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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27화 (27/136)
  • 027화 감이랄까요?

    최지훈의 얘기를 들은 박주혁은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랬군요.”

    “예. 그래서 ANT와 알파텔에서 파인랭스와 거래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박주혁은 최지훈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헤드헌팅까지 했었다?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었군.’

    박주혁이 최지훈의 폭로를 곱씹고 있는데, 조광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장님!”

    우렁찬 그의 목소리에 박주혁과 최지훈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요키아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언제요?”

    “최대한 빨리 들어오라는데 아무래도 이동통신 관련하여 뭔가 움직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박주혁은 서둘러 외투를 챙기며 최지훈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최 대리는 우선 OECD부터 잘 챙기세요.”

    “아, 알겠습니다.”

    #

    박주혁은 조광연의 영업용차에 올라타며 물었다.

    “오늘 미팅의 주안점이 뭡니까?”

    “네. 요키아 구매팀에서 연락이 온 건데. 실무부서가 다급한 번역이 있다고 했습니다.”

    “긴급번역? 그렇다면 입찰은 아니겠군요. 강남에 ANT와 알파텔도 있죠?”

    “예. 다 근처에 있습니다.”

    “나온 김에 만나고 가야겠습니다.”

    조광연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박주혁을 바라보자, 그가 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을 본 조광연의 눈이 휘둥그레 뜨며 소리쳤다.

    “헛. 이것은 모터놀라 아닙니까?”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그런데 조 과장님. 운전할 때는 앞을 잘 봐야죠.”

    “아, 예!”

    잠시 휴대폰에 한눈을 팔던 조과장이 다급히 핸들을 다잡으며 정면을 주시했고, 박주혁은 휴대폰을 열어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네, 파인랭스 한기훈 대리입니다.”

    “아, 한 대리 수고가 많습니다. ANT와 알파텔에 연락해서 미팅을 잡아주면 좋겠군요.”

    “예? ANT와 알파텔이요? 몇 시쯤으로 잡을까요?”

    박주혁은 데쉬보드 근처에 있는 시계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흠. 지금이 3시니까 4시 이후 고객이 편한 시간으로.”

    “알겠습니다. 사장님.”

    “아, 약속 잡히면 이쪽으로 전화하세요. 번호가 011···.”

    한기훈에게 연락처를 알려주고 박주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PCS가 개통되면 영업팀은 전원 지급해야겠어.’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서라도 영업팀에게는 휴대폰이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이동하면서 업무 지시 및 백업을 요청해보니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됐다.

    한기훈에게 업무 지시를 내리고 얼마 뒤 박주혁은 요키아의 사무실이 있는 한 빌딩에 들어섰고, 조광연은 안내 데스크로 황급히 달려갔다. 그가 안내양과 무엇인가를 얘기하는 동안 박주혁의 휴대폰이 낮게 울어댔다.

    - 띠리리.

    “네. 박주혁입니다.”

    “사장님. 한기훈 대리입니다.”

    “그래. 한 대리.”

    “ANT는 4시 20분으로 잡았습니다. 알파텔은 5시 이후로는 상관없다고 합니다.”

    박주혁이 한기훈과 통화를 마칠 때쯤, 조광연이 다가와 말했다.

    “사장님. 구매팀과 담당자가 곧 내려온다고 합니다. 1층에 접견실이 있다고 하니 이동하시죠.”

    박주혁과 조광연이 접견실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곧 요키아에서 두툼한 문서를 가지고 다가왔다.

    “조 과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조광연은 밝은 목소리로 요키아 담당자들을 맞이하고는 곧바로 박주혁을 소개했다.

    “이쪽은 파인랭스 대표님이신 박주혁 사장님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박 사장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구매부 신지수 과장입니다. 이쪽은 저희 엔지니어인 황기태 선임입니다.”

    박주혁은 신지수, 황기태와 명함을 교환하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 급하게 파인랭스의 방문을 요청한 것은···.”

    신지수는 말끝을 흐리더니 황기태를 쳐다봤다. 그러자 황기태가 문서를 조광연에게 내밀었다. 두툼한 RFP(Request For Proposal) 5묶음이 있었다. 박주혁은 단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드디어. 통신회사들이 이동통신 기지국 설치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군.’

    저 제안요청서(RFP)는 이동통신 사업에 예비사업자로 선정된 한설정보통신, 극성정보통신, 크트프리텔, 신세기통신, 신세계, 한국통신일 것이다. 몇몇 회사가 정통부의 인허가에 문제를 겪지, 문제없이 이동통신 사업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통신사업자들은 시범운영을 위한 기지국 건설을 위해 중계기 제조업체에 RFP를 발송한 것이다.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RFP의 겉표지를 슬쩍 살펴봤다.

    ‘역시.’

    신지수는 박주혁과 조광연이 문서를 확인할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준뒤 입을 열었다.

    “급하게 번역이 필요합니다. 아시겠지만, 저희는 본사에 보내서 답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 시간이 촉박합니다.”

    박주혁이 익히 들어왔던 말이었다. 본사 기술팀에서 RFP에 해당하는 기술을 지원할 수 있는지 확인 절차가 필요하고, 지원할 수 없는 부분은 언제까지 기능을 추가하겠다는 답변을 통신사에 보내야 한다. 그렇게 조율이 완료되면 RFQ(Request For Quotation)가 발송되게 된다.

    RFP 하나를 번역하면 답변서와 응답서 그리고 RFQ(견적요청서)까지 번역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번역이 중계기 제조업체 8개 사, 전부가 진행해야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 제조사에 발송되는 통신사의 RFP는 같다는 것이다.

    즉, 한 통신사의 RFP를 번역하면 나머지 7개 사에는 번역된 문서를 보내기만 하면 됐다. 통신사별 RFP를 한 번 번역하여 7배의 금액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박주혁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RFP를 다시 한번 살펴봤다. 그런데 RFP의 완성도가 조금 떨어지는 것 같았다. 중간중간 내용이 빠져 있는 부분이 있었다.

    ‘음?’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신지수가 헛기침하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장님. 기밀 사항입니다. 영업부에서 초안을 입수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시간이 없어서요.”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제야 박주혁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른 업체보다 요키아가 먼저 연락해온 이유를 말이다. 답변서를 작성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물밑전쟁에서 요키아가 승리한 것이다. 드래프트라도 먼저 확보하는 것이 회사의 경쟁력이다. 그런 면에서 요키아가 다른 업체보다 조금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박주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른 곳은 빠르면 2일 늦으면 일주일 뒤에 연락이 오겠군.’

    신지수는 박주혁을 쳐다보며 다그쳤다.

    “언제까지 가능할까요?”

    통신사의 RFP의 분량은 대동소이해 보였다. 대략 500페이지 빠르면 5일 분할 진행하면 3일 정도 걸릴 분량이었다. 박주혁은 잠시 조광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대략 500페이지 3일이면 가능하겠나?”

    “예? 사, 삼일이요?”

    조광연이 박주혁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고 신지수는 눈을 살짝 크게 뜨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3일이면 정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신지수의 말에 옆에 과묵하게 앉아 있던 황기태도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조광연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과장님, 선임님. 번역은 기계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3일이라뇨. 최소로 잡아도 5일 정도는 생각하셔야 합니다.”

    “5일이요···.”

    신지수가 미간을 좁혔고 황기태가 팔짱을 끼며 고민하는 듯했다. 박주혁은 조광연의 대응이 만족스러웠는지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과장님. 그럼 이렇게 하시죠.”

    박주혁의 말에 신지수와 황기태가 상체를 숙이며 박주혁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

    “ANT와 알파텔이요? 예. 몇 시로 약속을 잡을까요?”

    전화 내용에 권선호의 귀가 쫑긋거렸고 곧 고개를 돌려 한기훈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한기훈이 전화를 끊자, 권선호가 한기훈을 불렀다.

    “한 대리. 누구였어?”

    “예?”

    “누군데 ANT와 알파텔과 약속을 잡느냐고.”

    “아.”

    한기훈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평소 조광연과도 사이가 좋지 않은 권선호이기도 했고 통신 전담도 아닌데 갑자기 관심을 두는 것도 의아했기 때문이다.

    ‘왠지 찜찜한데?’

    한기훈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누구겠어요. 조 과장님이죠.”

    “조 과장?”

    한 시간 전쯤 박주혁과 조광연이 함께 나가는 것을 최지훈이 봤다고 했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ANT와 알파텔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박주혁이라는 소리와 같았다.

    ‘박주혁!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권선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최지훈에게 말했다.

    “최 대리.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예. 알겠습니다.”

    권선호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저 권선호입니다.”

    “어. 권 부장. 또 무슨 일이야?”

    “오늘 파인랭스에서 ANT와 만난다고 하던데 혹시 들으신 바 없습니까?”

    “아니. 이봐. 내가 구매부서냐고? 어떻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 수 있겠어?”

    “확인해 보시고 조처를 하세요.”

    “아니 이 사람이! 내가 자네 부하직원이야? 끊어!”

    - 뚝.

    박재용 부장이 전화를 거칠게 끊었고 권선호는 눈에 불을 켠 채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젠장!”

    평소답지 않게 권선호가 조급증을 내고 있었다. 그는 다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염세훈 과장 대신 받았습니다.”

    “아, 염 과장님 자리에 안 계십니까?”

    “예. 미팅에 들어가셨습니다. 메모 남겨놓을까요?”

    “파인랭스 권선호 부장에게 전화 왔었다고 남겨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 딸깍.

    수화기를 내려놓는 권선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벌써 만나고 있는 건가?”

    시간상 그럴 리 없었건만, 권선호는 불안감에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최소영 상무!”

    “예. 사장님.”

    “ANT와 알파텔과 미팅을 잡고 방문하세요.”

    “예?”

    최소영이 무척 당혹스럽다는 듯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 수화기 너머로까지 들렸다.

    “급해. 박주혁이 ANT와 알파텔과 미팅을 잡은 것 같더라고.”

    “그, 그런데 거길 왜 제가 가야 하는데요?”

    “일감 놓치고 싶어?”

    “...”

    최소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대답이 없었다. 권선호는 최소영이 답하지 않자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들어가서 담당자를 만나고 오라고!”

    “아니 사장님. 그걸 왜 제가 해야 하죠? 전 번역사지 영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뭐, 뭐!?”

    “최지훈 시키세요.”

    - 딸깍.

    권선호는 수화기를 집어 던지듯 놓으며 크게 소리쳤다.

    “이, 이런 씨발!”

    임시 책상에 앉아 있던 최소영이 수화기를 짜증스럽게 내려놓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가뜩이나 프리랜서 리스트를 만드는 것도 시간이 아까운데, 대뜸 고객을 방문하라니.

    “참나. 영업 같은 하찮은 일을 왜 나한테 시켜? 웃겨 진짜. 내가 최지훈 같은 줄 아나. 어이가 없어서 정말.”

    단어당 200원을 달라며 당당히 외치던 최소영의 인성은 과거나 현재나 여전했다.

    #

    요키아와 미팅은 잘 마무리되었고 박주혁은 신지수 과장과 황기태 선임과 웃으며 헤어졌다. 조광연은 박주혁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물었다.

    “사장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당연한 거잖아요? RFP 5개를 한꺼번에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우선순위가 급한 문서부터 순차적으로 보내면 요키아의 면도 서고, 우리도 시간을 벌지 않겠어요?”

    “맞는 말씀이긴 한데···. 한국통신 쪽이 급한 건 어찌 아셨습니까?”

    5개 이동통신사업자 중 가장 자금력도 좋고 현 정권의 비호를 받는 곳이었으니 박주혁에겐 쉬운 선택이었지만,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모르는 조광연에겐 신기할 따름이었다. 박주혁은 미소지으며 조광연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감이랄까요?”

    박주혁의 대답에 조광연이 눈을 크게 뜨며 버럭 소리쳤다.

    “아, 뭐에요. 진짜!”

    “하하하.”

    박주혁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량으로 이동했고, 조광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의 뒤를 쫓았다. 차량 앞에 먼저 도착한 박주혁이 조광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자, ANT가 근처랬죠? 어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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