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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24화 (24/136)
  • 024화 연쇄 사직의 불씨.

    이연호와 기철우가 젊은 시절 날밤을 새우며 고생했던 TDX 개발, 그리고 그 개발의 윤할유 역할을 했던 링크 번역원.

    탐색전 같았던 자리는 어느새 옛 추억을 소환하여 물고 뜯고 씹고 맛보는 자리가 되었다. 이연호는 상기된 얼굴로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때. 박찬희씨가 구원자처럼 등장했지.”

    기철우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연호의 말에 동의하며 입을 열었다.

    “맞아. 박찬희씨가 번역본을 한아름 들고 전화국에 들어왔을 때 모두 환호했었지.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

    이연호와 기철우의 말을 듣고 있던 유명한이 살짝 언성을 높였다.

    “그럼! 망하지 않게 일감 좀 주지 그랬냐?”

    “그러고 싶었는데···. 그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맞아. 우린 발에 치이는 밑바닥 엔지니어였다고.”

    옛 추억이 떠오르는지 이연호와 기철우가 막걸리를 비우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원희가 박주혁을 쳐다보며 속삭였다.

    “박 사장. 이번에도 잘 풀리겠는데?”

    “감사합니다.”

    박주혁의 말에 이원희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어깨를 으쓱였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네.”

    “지금 이자리가 지사장님 덕분 아닙니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원희는 박주혁의 배려 깊은 말에 살짝 고마웠는지 활짝 웃었다. 한참 동안 TDX 개발 얘기에 열을 올리던 이연호가 갑자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며 이원희에게 말했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제가 좀 경솔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도와드리고 싶은 것은 진심이니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원희가 손사래 치며 답했다.

    “아까 무슨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고개를 숙이시나? 후배님이 도와준다는데 난 기쁠 뿐이네.”

    “감사합니다.”

    발톱을 드러냈던 이연호가 정중히 사죄하자, 이원희는 표정을 풀었다. 이연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박주혁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박 사장. 박찬희 사장의 아들인지 정말 몰랐네. 그 당시 박찬희 사장 없었으면 우리 엔지니어들 정말 바짝 말라 죽었을 거야.”

    “저도 아버지의 활약상을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주혁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이연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파인랭스 내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겠어.”

    “감사한 일이군요.”

    맞은편에 있던 기철우도 안경을 치켜올리며 박주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결국, IT는 아버지가 손수 일궈내셨던 거였어. 그럼 더욱더 어떤 업체도 넘기지 않겠다.’

    #

    스터디 그룹 모집 공지가 나간 지 일주일이 지나 첫 모임을 했다.

    박주혁이 말한 황금돼지가 탐나는 것이었을까?

    생각보다 많은 직원이 스터디 그룹에 관심을 표명하고 회의실에 모였다. 박영희는 꽉 찬 회의실을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

    “자, 여기 모이신 분들이 모두 황금돼지를 목표로 하시죠?”

    박영희의 첫마디에 회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물론, 영어 점수를 올리는 것도 좋겠지만, 역시 열매를 탐내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다.

    “이제 스터디를 이끌 리더를 정해야 하는데, 추천하실 분 있나요?”

    박영희의 질문에 사람들이 손을 들었는데 갑자기 굵직한 목소리로 누군가 소리쳤다.

    “저는 구 과장님이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영희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조관영의 부리부리한 눈과 마주치고는 피식 웃었다.

    “좋은 의견이시네요. 구경숙 과장이 토익 만점이었죠?”

    “오오.”

    직원들이 환호성을 지르자, 구경숙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구경숙이 토익 만점자라는 소리에 직원들이 들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럼. 구경숙 과장이 스터디 리더를 하는 것으로 결정하겠습니다.”

    박영희가 먼저 손뼉을 쳤고, 그렇게 구경숙이 스터디 그룹을 이끄는 리더가 되었다. 구경숙이 수줍게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고, 조관영이 히쭉 웃으며 크게 소리쳤다.

    “잘 부탁합니다!”

    조관영의 우렁찬 소리에 구경숙이 어깨를 움츠리자, 조관영 옆에 있던 한기훈이 조관영을 핀잔했다.

    “아 쫌! 과장님. 분위기 파악을 하세요. 구 과장님이 부끄러워하시잖아요.”

    “넌 임마.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 잔소리야.”

    “과장님 혼자 보내기가 영 불안해서 말이죠.”

    “웃기시네! 너 인마···! 읍!”

    조관영이 뭐라 말하려 하는데 한기훈이 조관영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 쫌!”

    조관영과 한기훈이 투덕거리는 소리에 회의실은 다시 한번 웃음바다가 되었고 한기훈은 머쓱하게 웃으며 한 여직원을 그윽하게 바라봤다. 조관영은 아직 자신의 입을 덮고 있는 한기훈의 손을 치우며, 한기훈에게 속삭였다.

    “바라만본다고 아냐?”

    “아. 이자리에서 이건 아니죠. 제가 알아서 할테니까. 제발 내버려 두세요!”

    조관영은 한기훈이 버럭하는 모습이 귀여운지 비실비실 웃었고 그사이 구경숙이 소감을 말했다.

    “모두 황금돼지를 바라시겠지만, 그건 제겁니다.”

    뭔가 재치 있는 말을 하고 싶었던 구경숙의 농담이었지만, 토익 만점자의 카리스마가 느껴져 아무도 반응하지 못하고 얼이 빠져 그녀를 쳐다봤다. 싸한 반응에 구경숙이 화들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어, 노, 농담이에요! 농담이라고요.”

    구경숙이 당황하는 모습에 직원들이 그제야 박장대소했다. 그렇게 파인랭스의 스터디 그룹은 첫 시작을 알렸고, 통폐합으로 어수선하던 분위기도 아물어 가는 듯했다.

    한편, 최소영은 늦은 시간까지 자리에 앉아 번역하고 있었다. 벌써 끝낼 수 있는 분량이었지만, 프리랜서 관리를 하느라 늦어졌다. 번역이 아닌 다른 일로 퇴근 시간이 늦어진 것에 가뜩이나 짜증이 나는데 회의실에서 웃음꽃이 만발하자 최소영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시 퇴근 웃기시네. 결국 이렇게 일이 많아졌잖아. 다들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원.”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

    다들 여유롭게 회의실에서 웃고 떠드는데 홀로 번역하는 상황 말이다.

    최소영은 자신만 야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투덜거리고 있었다. 프리랜서를 활용하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결국 그 번역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최소영 본인이었다.

    박영희는 그런 최소영을 말리지 않았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도태되고 결국 나가떨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회이며 회사의 조직이다.

    “아, 권 부장은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어휴 진짜!”

    최소영은 키보드를 거칠게 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권선호는 퇴근 후 한 호프집에서 ANT의 박재용 부장을 만나고 있었다.

    “권 부장. 요즘 일은 어때?”

    “번역회사가 하는일이 똑같죠.”

    “그런가?”

    권선호는 상대의 빈 잔에 맥주를 조심스럽게 따르며 말했다.

    “부장님은 요즘 많이 바쁘신 것 같네요. 연락도 잘 안 받으시고.”

    “이동통신사업 때문에 워낙 바빠야지. 오늘도 겨우 시간 낸거라고.”

    권선호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권선호를 힐끔 노려봤다.

    “바쁘신 건 알죠.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재용은 뜸들이는 것을 싫어하는 타입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권선호를 바라봤다.

    “ANT의 번역을 저희가 독점할 수 있도록 다리 좀 놔주세요.”

    “허허. 권 부장. 내가 구매부가 아닌데 그런 게 가능할 것 같아?”

    “에이 한국통신에서 ANT로 이직한 기술 마스터 박재용 부장님의 입김이면 가능한 것 아닙니까?”

    권선호가 박재용을 한껏 치켜세우자, 박재용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너털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아무리 나라도 ANT는 한국 기업문화가 아니라 힘들어. 그리고 구매부에서는 이미 파인랭스와 거래할 의향이 있는 것 같던데. 대체 왜 그렇게 몸달아 하는 거야?”

    “아···.”

    권선호가 머뭇거리자 박재용이 들이키던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빛냈다.

    “권 부장. 자네 설마?”

    권선호는 박재용이 눈치챈 것 같자, 서둘러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도와주십시오.”

    “으음.”

    박재용은 낮게 신음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한참 동안 말없이 맥주를 들이켜던 박재용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내 이직을 도와줬으니 나도 도와줘야겠지. 하지만 말했다시피 내가 구매부가 아니라 장담할 수는 없어. 자칫 잘못하면 사내 컴플라이언스에 어긋나 나도 이거라고.”

    박재용이 손날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권선호가 잽싸게 대답했다.

    “그만큼 보답해드리겠습니다.”

    “짤리면 그만이지 뭘 어떻게 보답하겠다는 건가?”

    “수주 금액의 5%를 백도어로 드리겠습니다.”

    박재용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맥주잔을 들이켰다. 어느새 3,000CC 맥주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

    한국관에서 이연호와 기철우를 만난 후로 파인랭스에 한가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밀려드는 IT 번역에 번역연구팀이 자연스럽게 프리랜서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정보통신부에서 의뢰하는 번역은 대외적인 상징일 뿐 실제로 물량 IT 중계기 제조업체로부터 당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효과는 좋았다.

    샘플 번역을 의뢰해보겠다던 업체들이 정보통신부가 파인랭스를 사용한다는 입소문이 나자 업체등록부터 하겠다며 연락을 해오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래도 정통부에 인허가를 받아야 하는 업체들이었기에 정통부가 사용하는 번역회사를 신뢰할 수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이연호 서기관님께 밥을 사야겠네.”

    박주혁은 심영찬이 개발한 시스템을 열어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직 베타 테스트 기간이었지만, 박주혁은 직원들에게 반드시 시스템에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라며 강요하고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그래도 매출 정보는 시스템에 등록되기 시작했다.

    “프리랜서 쪽은 아직 에러가 많군.”

    박주혁은 시스템을 이것저것 클릭해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아, 박 사장. 이연호 서기관입니다.”

    “아! 서기관님. 안녕하십니까?”

    “내가 오늘 중요한 정보를 박 사장에게 선물하려고 전화했지요.”

    드디어, 이동통신사업이 추진되며 사업자 선정 관련 공고가 나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박주혁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엄청나게 놀라는 척했다.

    “이제 곧 해외 업체들이 번역하려고 난리 날 것입니다. 이미 파인랭스로 번역을 의뢰하고 있을 것 같은데 맞죠?”

    “예. 서기관님 정말 감사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이연호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잘해보세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니까.”

    확실히 이연호 덕분에 IT 업체들이 연이어 파인랭스와 거래를 트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ANT와 알파텔에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흠···.”

    박주혁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최소영 과장이 굳은 표정으로 들어와 사직서를 내밀었다. 박주혁은 가만히 사직서를 훑어보고 최소영을 올려봤다.

    “최 과장.”

    박주혁이 뭐라 말하려 하자, 최소영이 먼저 말을 잘라버렸다.

    “사장님. 더 좋은 조건으로 절 스카우트하려는 제의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 그래요?”

    박주혁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습니다. 최소영 과장.”

    박주혁이 손을 내밀려 했지만, 최소영은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도망치듯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머쓱해진 박주혁이 머리를 한번 쓸고는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흠. 권선호···. 드디어 움직인 건가? 하필이면···.’

    최소영을 시작으로 연쇄적으로 직원들이 사직서를 들고올 것이다. 예정된 수순이라고눈 하지만, 하필이면 IT 업체들이 파인랭스와 거래를 트려는 시점이라니. 박주혁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연이어 들어올 직원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최소영 이후에 사장실로 들어오는 이는 없었다. 박주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 이게 아닐 텐데?”

    사무실 분위기를 살피려 사장실 문을 열고 나가자, 최소영을 배웅하는 직원들이 아쉽다는 듯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쇄 사직의 불씨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달라졌구나. 권선호, 최소영 하나로 감당할 수 있겠어?’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출입구 쪽에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는 권선호를 노려봤다.

    ‘ANT와 알파텔도 시간문제겠군.'

    박주혁은 환하게 웃으며 사장실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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