다. 박주혁의 한기 어린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ANT나 알파텔 같은 기술 특화 기업에서 여태 들어본 적 없는 베스트 번역원을 써야 한다고 하는데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영업팀을 이끄는 부장님의 견해가 궁금해지는군요.”

“···A, ANT나 알파텔에서 퇴사한 직원이 차린 것은 아닐지···”

권선호의 말에 박주혁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이젠 뭐, 쥐어짜도 핑곗거리가 없으시죠?’

“그럴 수도 있겠군요. 역시 영업팀의 견해도 확인해봤어야 했는데···.”

권선호는 자신의 말이 박주혁에게 먹히는 것 같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박주혁의 말에 권선호의 얼굴은 또다시 흙빛이 되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구매부에서는 베스트 번역원을 전혀 모르더군요. 오히려 제게 베스트 번역원을 아냐고 묻던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보통 퇴사자의 회사라면 구매부에서 상당 기간 일감을 몰아주는 관례가 있을 텐데요.”

권선호는 테이블 밑에서 차갑게 얼어버린 손을 말아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네가 베스트 번역원과 나의 연결 고리를 알 수는 없다!’

권선호가 평정심을 찾았는지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정말 이상하군요.”

“많이 이상하죠. 그리고 일전에 시스템에 사용할 자료 만드셨잖습니까?”

“자료···? 아. 네.”

“해피콜을 돌려봤는데, 또 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권선호가 갑자기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눈을 빠르게 좌우로 돌렸다. 박주혁은 권선호의 반응을 무시한 채 말했다.

“기존 고객들도 같은 얘기를 하더군요. 베스트 번역원 들어봤냐고 말이죠. 요즘 연락이 계속 온다고.”

“적극적인 영업을 하는 곳이군요. 본받아야겠습니다.”

권선호는 아예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라는 태도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쥐도 코너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다. 권선호는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박주혁은 깍지 낀 손을 풀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짧은 한숨과 함께 권선호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리고. 구 과장과 최 대리가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기 힘든 얘기를 제게 했습니다.”

“뭐···. 뭐라고요?”

“베스트 번역원이 권선호 부장님의 와이프가 차린 회사라는 사실을요. 아. 최소영 과장도 그 회사로 갔다고 하던데···?”

권선호의 동공이 풀려 멍해졌다. 동시에 사지의 떨림도 잦아들었다. 요란하게 돌아가던 두뇌도 멈췄다. 그리고 머릿속에 맴도는 단어 하나.

‘망했다.’

박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선호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봤다. 멍한 표정. 축 처진 어깨.

“권 부장.”

박주혁의 입술이 천천히 떼진다. 몹시 차가운 어조였다.

권선호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의 표정.

“당신은 해고야. 퇴직금도 미리 정산 다 했고, 더는 회사에서 남아서 처리할 일 없죠?”

“...”

권선호는 박주혁을 빤히 바라봤다. 특유의 무표정. 하지만, 동공은 풀려있다.

박주혁은 기다렸다. 권선호의 대답을.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럴싸한 변명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생전에 그렇게 자신을 무시하고 경멸하던 권선호였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꼴이라니.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박주혁은 권선호를 여전히 내려보고 있다. 차갑게 굳은 표정. 치켜 올라간 눈썹. 그의 분노가 느껴진다.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차가운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당장, 짐 싸서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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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혁은 컴퓨터 앞에 앉아 랭귀지패스트 베이스 파일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문장과 문장을 대조해 매칭시키는 일이 생각보다 까다로웠지만, 또 즐거웠다.

‘이게 다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다.’

너무 오랫동안 모니터를 바라봤는지 눈이 침침했다. 박주혁은 잠시 눈을 감고 목을 뒤로 젖혔다. 그때 사장실 문 앞에 얼쩡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들어오려면 빨리 올 것이지.’

박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실 문을 열었다. 문 앞을 서성이던 최지훈이 깜짝 놀라 박주혁을 빤히 쳐다봤다.

“저, 사···. 사장님.”

“아. 최 대리. 마침 잘됐군요. 들어오세요.”

최지훈은 고개를 떨군 채 힘없이 사장실로 들어왔다. 박주혁이 사장실 문을 닫았다.

- 턱.

최지훈은 문이 닫히는 소리에 움찔 놀랐다. 마지 자신의 미래를 암시하는 소리 같았기 때문이겠지.

“앉으세요.”

“예.”

최지훈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박주혁은 최지훈의 마음을 헤아리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 아니요. 그게···.”

“권 부장이 퇴사해서 신경이 쓰이나 보군요.”

최지훈은 고개를 들어 박주혁을 가만히 쳐다봤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말속에는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최 대리. 그동안 권 부장을 보필하느라 고생했습니다.”

최지훈은 박주혁의 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분명 원해서 한 일은 아닐 테지요?”

“...”

“요 며칠 저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최 대리가 제게 사직서를 가져왔던 일을 떠올려봤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최지훈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박주혁은 그런 최지훈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며 답했다.

“죄송하고 미안하다면, 최 대리가 권 부장에게 보였던 충심. 제게 보일 수 있겠습니까?”

“예?”

최지훈은 파인랭스에서 자신의 역할은 끝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뭔가 보여주기도 전에 권선호가 해고됐기 때문이다. OECD 프로젝트라도 잘 마무리 했으면 기회라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 박주혁은 권선호에게 보였던 충심을 자신에게 보이라고 하고 있다.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사, 사장님.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전 최 대리의 충심과 책임감 있는 태도를 높이 사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최 대리만 괜찮다면 전 함께 가고 싶습니다만.”

최지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치듯 말했다.

“다시는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박주혁도 최지훈의 충심과 책임감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충심이 파인랭스가 아닌 권선호를 향했다는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향했던 충심을 돌릴 수만 있다면···.

박주혁은 최지훈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으로 말했다.

‘이제 내 사람이 돼라. 최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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