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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29화 (29/136)
  • 029화 나이스 타이밍.

    박주혁이 윤리위원회를 언급한 후부터 염세훈의 태도가 변했다. 방어적인 그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고,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내부에서 번역이 가능한 인력이 있다 보니 번역회사의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번역할 일이 추가로 있을 수 있으니, 파인랭스를 외주업체로 등록하도록 하죠. 관련 자료는···.”

    박주혁은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염세훈의 말을 잘랐다.

    “염 과장님. 면피하시겠다는 겁니까?”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파텔 같은 대기업의 번역을 한 업체가 독점하는 상황이 좀 의아해서 말입니다.”

    박주혁의 도발에 염세훈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독점이라니요. 외주업체를 선정하는 것은 저희 팀의 고유권한입니다. 박 사장님이 이래라저래라하실 일이 아닙니다.”

    강단있게 말하면서도 염세훈은 박주혁의 날카로운 눈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박주혁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렇군요. 어쨌든 공정한 절차에 의해 번역업체가 선정되었다면 윤리위원회에서도 별문제 삼지 않겠죠. 설마 그 업체에서 커미션 받으시는 건 아니죠?”

    “바, 박 사장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염세훈은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쳤지만, 동공은 지진이 난 듯 심하게 흔들렸다. 커미션 부분은 증명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공정한 방식으로 외주업체를 등록한 것은 아니었기에 윤리위원회에서 문제 삼을 가능성은 컸다. 염세훈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후···. 알겠습니다. 번역이 생기면 입찰에 부치도록 하겠습니다.”

    “입찰이라. 커미션을 받으려면 그 업체에 몰아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박 사장님!”

    “염 과장님. 정부 기관에도 입찰 비리가 만연한데 민간기업이라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는 파인랭스를 독점으로 써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샘플 번역으로 기술부의 판단을 정정당당하게 받아보고 싶을 뿐입니다.”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박주혁을 염세훈이 이를 갈며 노려봤지만,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윤리위원회로 갈 것만 같았다. 염세훈은 침을 한번 삼킨 뒤 목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조,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실력으로 보여드리도록 하죠. 조 과장. 이만 가지.”

    조광연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박주혁을 올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알던 사장님이 아니다. 분위기가 너무 다르잖아.’

    #

    권선호는 칼 같이 퇴근하여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입구에서부터 뽀얀 먼지들이 시야를 가렸는데 마치 자신의 앞날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무실은 인테리어가 완료되지 않아 무척 어수선했기에 권선호는 자연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최 상무!”

    권선호의 외침에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최소영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예.”

    “고객 방문하라고 했잖습니까!”

    “그러니까. 그걸 왜 제가 해야 하냐고요.”

    최소영이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니 권선호는 어이가 없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번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했지만, 현재 상황을 알고 있기는 한건가?

    ‘대체 얘는 뭐지?’

    권선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최소영을 향해 손을 휘적였다.

    “그냥, 퇴근하세요.”

    “아직 일 남았는데요.”

    “됐으니까. 들어가라고!”

    권선호가 얼굴을 붉히며 버럭하자, 최소영이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왜 화를 내세요?”

    “하. 됐으니까 퇴근하시라고요.”

    권선호는 최소영과 말도 섞고 싶지도 않았다. ANT와 알파텔을 방문한 박주혁이 대체 무슨 짓을 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유일한 부하직원이라는 자는 상황분별도 못 하고···. 최소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새침한 표정으로 짐을 챙겨 일어났다.

    “그럼, 진짜 갑니다.”

    “들어가세요.”

    ‘사춘기 꼬마도 아니고, 진짜!’

    권선호는 당당한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가는 최소영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소영이 사무실을 떠나자 권선호는 임시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수화기를 들었다. 먼지 때문에 전화번호를 누를 때마다 지문이 찍혔다. 이 먼지 구덩이 속에서 그래도 일하겠다고 버티고 앉아 있었을 최소영에게 잠깐이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네. ANT 박재용 부장입니다.”

    “부장님. 저 권선호입니다.”

    “또 왜?”

    ‘개새끼. ANT에 넣어줄 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더니.’

    권선호는 박재용 부장의 불만 섞인 말투에 치를 떨며 말했다.

    “오늘 파인랭스가 방문했다던데 혹시 무슨 소식 없습니까?”

    “그걸 대체 왜 나한테 묻는 건데? 내가 구매부야?”

    “구매부가 아니시니까 소식 아는 것 없냐고 묻는 거잖습니까?”

    박재용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권 사장. 자네 회사와 파인랭스. 두 곳에 번역을 나눠서 의뢰할 생각인가 보더군.”

    “나눠요?”

    “어. 베스트 번역원 한 곳으로는 일정에 차질이 있을 수도 있으니 백업 번역회사가 필요하다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 하겠어? 틀린 말도 아니고 말이야.”

    “그, 그게 무슨 말이세요. ANT 번역을 위해 IT 전문 번역가들을 채용했는데!”

    권선호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는 것을 박재용은 묵묵히 듣다가 권선호가 조금 누그러들자 힘주어 말했다.

    “권 사장. 내가 분명 전에도 말했지? 구매부가 아닌 이상 장담할 수 없다고.”

    “...”

    “내가 인원 채용하라고 했었나? 난 할 만큼 했어. 이 일로 다신 연락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끊겠네.”

    - 뚝. 뚜뚜뚜.

    통화종료 음이 가슴을 후벼팠다. 권선호는 여전히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대로면···.”

    문뜩 불길한 생각이 들었는지 권선호가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고는 다시 전화를 돌렸다.

    “네, 구매부 염세훈입니다.”

    “염 과장.”

    “아···. 네, 권 사장님.”

    염세훈은 권선호의 전화가 달갑지 않았는지 말끝을 흐리며 답했다. 이상함을 감지한 권선호가 염세훈을 닦달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시면서 뭘 물어보세요.”

    심드렁한 염세훈의 말에 권선호는 미간을 좁혔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최대한 부드럽게 되물었다.

    “알긴 뭘 알아. 오늘 박 사장 만난 건은 잘 해결된 거지?”

    “하아···.”

    염세훈의 깊은 한숨에 권선호도 땅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말도 마세요. 샘플 번역을 베스트 번역원과 파인랭스에 의뢰하기로 했으니까. 준비 잘하세요.”

    “뭐? 염 과장. 샘플 번역이라니. 차라리 입찰한다고 하지 그랬어!”

    “사장님 옹호하다 제가 잘릴 뻔했습니다. 뭐, 됐고요. 잘 준비하셔서 기회를 잡으세요. 이제부터는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이 없네요.”

    - 뚝. 뚜뚜뚜.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은 권선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관자놀이 쪽에 힘줄이 불쑥 튀어나왔다. 부릅뜬 눈에 실핏줄이 도드라져 당장이라도 피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씩씩거리던 권선호가 갑자기 악을 쓰며 소리쳤다.

    “박. 주. 혁! 이 개새끼야!”

    - 쾅!

    악을 쓰고도 화를 주체할 수 없었는지, 권선호가 책상을 주막으로 내리쳤다. 뽀얗게 쌓여있던 먼지가 흩날리며 권선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게 너의 앞날이라고 알려주듯 말이다.

    #

    박주혁은 알파텔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고 조광연이 조심스럽게 시동을 걸며 박주혁의 눈치를 살폈다.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낀 박주혁이 조광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조 과장님. 왜 그러세요?”

    “예?”

    박주혁의 물음에 조광연이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쳐다보자, 조광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알던 사장님이 아니신 것 같았습니다.”

    “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박주혁이 ANT와 알파텔에서 휘두른 카리스마에 조광연은 완전히 압도되었다. 평소 자상하고 직원들을 위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라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박주혁은 조광연의 말에 그저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조광연은 박주혁의 미소를 보며 자신도 피식 웃어버렸다.

    회사에 복귀하니 오후 6시가 넘어 있었다.

    박주혁은 요키아의 RFP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본능적으로 권선호의 자리로 눈이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이미 퇴근했는지 자리에 없었다.

    ‘몸이 다셨군요. 권 부장님.’

    박주혁은 만족스럽다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며 박영희를 호출했다.

    “박 팀장.”

    “예. 사장님.”

    “드디어 CDMA가 시작될 모양입니다.”

    박주혁은 웃어 보이며 요키아에서 수주한 RFP 문서를 박영희에게 내밀었다. 두툼한 문서를 내려보는 박영희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박 팀장. 무슨 일 있습니까?”

    “사장님. 솔직히 요즘 일을 너무 많이 가져오셔서 걱정입니다.”

    “걱정이요?”

    박영희는 OECD 문서에 CDMA 제안요청서까지 몰리면 감수팀에 과부하가 걸리게 되고 그로 인한 품질 저하가 염려된다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그녀의 우려가 충분히 이해되기에 박주혁은 따뜻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박 팀장. 이 문서는 우선 소프트카피만 만드세요.”

    “소프트카피요? 번역 진행이 아니라요?”

    박영희는 박주혁의 지시가 이해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주혁은 박영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제게 다 생각이 있습니다. 소프트카피만 준비해놓으세요.”

    “음···. 알겠습니다.”

    박영희는 살짝 미심쩍었지만, 박주혁에게 무슨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미뤄 짐작했다. 박영희에게 업무 지시를 한 박주혁은 사장실로 들어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에 ANT와 알파텔을 수주하게 되면 시스템의 권한이 열리겠지? 기왕이면 전송기능이면 좋겠는데.’

    번역본이 시스템에 있는 것은 확인했지만, 박주혁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업무에 활용하려면 직접 타이핑을 하거나 메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수주한 CDMA 무선설비 제안요청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번역본이 존재하는 것을 알지만, 사용하려면···. 그 많은 글자를 타이핑할 생각을 하니 벌써 손목이 시큰거리는 것 같았다.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손목을 몇 바퀴 돌리더니 중얼거렸다.

    ‘손목 조심해야지.’

    손목 운동을 마친 박주혁이 컴퓨터 앞에 앉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시스템 온. 검색, 요키아, CDMA 무선설비 제안요청서.”

    - 검색 중입니다···.

    - 검색 완료.

    요키아 / 한설텔레콤 CDMA 무선설비 제안요청서

    요키아 / 극성텔레콤 CDMA 무선설비 제안요청서

    요키아 / 크트프리텔 CDMA 무선설비 제안서

    ...

    ..

    .

    나열된 문서 중 하나를 클릭한 박주혁은 눈앞에 빼곡한 글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밤새우겠네.”

    격렬한 운동을 하기 전 준비운동을 하듯 박주혁은 손가락을 풀고 어깨를 문질렀다. 그가 막 손가락으로 타이핑을 시작하려는 찰나 사장실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박주혁 님! 퀵입니다.”

    키보드를 치려다 말고 박주혁은 눈을 끔벅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퀵? 올 것이 없는데?”

    박주혁이 사장실 문을 열자 조광연이 대봉투를 들고 사장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장님. ANT에서 왔는데요?”

    “ANT?”

    박주혁은 대봉투를 받아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주혁이 밀봉된 대봉투를 뜯으며 몸을 돌리는데 귓가를 울리는 알람 소리와 함께 눈앞에 팝업이 떴다.

    - 띠링!

    - 파인랭스의 성장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팝업의 첫 문구만 확인한 박주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이스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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