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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28화 (28/136)
  • 028화 잡았다. 요놈!

    박주혁은 조광연이 차에 도착하기 전에 요키아가 건넨 RFP의 제목을 살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시스템 온. 검색. 요키아, CDMA 무선설비 제안요청서.”

    - 검색 중입니다···.

    - 검색 완료.

    요키아 / 한설텔레콤 CDMA 무선설비 제안요청서

    요키아 / 극성텔레콤 CDMA 무선설비 제안요청서

    요키아 / 크트프리텔 CDMA 무선설비 제안서

    ...

    ..

    .

    박주혁은 눈앞에 떠오른 정보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시스템 오프.”

    박주혁이 중얼거리는 사이 조광연이 차로 다가와 문을 열며 물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만?”

    박주혁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조광연을 바라보자, 그는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차에 시동을 걸었다. 미끄러져 가는 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박주혁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무릎을 내리쳤다.

    ‘맞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CAT Tool!’

    박주혁의 돌발행동에 조광연이 흠칫 놀라며 박주혁을 힐끔 바라봤다. 하지만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박주혁에게 말을 붙일 수 없었다.

    CAT Tool(Computer Assisted Translation.), 컴퓨터를 활용한 번역지원 도구를 뜻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번역이 필요한 지역은 유럽이다.

    총 40여 개의 국가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유럽의 번역회사들은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CAT Tool을 개발하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CAT Tool인 트레이도스도 영국 번역회사가 개발한 소프트웨어였다.

    트레이도스는 간단한 매뉴얼 번역과 소프트웨어 로컬라이제이션(현지화)에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반복적인 문장과 단어들을 자동으로 번역해주는 트레이도스는 빠르게 시장에 안착했다. 그로 인해 많은 번역회사와 번역사들이 트레이도스로 번역을 진행하게 됐고 트레이도스는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다.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소프트웨어 한 카피에 100만 원을 호가했고 매년 업그레이드를 하여 버전이 낮은 트레이도스는 호환이 되지 않아 새로 구매할 수밖에 없는 가두리 마케팅을 했다.

    파인랭스처럼 20여 명의 번역사를 보유한 회사의 경우 매년 2천만 원을 트레이도스 구매 비용으로 지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1년짜리 소프트웨어 트레이도스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면서 단순 번역회사였던 SEL은 번역이 아닌 소프트웨어 개발사로 변모했다.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번역본과 원본은 내 손에 있어. 이 데이터를 이용하여 TM을 구축할 수 있다면···.’

    TM(Translation Memory), 번역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또는 CPU라고 보면 된다. 더 쉽게는 게임기에 사용하는 칩 또는 CD가 TM이라고 보면 된다. CAT Tool에 문서 종류별로 만들어진 TM을 삽입하여 번역하게 되면 많게는 80%가 자동번역이 된다. 문서 비교 후 비슷한 원문을 TM에 저장된 번역문으로 대체하는 방식이다. 간단한 기술이지만, 필수적으로 번역 빅데이터가 필요하다.

    ‘파인랭스 시스템의 방대한 데이터라면 독자 CAT Tool 개발이 가능하다. 잠깐 설마?’

    생각을 확장하던 와중에 갑자기 박주혁이 미간을 좁히며 이빨을 악물었다.

    ‘파인랭스 시스템을 구매하려던 번역회사가 노린 것은···?’

    권선호가 다 망해가던 박주혁을 찾아와 파인랭스 시스템을 팔라며 했었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거부 의사를 밝히자 적대적 M&A까지 시도했던 그 회사.

    ‘이름이 뭐였더라? 타이거···.’

    트레이도스를 개발했던 영국 번역회사 SEL의 경쟁사인 타이거브릿지였다.

    타이거브릿지가 트레이도스를 대항하기 위해 데이터 확보 차원에서 파인랭스 시스템을 구매했다. 방대한 번역본을 가지고 있는 파인랭스 시스템이라면 한국 시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겠지. 박주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짐했다.

    ‘이제는 내가 개발하겠어. 파인랭스는 번역회사에 머물지 않는다.’

    박주혁이 의지를 활활 태우고 있을 때, 차는 ANT 사무실에 도착했다. 조광연이 박주혁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 사장님? 도착했는데요.”

    박주혁의 이글거리던 눈빛은 조광연의 말에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음? 아. 갑시다.”

    #

    조광연은 ANT 구매팀에게 박주혁을 친절하게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박주혁 대표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ANT 구매부 방대혁 부장입니다.”

    박주혁은 방대혁과 명함을 교환하고 자리에 앉으며 품에 있던 RFP를 은근슬쩍 테이블 끝에 올려놨다. 문서의 제목이 살짝 노출되도록 말이다.

    [CDMA 무선설비 제안요청서]

    지금 중계기 제조업체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인 CDMA다. 구매부서라 하여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박주혁의 노림수였지만, 방대혁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시간문제일 뿐이지만.

    “오늘 뵙자고 한 이유가?”

    방대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아마도 수많은 업체와 미팅을 하면서 생긴 버릇 같아 보였다. 박주혁은 방대혁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ANT의 번역 파트너로 파인랭스를 고려해 주십사 방문했습니다.”

    “아, 번역···.”

    방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박주혁과 조광연을 차례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혹시 베스트 번역원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조광연이 베스트 번역원이라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고 박주혁은 쓴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권선호가 벌써?’

    박주혁이 말없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자, 조광연이 방대혁의 물음에 답했다.

    “제가 나름 이 업계에서 오래 있었지만, 베스트 번역원이라는 곳은 처음 들어봅니다.”

    “그러시겠죠. 저도 처음이라 여쭤본 겁니다.”

    “그런데 그곳은 왜?”

    “그게···. 참.”

    방대혁은 잠시 고민하더니 결심을 한 듯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은 저도 파인랭스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정통부에서도 의뢰한다죠?”

    방대혁의 물음에 조광연이 미소지으며 입을 달싹거리려 할 때, 박주혁이 조광연을 말리며 정색했다.

    “방 부장님. 죄송하지만, 저는 어떤 말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고객과의 거래 내용은 기밀 사항입니다.”

    박주혁의 반응에 살짝 놀란 방대혁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채고는 금세 미소 지었다.

    ‘보안은 확실하다는 겁니까?’

    방대혁은 박주혁과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술부에서 계속 베스트 번역원을 써야 한다고 우기고 있어서 말입니다.”

    “음. 그런 사정이 있으시군요.”

    박주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모서리에 두었던 문서 더미를 살짝 자기 쪽으로 끌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원래 기술부에서 강력히 주장하면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 과장. 일어나지.”

    박주혁의 말에 조광연이 무척 당황하여 박주혁을 올려봤다.

    “예? 사, 사장님?”

    “이미 번역 파트너를 지정했다는 말씀이시지 않나. 서류 잘 챙기고 일어나자고.”

    “예에?”

    조광연은 여전히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박주혁 앞에 놓여있던 RFP를 주섬주섬 챙겼다. 그제야 방대혁은 서류로 시선을 옮겼고 서류의 제목을 확인한 그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음? 이건!’

    정부가 이동통신 사업의 임시사업자를 선정 공고를 하면서부터 회사가 무척 바삐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방대혁도 잘 알고 있었다. 영업부에서도 곧 제안요청서가 나올 거라며 최대한 빨리 번역업체를 선정해달라고 아우성쳤으니 모를 수가.

    ‘아직 공식 요청이 없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왜 저 문서가 파인랭스 손에 있지? 정통부와 일한다더니···. 백 루트가 있나?’

    박주혁이 일어난다고 했을 때 딱히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던 방대혁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박 사장님. 왜 그렇게 성급하게 그러십니까? 조금 더 얘기해 보시죠.”

    “이미 베스트 번역원을 기술부에서 원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현업의 요청을 구매부에서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파인랭스에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박주혁은 이미 얘기가 끝났다는 듯, 조광연을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광연은 박주혁과 방대혁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방대혁도 조급했는지 박주혁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

    “박 사장님. 물론 현업의 요청도 중요하지만, 구매부에서는 가장 적합한 업체를 선정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진정하시고 잠깐 앉아 보세요.”

    “으음.”

    박주혁은 마지못해 자리에 앉으며 방대혁의 눈을 쳐다봤다.

    “파인랭스가 IT 전문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력 없는 베스트 번역원과 거래하는 것이 찜찜했던 터라.”

    방대혁은 말하면서도 시선이 계속 조광연이 들고 있는 서류로 향했다. 방대혁의 심리를 간파한 박주혁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통신사에서 곧 제안요청이 있을 것 같으니 베스트 번역원과 파인랭스의 품질과 속도를 비교해보시는 겁니다.”

    방대혁이 서류뭉치에 꽂혀있던 시선을 박주혁에게 옮기며 되물었다.

    “품질과 속도 비교요?”

    “예. 5개 통신사의 제안요청서를 베스트 번역원과 파인랭스에 나눠 발주하고 기술부에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는 겁니다. 그 결과에 따라 어떤 업체와 파트너십을 체결해야 할지가 명확해지지 않겠습니까?”

    박주혁의 말에 방대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품질에 자신이 있으신가 보죠?”

    “품질뿐이겠습니까?”

    “하하하.”

    박주혁의 자신감 있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방대혁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박주혁은 그 손을 맞잡았다.

    “좋습니다. 말씀처럼 월등한 품질과 속도를 보여주십시오.”

    “번역회사라면 기본적인 사항이죠. 믿어보십시오.”

    방대혁은 다시 한번 껄껄 웃었고 조광연은 어리둥절하여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뭐지? 태풍이 지나간 것 같아.’

    #

    “알파텔 구매부 염세훈 과장입니다.”

    순조로웠던 ANT와 달리 알파텔은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알파텔은 이미 번역 파트너가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파인랭스와 거래할 수 없겠습니다.”

    염세훈은 초면부터 강수를 두며 박주혁과 조광연을 밀어붙였다. 조광연이 어떻게든 이빨을 넣어보려 했지만, 염세훈은 요지부동이었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갑니까? 파인랭스는···.”

    염세훈은 더 듣기도 싫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조광연의 말을 잘랐다.

    “파인랭스가 IT 전문업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파텔 내부적으로 이미 번역회사가 결정되어 있으니, 다음 기회에 같이 해보시는 것으로 하시죠.”

    어떤 말을 하더라도 파인랭스와는 거래를 할 생각이 없다는 염세훈의 말에 조금씩 짜증이 밀려왔다. 접근 방법을 달리하여 조광연이 냉랭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지만,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권선호가 헤드헌팅 시켰다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 염세훈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박주혁은 최후의 수단으로 요키아에서 수주한 RFP를 은근슬쩍 내밀었지만, 염세훈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요것 봐라? 그렇단 말이지.’

    구매부에서는 만약을 대비해 외주업체를 한곳과 진행하지 않는다. 항상 백업이 있기 마련인데 염세훈은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겠다며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마치 알파텔에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는 듯 말이다.

    박주혁은 염세훈의 예사롭지 않은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권선호가 심어둔 인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상황 파악이 끝난 박주혁이 안광을 밝히며 갑자기 정색했다.

    “염 과장님.”

    “예.”

    “알파텔 윤리위원회가 어디죠?”

    “네? 그게 무슨···.”

    윤리위원회라는 말에 염세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잡았다. 요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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