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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26화 (26/136)
  • 026화 배신은 배신을 낳을 뿐이다.

    최지훈은 며칠 전부터 고민이 많았다.

    자신의 사수인 권선호가 가는 길이 포장된 도로라고 생각했었는데···. 최근에 파인랭스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본인도 그 무리에 끼고 싶었다.

    ‘나도 스터디 그룹 가입할 걸 그랬나?’

    하지만, 권선호의 눈치를 살피느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권선호가 파인랭스의 내부정보를 빼내 회사를 차리려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신생 업체로 시작해 파인랭스의 지위를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전에 망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최근 OECD 프로젝트 건만 놓고 봐도 그렇다. 권선호가 회사대표가 되면 박주혁처럼 OECD 프로젝트를 단독 수주할 수 있을까? 아무리 최지훈이 영업을 뛴다 한들,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따라가야 하는 걸까?’

    여태까지 권선호가 보여준 은혜에 보답하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지만, 막상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감봉되었지만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과 번역업계를 리드하는 회사에서 얻을 수 있는 커리어, 파인랭스의 잘 구축된 조직까지 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과연 현명한 처사일까?

    최지훈은 고심 가득한 얼굴로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박주혁이 다가와 다급하게 말했다.

    “OECD 문서가 도착했으니까, 영업팀 전부 내려가서 문서 옮깁시다.”

    심적 갈등으로 괴로웠는데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해야 한다니 솔직히 반가웠다. 그리고 지하 주차장에서 마주한 엄청난 양의 문서 박스가 최지훈의 마음을 더욱 들쑤셨다.

    ‘지금 이런 일을 처리하는 회사를 내 발로 나가야 한다는 거다. 최지훈 정신 차려.’

    최지훈은 회의실에 잔뜩 쌓여있는 문서를 보며 다시 한번 마음이 흔들렸다. 전 직원이 달려들어 번역 프로세스를 밟아가는데 최지훈은 OECD를 담당했음에도 마음만 싱숭생숭했다. 심지어 오전에 최소영이 회사를 관두며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오늘따라 권선호가 담배 피우자며 불러내는 것도 반갑지 않았다.

    그냥 담배만 피자는 것이 아닐 테니까.

    “최 대리도 다음 주에 합류하도록 해.”

    권선호의 말에 선뜻 답할 수 없었다. 대신 최지훈은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바빴다.

    ‘우선 시간을 벌어보자. 적당한 핑계가 있으니···.’

    “담당했던 OECD 프로젝트는 마감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권선호의 똥 씹은 표정을 볼 자신이 없어 최지훈은 눈을 슬그머니 내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권 부장님.’

    예전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다.

    - 배신은 배신을 낳을 뿐이다.

    #

    사무실은 OECD가 도착한 후 무척 분주하게 돌아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것을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박영희를 비롯 번역연구팀은 정신없이 문서를 분류하고 프리랜서에게 배부할 복사본을 제본했다. 키보드 치는 소리 외에는 조용했던 사무실이 오늘따라 유독 시끌벅적했다.

    박주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할당된 번역을 가지러온 프리랜서 번역사와 일일이 악수하고 보안 서약서에 서명을 받았다. 그 중에는 파인랭스 전 직원이었던 심형직 번역사도 있었다.

    “오셨어요?”

    “주혁이···. 아, 아니지. 박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박찬희가 아꼈던 사람인 만큼 어려서부터 심형직을 삼촌이라 불렀던 박주혁이었다. 물론 심형직도 박주혁을 조카처럼 예뻐했었고 말이다. 박주혁의 이름을 부르려다 말고 화들짝 놀라며 사장이란 호칭을 붙이는 심형직을 박주혁은 사장실로 안내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러게. 많이 힘들었지? 미안하다. 번역하느라 따로 연락도 못 했네.”

    “열심히 번역하시는 소식은 들었어요.”

    박주혁은 씩 웃었고 심형직도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OECD 수주 축하한다.”

    “번역을 원체 잘해주셔서 말이죠.”

    “에이. 나야 뭐 하던 일이니까.”

    심형직은 항상 이렇게 겸손했다. 이런 인간미 때문에 박찬희도 그렇게 챙겼던 것이겠지. 박주혁은 보안 서약서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정부 문서라 이런 계약을 해야 합니다.”

    “그럼. 해야지.”

    심형직은 잠시 계약서를 읽어보더니, 군소리 없이 서명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어. 뭔데?”

    “용어 통일···.”

    딱 한 단어만 말했는데 심형직은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듣고 잽싸게 대답했다.

    “아, 용어집 만들어서 박 팀장에게 보내 놓을게.”

    박주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번역사한테도 받아서 내부에서 필터링해서 재배포해야 한다. 안 그러면 알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삼촌. 그냥 다시 들어 오시는 건 어때요?”

    “싫다. 이제 집에서 하는 게 익숙해져서 어디에 얽매이는 게 싫어. 꼭 목에 줄이 채워지는 느낌일 것 같아서 말이지. 대신 내 1순위는 파인랭스야. 그건 약속할게.”

    이미 거절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좀 아쉬웠다. 박영희, 심영찬, 조광연 그리고 거기에 심형직까지 있다면 정말 든든할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선을 지켜야만 한다.

    “아니. 어떻게 1초도 망설이지 않아요?”

    “허허허.”

    심형직이 민망했는지 웃었고, 박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심형직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심형직 번역사님.”

    “어우.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니까 좀 긴장되는데?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박 사장님.”

    박주혁은 심형직을 배웅하고 사장실로 돌아오자, 최지훈이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박주혁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사직인가? 하필 이렇게 바쁠 때. 쯧.’

    “사장님.”

    “어, 최 대리. 무슨 일입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박주혁은 최지훈을 빤히 바라보며 곧 나올 사직서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사뭇 달랐다.

    “이건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음?”

    박주혁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최지훈을 쳐다봤다.

    #

    구경숙은 탕비실에서 자신이 담당한 OECD 문서를 복사하고 있었다.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권선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바라보고 있었다.

    “구 과장.”

    “예. 부장님.”

    내심 흠칫 놀랐지만, 구경숙은 애써 태연한척하며 다시 복사기로 눈을 돌렸다.

    “구 과장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권선호는 잠시 주변을 살펴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말을 이어갔다.

    “모른 척하지 말고, 최소영은 이미 내 회사로 옮겨갔다고.”

    “회사요?”

    구경숙이 처음 듣는 얘기인 것처럼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권선호는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왜 이래?”

    “죄송해요.”

    권선호에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함께 한다고 그를 부추겼던 것이 미안할 뿐.

    “미안하면 함께 가자.”

    “그럴 수 없어요.”

    구경숙의 대답에 권선호가 미간을 와락 구기며 힘주어 말했다.

    “번역일을 못 해도 좋은 거야?”

    “...”

    - 철터덕 즈즈즉.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커다란 복사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부장님.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프리랜서와 일해보니 이것도 보람이 있더라고요.”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박영희는 구경숙의 능력을 높이 사고 그녀에게 프리랜서 번역사 양성 과정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아직 계획 단계긴 했지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지망생을 가르치고 번역의 노하우를 전수하여 프로 번역사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스터디 그룹을 리드하면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지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한데 번역사로의 경험과 능력을 발휘해 번역사를 키워낼 수 있다면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요즘처럼 출근하는 것이 즐거운 적이 없었다. 구경숙은 이런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전 파인랭스에 남겠습니다.”

    “구 과장!”

    권선호가 버럭 소리치자, 탕비실 근처에서 일하던 몇몇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크게 뜨며 쳐다봤다. 권선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입을 굳게 닫으며 구경숙의 팔목을 잡고 끌고 나가려 했다.

    “잠깐, 얘기 좀 해.”

    “아! 왜 이러세요! 이거 놓으세요.”

    평소에 수줍음을 많이 타고 순종적이었던 구경숙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완강히 저항하니 권선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구경숙의 외침에 조광연이 벌떡 일어나 탕비실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권 부장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싫다잖아요. 그 손 놓으세요!”

    “아, 아니 이건.”

    권선호는 눈을 크게 뜨고 황급히 구경숙의 팔목을 잡은 손을 놓더니 씩씩거리며 탕비실을 나갔다.

    “구 과장님. 괜찮아요?”

    구경숙은 권선호에게 잡혔던 손목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조광연이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절 부르세요. 제가 경숙씨를 지켜드리겠습니다.”

    “예에?”

    구경숙은 경숙씨라고 말하는 조광연을 황당하다는 듯 눈을 끔벅이며 빤히 바라봤고 조광연은 히쭉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부리부리한 눈에 거무튀튀한 피부, 누가 봐도 덩치 큰 곰 같은 조광연이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이자, 그 모습이 살짝 귀여워 보이는 구경숙이었다.

    “풉.”

    구경숙의 미소를 보자 조광연은 용기가 솟았는지 뭔가 말하려고 했다. 그 찰나 한기훈이 탕비실을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아 쫌! 과장님. 전화가 왔어요. 일하다 말고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서 뭐 해요?”

    “전화? 어디서?”

    “요키아요.”

    요키아라는 말에 조광연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런 건 바로 얘기해야지!”

    “바로 한 건데요?”

    “이씨. 비켜봐.”

    조광연과 한기훈이 자리로 돌아갔고 구경숙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사람들이야.”

    #

    한편, 사장실로 들어간 최지훈은 주저하며 말을 하지 못했다.

    “사장님. 권 부장님이···.”

    “권 부장이 뭐요?”

    “후. 권 부장이 아무래도 다른 회사를 차린 것 같습니다.”

    박주혁에게는 놀랄 것도 없는 소식이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최지훈에게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걸 왜 네가 말해?’

    최지훈은 권선호의 최측근이었다. 최근까지도 권선호의 그림자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무슨 심경의 변화일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최지훈이 파인랭스와 함께 한다고 하더라도 박주혁은 그를 받아줄 마음이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최지훈에게 정보를 들을 필요는 있었다. 놀란 표정과 달리 박주혁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렇습니까?”

    최지훈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차분하게 답하는 박주혁에게 놀랐다.

    “아, 알고 계셨습니까?”

    “고객 리스트를 뽑으며 시스템에 쓰일 자료라고 할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큭!”

    박주혁의 뼈 때리는 말에 최지훈은 입을 콱 깨물며 고개를 살짝 숙였고 박주혁은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 턱을 괴며 말했다.

    “그래서 최 대리가 지금 그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예···? 파인랭스의 직원으로 상사의 비위를 고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와서요?”

    “권 부장님의 확실한 의중을 알 수 없었기에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최지훈의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들으며 박주혁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OECD 때도 그렇고, 최 대리는 영업에 소질이 없는 것 같군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입찰비리. 파인랭스가 수주할 차례였음에도 양보했던 이유. 그것은 권 부장이 차린 회사에서 다음 프로젝트를 수주하려는 노림수 아니었나요?”

    최지훈의 콧잔등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갔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이미 알고 있었어. 젠장.’

    “그래서 최 대리. 지금 이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최지훈은 입술을 얄팍하게 다문 채 박주혁을 잠시 쳐다봤다.

    ‘별수 없나. 지금 이 위기를 빠져나가려면 어쩔 수 없다.’

    “다 알고 계셨다니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현재 파인랭스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장님께서 아직 모르시는 것이 있습니다. 권 부장은···.”

    박주혁은 여전히 깍지낀 양손에 턱을 괸 채 최지훈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아는 걸 다 말해. 그럼 최소한 명예퇴직은 할 수 있게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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