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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25화 (25/136)
  • 025화 가슴이 웅장해지는구나!

    “권 부장. 정말 어려웠다고.”

    “보답하겠습니다.”

    늦은 저녁.

    권선호는 아직 인테리어 중인 사무실 한쪽에 귀퉁이에 마련한 임시 책상에서 ANT 박재용 부장과 통화를 마쳤다.

    “봄바디오가 뼈아프긴 하지만, ANT와 알파텔은 확보했군.”

    굳었던 그의 표정이 조금 여유로워졌다. 권선호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은 어수선한 사무실이었지만, 이제 곧 전 파인랭스의 번역사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들은 출근하자마자 키보드를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며 사무실에 활력을 불어넣겠지. 흡족한 미소로 미래를 상상하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권선호였다.

    “좋아. 이제 시작이다.”

    적금, 예금을 모두 털었고 사업자 대출까지 받아 실탄은 충분했다. 일감도 어느 정도 확보한 상태니 선수들만 들어온다면 베스트 번역은 순항할 수 있다. 권선호는 이를 앙다물며 결의를 다졌다.

    “할 수 있어.”

    박찬희가 링크 번역원을 인수하고 파인랭스로 사명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합류하여 파인랭스를 함께 키웠었다. 그때의 경험대로라면 충분히 베스트 번역을 궤도에 올릴 수 있을 터. 심지어 파인랭스처럼 맨땅의 헤딩도 아니고, 물건을 의뢰할 고객까지 확보한 상태 아닌가?

    생각할수록 자신감이 샘솟는지 권선호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

    “좋은 아침입니다.”

    권선호는 밝은 표정으로 직원들에게 인사했다. 매번 무표정했던 권선호의 밝은 얼굴이 낯선 몇 직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은 권선호에게 뜻깊은 날이었다. 창업 사실을 기존 번역부 직원들에게 알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권선호는 우선 최소영 팀장에게 다가가 잠시 얘기를 불러냈다. 퀭한 얼굴에 다크써클이 진한 최소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권선호와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최 과장. 요즘 어때?”

    “죽을 맛입니다. 부장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준비는 다 됐어.”

    “진짜요?”

    최소영 과장이 반색하며 미소 지었다.

    “당장 사직서를 써야겠군요.”

    “아니. 최대한 파인랭스에 타격을 줘야 하니까 일주일 뒤 일괄 사직서를 내는 것으로 하지.”

    “한 방 먹이겠다는 거군요!”

    최소영이 뭔가 후련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권선호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오늘 점심. 기존 번역부 직원들과 점심 식사 자리를 만들었으면 하는데?”

    “예. 제가 전달할게요. 부장님. 아니, 사장님. 조금 더 서둘러 주세요. 여기서 일하는 것이 지옥 같아요.”

    마음이 뜨면 모든 것이 싫어지는 법이지 않던가? 최소영은 이미 베스트 번역으로 출근하고 싶은 마음에 파인랭스의 모든 것이 싫었다.

    “조금만 참아. 다 됐어.”

    “후. 네.”

    박주혁이 사장실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사이 권선호는 최소영 및 기존 번역 1, 2부 직원들과 함께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중국집으로 향했다. 룸에 자리를 잡은 권선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기롭게 말했다.

    “여러분. 고생이 많습니다.”

    권선호에게 이목이 집중됐다.

    “번역사로 입사해 프리랜서를 관리하느라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계십니까?”

    고충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한 말로 그들을 위로하려 했는데 최소영을 제외한 번역부 직원들의 반응이 예상을 살짝 벗어났다.

    “처음에는 그랬는데,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맞아요. 생각보다 업무효율도 높고, 일단 여가가 늘어나니까, 업무 집중 잘되는 것 같고.”

    “오 맞아. 일찍 퇴근하니까 하루가 엄청나게 긴 것 같지 않아?”

    다들 번역연구팀으로 통폐합되면서 찾아온 변화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권선호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의 꿈은 국내 최고의 번역사가 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회사는 여러분의 꿈을 이뤄줄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 꿈. 제가 이뤄드릴 수 있습니다.”

    꿈이라는 말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하지만, 확실히 박주혁이 번역부 통폐합 얘기를 꺼냈을 때와는 공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권선호는 미간을 살짝 좁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지 오래다.

    “약속드린 데로 여러분이 번역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눈치 빠른 직원들이 권선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구경숙도 권선호의 시선을 피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권선호는 믿고 있던 구경숙까지 고개를 돌려버리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권선호는 최소영과 구경숙의 쌍두마차를 구상하고 있었거늘.

    ‘이, 이럴 수가. 안돼!’

    권선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점점 깊게 팼다.

    “여러분이 꿈꾸는 번역회사. 제가 만들겠습니다. 함께 합시다. 파인랭스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경험하셨잖습니까? 국내 최고의 번역사들을 프리랜서 관리에 투입한다는 발상을 하는 박 사장과 함께하시면 여러분의 실력은 녹슬게 되는 것입니다.”

    번역사를 목표로 하는 사람에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언제까지 꿈을 좇으며 사는 어린아이일 수는 없다. 가만히 권선호의 말을 경청하던 직원들의 가슴을 박주혁의 말이 후벼팠다.

    - 밤낮 가리지 않고, 주말까지 반납하여 일하는 삶이 진정 원하던 것입니까?

    90년대 중반은 소득이 상승하면서 사람들은 사이에 서서히 여가가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고 있었다. 박주혁은 너무도 절묘한 타이밍에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결과적으로 권선호를 믿고 따르던 직원 중 상당수가 박주혁에게 마음을 줘버렸다.

    최소영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박수 치며, 권선호를 응원했다.

    “역시 저희 마음을 헤아리시는 건 부장님밖에 없으시군요!”

    최소영은 열변을 토하며, 구경숙을 힐끔 쳐다봤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최소영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말했다.

    “다들. 꿈을 포기할 거야? 파인랭스를 선택했던 이유가 뭐였어. 최고의 회사에서 번역사로 경력을 쌓는 것 아니었나?”

    최소영이 흥분하여 소리지자 몇몇 직원들의 동요하는 듯했지만, 대부분 직원의 마음은 이미···.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던 권선호는 미간을 와락 구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대로는···!’

    아침에 가벼웠던 마음은 번역부와 점심 식사 이후, 끝을 알 수 없는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권선호의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속은 썩어가고 있었다.

    ‘젠장. 이대로는 애써 확보한 고객들도 아무 소용없어.’

    멍한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는데 최소영이 다가와 권선호를 살짝 건드렸다. 권선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최소영과 함께 옥상으로 올라갔다.

    - 치익.

    “후우.”

    “부장님. 제가 먼저 사직서 제출하겠습니다.”

    “...”

    권선호는 말없이 최소영을 쳐다봤다.

    “배신자들. 제가 먼저 나가서 번역사 모집을 하고 있을게요. 이미 고객들도 확보해놓으셨잖아요. 일은 해야죠. 저희에게 시간이 촉박합니다.”

    “흠.”

    최소영의 말도 맞다. 권선호가 잠시 망설이는데, 최소영이 힘주어 말했다.

    “우선, 제가 나가서 기반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부장님은 최대한 오래 버티면서 회유해보세요.”

    “훗.”

    권선호는 최소영의 말에 피식 웃어버렸다. 자신의 꼴이 너무 한심했기 때문이다.

    “이럴 줄 몰랐다.”

    “저도요. 특히 구경숙이 이럴 줄은···!”

    “후우.”

    권선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최 과장이 먼저 나가서 준비하고, 곧 최지훈을 보낼게. 우리 한번 해보자고.”

    그래도 아직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권선호는 눈을 빛내며 이를 악물었다.

    #

    - 띠리리.

    박주혁은 울리는 전화를 잽싸게 받았다.

    “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아, 화물차인데요. 곧 도착합니다. 직원들 내려와서 이거 옮겨야 하는데요.”

    “화물차? 아. 외무부에서 오셨어요?”

    “아. 뭐 그랬던 것 같네요.”

    박주혁은 전화를 끊고 서둘러 사장실을 나왔다. 최소영이 급작스럽게 사직하고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사무실 분위기는 평소와 같았다. 박주혁은 안도하며 영업팀으로 향했다.

    “권 부장.”

    “예.”

    “OECD 문서가 도착했으니까 직원들 전부 내려와서 문서 옮겨야 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아침까진 밝았던 권선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운 것을 보고 박주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1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기다리니 1톤 트럭이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짐칸에 한가득 문서를 한가득 싣고서 말이다.

    “휘유.”

    소프트 카피 문서가 주를 이뤘던 시대를 거친 박주혁이 산처럼 쌓여있는 하드카피 문서를 보니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화물차 기사는 차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외쳤다.

    “파인랭스 직원입니까?”

    “예. 맞습니다.”

    기사는 박주혁에게 싸인하라며 서류하나를 내밀었다. 인수증과 보안각서였는데 하단부에 외무부 인장이 찍혀있었다. 박주혁은 망설임 없이 서명했고 곧 기사가 차에서 내려 짐칸을 풀어 박스를 하나씩 내렸다.

    “엄청 많네요.”

    “거 멍청히 보지 말고 좀 날라요. 이러다 종일 짐만 나릅니다?”

    “알겠습니다.”

    박주혁은 기사의 핀잔을 웃어넘기며 박스를 들었고 곧이어 영업팀 직원들이 우르르 내려왔다.

    “와우!”

    조관영이 쌓여가는 문서 박스를 보며 소리치며 활짝 웃었다. 한기훈도 짐짓 놀랐는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팔을 걷어붙이며 소리쳤다.

    “진우씨, 올라가서 수레 좀 가지고 와요.”

    “아! 알겠습니다.”

    김진우는 헐레벌떡 사무실로 올라갔고 조관영은 연신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이게 다 우리 매출 아닙니까? 이야 완전히 신나는구먼!”

    조관영의 말에 박주혁이 피식 웃었고, 한기훈은 투덜거렸다.

    “과장님. 말만 하지 마시고 짐을 옮기셔야죠? 히쭉거리지 마시고 어서 옮기세요. 쫌!”

    “어유. 하여간 저 잔소리.”

    한기훈의 다그침에 조관영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박스 3개씩 들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옮겼다. 다들 밝은 얼굴로 상자를 나를 때 권선호와 최지훈의 표정은 굳었다.

    첫 번째 물량을 사무실로 들고 옮기자, 직원들이 모두 깜짝 놀라 박주혁을 쳐다봤다.

    “사장님. 혹시 그게?”

    “OECD 문서가 도착했습니다. 자, 우선 회의실로 옮깁시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물량을 받아본 경험이 없었기에 다들 입을 딱 벌릴 때, 박영희가 번역연구팀에게 말했다.

    “우리도 도와야겠는데?”

    전 직원이 달라붙어 문서를 옮기자, 순식간에 회의실이 문서로 가득하였다. 직원들은 회의실을 가득 채운 문서 박스를 쳐다보며 눈을 끔벅였다. 구경숙이 그 광경을 쳐다보며 넋을 잃고 말했다.

    “진짜 어마하네요.”

    다들 마찬가지 심정일 터.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문서 분류 및 분할을 시작해야죠. 지금부터 번역연구팀이 할 일이 많습니다. 프리랜서에게 보안각서 서명 및 문서 받아 가라고 연락하십시오. 박 팀장님, 서두릅시다. 문서가 회의실에 남아 있을수록 일을 안 하는 겁니다. 모두 움직이세요!”

    박주혁이 박수와 함께 소리쳤고, 그제야 직원들이 시선을 돌려 재빨리 자리로 돌아가 바삐 키보드를 치고 전화를 돌렸다.

    ‘자, 이제 프리랜서 체제가 얼추 자리를 잡았으니 제대로 굴러가는지 보자.’

    박주혁은 다시 회의실 한가득한 문서를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생전에는 수주하지 못했던 OECD 프로젝트가 파인랭스 회의실 한가운데 떡하니 쌓여있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가슴이 웅장해지는구나.’

    반면, 권선호는 최지훈을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최 대리.”

    “예. 부장님.”

    “이번에 최 과장 나간 거 알고 있지.”

    최지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권선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창업한 회사로 먼저 간 거야.”

    “그럴 거로 생각했습니다.”

    “최 대리도 다음 주에 합류하도록 해.”

    “...”

    권선호의 말에 최지훈은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그의 반응에 권선호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최 대리?”

    잠시 뜸을 들이던 최지훈이 뭔가를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부장님. OECD 프로젝트는 마감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그게 도리인 것 같습니다.”

    권선호는 믿었던 최지훈이 이렇게 나오자,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표정으로 최지훈을 똑바로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 나와 함께 할 거야 말 거야?”

    “전, 부장님과 함께해야죠. 하지만, OECD는 제가 마감 짓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최지훈이 책임감 있는 친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권선호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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