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31화 (31/136)
  • 031화 CAT Tool, 랭귀지패스트의 등장.

    심영찬과 박영희는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벌써 개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심 선수. 잘 들어봐. 이미 워드에 문서 비교 기능이 있어. 그 기능을 활용해서 문장을 매칭시키는 거지.”

    “좋은 생각이에요. 저도 그 생각을 하긴 했는데, 문제는 워드에서 그 기능을 추출하는 것이겠네요.”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박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영희와 심영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합시다. 지금 당장 구현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서두르고 영찬씨는 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한 인력이 있다면 기안을 올리세요. 지원하겠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심영찬이 잠시 눈을 감고 턱을 쓸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심영찬이 눈을 번쩍 떴고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선수들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좋아요! 팀이 구성되면 영찬씨는 심 대리가 되는 겁니다.”

    “예? 벌써 승진입니까?”

    “왜요? 파인랭스의 시스템을 개발하는 담당자의 후임이 생기는 데 언제까지 사원일 수는 없죠.”

    양 볼이 상기되어 자리에서 일어난 심영찬이 결연한 얼굴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곧 선수들을 구성해서 말씀하신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해 보겠습니다.”

    “좋습니다. 지원할 수 있는 것은 지원할 테니 한번 해봅시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심영찬을 바라보며 박주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영찬아. 부탁한다. 이번엔 한국에서 트레이도스를 개발하는 거야!’

    심영찬이 사장실을 먼저 나가자, 박영희가 문을 닫고 박주혁에게 다가와 핀잔하듯 말했다.

    “사장님. 직원에게 그렇게 공수표를 남발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영찬씨가 회사에 이바지한 바가 얼만데 공수표라뇨. 신규 프로그램이 아니었어도 승진시킬 생각이었습니다. 불과 3개월 만에 10개월이 걸린다던 파인랭스 시스템의 베타 버전이 가동 중이지 않습니까?”

    “하, 하지만···.”

    박주혁은 박영희가 걱정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히 박영희의 팔을 붙잡으며 나긋나긋 말했다.

    “박 팀장. 파인랭스는 계속 진화하고 성장할 겁니다. 절 한번 믿어보세요.”

    박주혁은 말과 함께 눈을 번뜩이며 화이트보드에 그려진 개념도를 돌아봤다. 박영희도 박주혁의 시선을 따라 화이트보드를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사장님. 그나저나 이거 개발되면 진짜 파급효과가 장난 아니겠어요.”

    “그렇죠? 박 팀장님도 도와주십시오.”

    “물론이죠! 재미있을 것 같아요.”

    박영희는 오랜만에 개발자로서의 의욕이 샘솟는지 환하게 웃으며 사장실을 나갔다.

    #

    직원들을 독려하느라 박주혁도 덩달아 퇴근이 늦었다. 박주혁은 샤워한 후 개운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몸이 편해지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떠올랐다.

    “권선호, 최지훈···.”

    베스트 번역원이라는 회사를 차린 권선호, 그리고 권선호의 최측근이면서도 배신을 감행한 최지훈.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권선호는 정해졌고 최지훈은···. 역시 함께 할 수 없겠지?”

    가족이 아니고서야 한 번 신뢰가 무너지면 회복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이미 신뢰를 깬 최지훈이 마음을 돌렸다고는 해도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것 아닌가? 권선호에게 듣고 배운 것이 배신일 테니 말이다.

    “그래. 영업팀은 조 과장으로 재편해야겠어. 아직 미숙하지만, 믿을 수는 있으니까. 당분간 조광연과 영업을 자주 다닐 수밖에 없겠네.”

    조광연으로 영업팀을 재편한다고 생각하니, 한기훈 대리와 김진우 사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러자 문득 최지훈의 처리방안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박주혁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그렇게 기회를 줘볼까? 권선호의 백업도 필요하긴 하니까. 결국 미워도 다시 한번인가.”

    박주혁은 피곤했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 순간 스르르 잠들어 버렸다.

    다음날.

    아무리 박주혁이 20대 중반이라지만, 야근한 다음 날 아침은 몸이 묵직했다.

    “으. 피곤하군.”

    몸을 한껏 스트레칭한 박주혁이 씻고 나왔는데 부엌에서 복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자연스럽게 코를 벌름거리며 아침 메뉴를 추측해봤다.

    “계란말이와 된장국?”

    생각만으로도 입에 군침이 고였다. 역시 어머니의 밥상이 최고다. 박주혁은 입안 가득 고인 침을 삼키고 젖은 머리를 털며 거실로 갔다. 최효정 여사가 박주혁을 반갑게 맞이했다.

    “일어났니? 어제 많이 늦었더구나.”

    “예. 회사에 일이 많아서요.”

    “일이 많으면 좋은 것이지. 앉아라.”

    박주혁은 젖은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넣으며 최효정 여사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계란말이가 맛있게 말려가는 모습에 박주혁은 얼굴이 상기되어 소리쳤다.

    “역시. 계란말이군요!”

    “에그머니! 깜짝이야. 요 녀석이!”

    최효정 여사가 들고 있던 뒤집개를 치켜들고 박주혁을 등을 때렸다. 박주혁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엄살을 떨었다. 사실 아프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어머니! 전 어머니가 해주신 계란말이가 제일 맛있더라고요.”

    애교 섞인 박주혁의 말에 최효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씩 웃었다. 아들의 애정 표현이 싫지 않았다. 최효정은 뜨끈한 된장국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두툼한 계란말이를 상에 놨다.

    “와우!”

    박주혁은 계란말이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원 녀석도. 어서 들거라.”

    “잘 먹겠습니다!”

    도레미 피자가 웬 말인가, 역시 최고는 어머니의 밥상이다.

    #

    사무실은 아침 일찍부터 바쁘게 돌아갔다.

    번역사들이 스케쥴에 맞춰 아웃풋이 나오는지 매일 점검해야 한다. 혹시라도 밀리고 있다면, 그 이유를 파악하고 대체 인력을 투입하는 것도 고려해야만 한다. 개개인의 능력이 다르고 커버할 수 있는 문서 난이도가 있기에 이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다뤄줘야 좋은 품질이 나올 수 있는 법이다.

    “팀장님! 심형직 번역사가 아웃풋이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박영희는 팀원의 보고에 얼굴을 굳혔다. 메인 번역사, 쉽게 말해 S급 번역사의 아웃풋이 밀린다는 것은···. 박영희는 망설이지 않고 수화기를 들었다.

    “콜록, 콜록. 네···. 심형직입니다.”

    “번역사님. 저 박영희 팀장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네,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네요.”

    감기로 최소 3일은 아웃풋이 떨어질 것이다. 박영희는 서둘러 OECD 프로젝트의 일정표를 살피더니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직원에게 물었다.

    “심형직씨, 현재 진행률이 어떻게 돼?”

    “현재 65%입니다.”

    박영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심형직에게 말했다.

    “번역사님. 몸이 먼저죠. 일단 푹 쉬시고 몸을 추스른 후 다시 시작하시죠.”

    “그럼. 일정이 늦춰지지 않습니까? 콜록.”

    “저희랑 한두 번 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커버 가능하니까. 일단 몸부터 추스르세요.”

    “고맙습니다.”

    수화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박영희가 팀원에게 다급히 말했다.

    “심형직 번역사 3일 아웃. 체크해두고 3일 뒤 꼭 확인하세요. 65%면 그래도 남들보다 빠르잖아. 다음에는 내게 보고하지 말고 진행률과 아웃풋을 감안해서 자율적으로 처리하도록 해요. 보고는 잊지 말고!”

    “아, 알겠습니다!”

    번역연구팀은 긴박하게 돌아갔지만, 헤드인 박영희는 전체를 보고 있는 듯 능숙하게 진두지휘해나갔다.

    박주혁은 커피를 들고 사장실로 가면서 박영희와 번역연구팀의 호흡을 목격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감수팀을 이끌며 품질에 목숨을 걸던 박영희는 어느덧 전문 PM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박주혁은 살짝 감탄한 듯 눈을 크게 뜨며 번역연구팀을 스쳐 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서오세요. 사장님.”

    ‘눈도 마주치지 않는군.’

    번역연구팀의 화이팅을 알기에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사장실로 들어갔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는데 사장실 문 앞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 똑똑.

    “네. 들어오세요.”

    심영찬이 충혈된 눈으로 사장실 문을 열며 고개를 내밀었다.

    ‘영찬···. 또 밤을 새운 거냐?’

    “사, 사장님! 이메일 확인 한번 해보십시오.”

    “이메일?”

    박주혁은 의자에 기댔던 상체를 일으켜 컴퓨터를 켰다.

    - 띠딩.

    [랭귀지패스트 Beta]

    박주혁은 심영찬이 보낸 첨부파일의 이름을 보며 피식 웃었다.

    ‘랭귀지패스트라. 이름은 마음에 드는군.’

    박주혁은 파일을 열며 심영찬에게 물었다.

    “어제 말한 문장 비교 후 대치하는 프로그램입니까?”

    “예. 조악하긴 한데 작동할 겁니다. 그리고 사용하기 전에 원문과 번역본을 수작업으로 매칭시키는 사전작업이 필요합니다.”

    박주혁에게 설명하면서 심영찬은 화이트보드 앞으로 가 개념도를 지워도 되냐고 박주혁에게 동의를 구했다.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심영찬은 칠판의 내용을 모조리 지우고 자신이 개발한 랭귀지패스트의 개념과 실행 방법을 설명했다.

    “어제 말씀하신 것 중 단순 개발이 가능한 것만 구현했습니다. 우선 원본과 번역본이 있다는 가정하에 개발했다는 점 참고해주시고요.”

    어제 들은 박주혁의 개념만으로 심영찬은 TM(Translation memory)의 개념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원본과 번역본의 문장을 1:1 매칭시켜 베이스 파일을 만든 후 번역할 문서를 베이스 파일과 비교 후 비슷한 문장일 경우 베이스 파일의 번역문을 가져오는 단순한 프로그램이었지만, TM의 개념이 그러했기에 박주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녀석이야.’

    심영찬은 그림을 그려가며 열변을 토했고 가만히 듣고 있던 박주혁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온전한 원문과 번역본을 활용해 베이스 파일을 만들고, 그 뒤에 비슷한 문서를 매칭시키면 베이스 파일의 번역문장을 가져와서 대치시킨다는 것 아닌가요?”

    “정확하십니다!”

    혹시나 해 심영찬에게 되물었는데, 정확하게 TM의 개념과 일치했다. 박주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심영찬의 손을 잡으며 감탄한 듯 말했다.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랭귀지패스트라는 프로그램 이름도 마음에 들고 말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심영찬은 박주혁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런데 설마. 어제, 밤새운 겁니까?”

    “아. 아하하.”

    어색하게 웃는 심영찬을 보니 확실했다. 박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퇴근하세요.”

    “예? 안 됩니다. 아직 프로그램 개발만 한 상태라 검증을 못 했습니다.”

    “어차피 베이스 파일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오늘은 들어가서 쉬고 내일 같이 검증해봅시다.”

    심영찬은 감복했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박주혁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랭귀지패스트를 실행시켰다. 아직은 인터페이스가 조악했지만, 필요한 기능은 제대로 녹였을 터. 박주혁은 설레는 마음으로 CDMA 무선설비 제안서 원본과 번역본으로 베이스 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음. 문장을 1:1로 매칭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군. 그래도 하나만 해놓으면 나머지 문서들은 살짝만 손보면 돼.”

    과정은 쓰지만, 열매는 달다. 원문과 번역본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매칭시키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박주혁이 어깨가 결리는 것을 느끼고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햇살이 사장실 끄트머리에 걸려있는 것이 벌써 정오가 가까웠다.

    “으음. 잠깐 쉴까?”

    박주혁이 사장실 문을 열고 나갔는데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번역연구팀 직원을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권선호가 저 직원을 왜···?’

    불안감이 뇌리를 스쳤고 박주혁은 자연스레 번역연구팀으로 시선을 옮겼다. 구경숙을 비롯한 몇몇 직원의 표정이 상당히 일그러져 있음을 발견한 박주혁이 미간을 와락 구겼다.

    ‘저 새끼가 설마?’

    박주혁은 권선호가 직원을 데리고 들어간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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