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23화 (23/136)
  • 023화 15년 전 링크 번역원.

    퇴근을 2시간 앞둔 오후.

    박주혁은 조광연을 조용히 사장실로 불렀다.

    “조 과장. 오늘 약속 있나요?”

    “예? 아니요. 딱히 없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아. 오늘 약속이 있는데···. 정보통신부와 전자통신연구소에서 나온다고 해서 말이죠.”

    “정통부와 전자통신연구소요?”

    박주혁의 말에 조광연이 눈을 크게 떴다.

    조광연이 IT 쪽을 전담하고 있긴 했지만, 정부 쪽 인사들과는 연줄이 없었다. 차라리 권선호가 이런 방면에는 경험이 많을 터.

    “사장님. 저보다는 권 부장님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조광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야망이 큰 사람이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하지만 조광연은 야망보다는 조직을 먼저 생각하는 부류였다. 그런 조광연이 마음에 들었는지 박주혁은 살포시 웃었다.

    ‘권 부장을 의심하고 있지만, 정부 쪽은 권 부장이 더 적임자란 말이군요. 너무 욕심이 없으시군요.’

    “물론 권 부장이 정부 프로젝트들을 담당하고 있지만, IT 관련해서는 조 과장이 잘 알지 않나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함께 갑시다.”

    박주혁이 힘주어 말하자, 조광연은 눈을 몇 번 끔벅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로부터 한 시간 뒤, 박주혁과 조광연은 광화문에 있는 한국관이라는 식당에 도착했다. 고급 식당답게 주차요원이 발렛 주차까지 해줬다. 태연한 박주혁과 달리 조광연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벌렸다.

    “와.”

    전통 기와집 디자인의 건물에 은은한 조명으로 포인트를 줘서 마치 금빛 기와집 같은 느낌이었다. 조광연은 이런 곳에 난생처음 와봤는지 끊임없이 감탄사를 외쳤다. 박주혁은 그런 조광연을 보며 피식 웃더니 카운터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되어 계십니까?”

    “예. 유명한 국장으로 되어 있을 겁니다.”

    “잠시만요.”

    한복을 차려입은 아리따운 아가씨가 예약 명부를 훑어보더니 따뜻한 미소와 함께 길을 안내했다.

    “와. 완전미인···.”

    단아한 직원의 모습에 반했는지 조광연이 연신 감탄사를 뱉었다. 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박주혁이 피식 웃더니 조금 단호하게 말했다.

    “조 과장. 이제 그 입 좀···.”

    “예? 아! 죄송합니다.”

    조광연은 박주혁의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입을 꽉 다물고 박주혁 뒤에 그림자처럼 붙었다. 앞서 길을 안내하던 아가씨가 한 방 앞에 멈춰 서더니 나긋나긋 말했다.

    “손님. 여깁니다.”

    깍듯하게 허리를 숙인 아가씨가 매화라는 목패가 걸려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 드르륵.

    유명한 국장이 신문을 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돋보기안경을 코에 걸며 고개를 들었다.

    “오. 박 사장!”

    “국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이쪽은 파인랭스 IT 담당 조 과장이라고 합니다.”

    “아, 조 과장님 반갑습니다. 외무부 국제협력기구 유명한 국장입니다.”

    유명한 국장은 인자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고 긴장한 조광연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유명한의 손을 양손으로 덥석 잡았다. 그리고 조광연은 고함치듯 소리쳤다.

    “조, 조광연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갑자기 크게 소리치는 조광연에 놀란 유명한이 조광연을 손가락질하며 껄껄 웃었다.

    “허허. 이 친구 이거 물건이구먼?”

    박주혁은 머쓱하게 웃으며 유명한에게 사과했다.

    “고위 관직자와 미팅은 처음이라 긴장했나 봅니다.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박주혁이 고개를 숙이자 조광연이 화들짝 놀라 재차 고개를 숙이며 크게 외쳤다.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조광연의 반응에 유명한이 껄껄 웃었다.

    “시원시원한 친구군. 앉지요. 박 사장도 앉아요.”

    “예.”

    조광연이 알아서 출입구와 가장 가까운 쪽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 영업맨으로서 센스가 몸에 밴 것 같았다. 박주혁은 알아서 움직이는 조광연이 흡족한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에 앉은 유명한과 얘기를 주고받았다. 주로 입찰 비하인드 스토리였는데, 조광연은 처음 듣는 얘기라 눈을 빛내며 경청했다.

    “담당자가 박 사장의 발표가 아주 인상 깊었다더군.”

    “그렇습니까? 그저 사실에 진심을 담아 얘기한 것뿐입니다.”

    “입찰비리 속에 정공법이라. 하하하.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유명한이 껄껄 웃을 때, 문 앞에 인기척을 느낀 조광연이 살짝 눈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드르륵.

    문이 열리자, 이원희 지사장이 서글서글한 미소와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선배님.”

    유명한이 먼저 이원희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며 반가워했고, 뒤이어 박주혁이 꾸벅 인사했다.

    “오. 박 사장. 오랜만이야.”

    “안녕하십니까? 지사장님.”

    “거참, 아직 아니래도?”

    지사장이라는 말이 낯간지러운지 이원희가 머쓱하게 웃었다. 잠시 잡담을 나누고 있으니 정통부와 전자통신연구소 소장이 방으로 안내됐다.

    - 드르륵.

    문이 열리자마자, 유명한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어서 오시게.”

    “아이고! 저명하시고 유명하신 국장님 아니십니까?”

    유명한 국장과 동기라는 정보통신부의 이연호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장난을 걸었다. 그 뒤에 전자통신연구소 소장도 웃으며 유명한과 악수를 했다. 유명한은 먼저 이원희를 대학 선배님이라며 소개한 후 박주혁을 소개했다.

    “여기, 이 친구가 내가 말한 파인랭스의 박 사장이야.”

    “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박 사장님. 젊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피부가 정말 탱탱하시군요. 하하하.”

    이연호 서기관은 유머러스한 사람이었지만, 눈빛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실없는 농담에 미소 짓고 있던 박주혁이 이연호의 눈빛을 느끼고 긴장했다. 경험상 이런 부류의 사람은 상대하기 무척 까다로웠다. 보통 유머러스함 뒤에 날카로운 송곳을 숨기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쉽지 않겠어.’

    이연호 서기관은 현업에서 닳고 닳은 베테랑의 느낌이었다면, 전자통신연구소 기철우 소장은 지식인으로서 교양이 있었다. 젊은 교수님이랄까?

    “안녕하십니까? 박 사장님. 기철우라고 합니다.”

    박주혁은 인사를 마치고 조광연을 소개했는데, 그는 처음과 달리 차분하게 명함을 건네며 응대하고 있었다. 심장은 벌렁거리고 있었겠지만, 유명한 국장과 마주하면서 느낀 점이 있었으리라.

    통성명이 끝난 후 곧 음식이 들어왔다.

    10첩 반상으로도 으리으리하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한국관에서는 기본 15첩 이상은 됐다. 각종 나물류와 홍어 무침, 갈비찜 등이 고급스러운 토기에 올려져 세팅됐다. 반찬 하나하나의 색감이 좋아 눈이 즐거웠고 향기도 좋아 코까지 호강하는 럭셔리한 한식이었다.

    이원희가 거하게 얻어먹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약속 장소를 잡은 유명한도 같은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식사에 앞서 유명한이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박주혁에게 말했다.

    “자, 박 사장. 받으시죠.”

    “제가 따르겠습니다.”

    “먼저 받으세요.”

    유명한은 박주혁의 잔에 막걸리를 채우고 주전자를 통으로 넘겨줬다. 박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유명한, 이원희 그리고 이연호 순으로 술을 따랐다. 박주혁의 예의 바른 행동에 이연호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말했다.

    “아니. 박 사장님. 정말 24살 맞습니까?”

    “예?”

    “요새는 주도도 가르치는 학원이 있나 보네. 솔직히, 박 사장. 학원 다녔죠? 전혀 요즘 사람 같지 않네요. 하하하.”

    박주혁의 행동이 마음에 든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식사가 마무리됐지만, 막걸릿잔은 계속 돌았다. 시시콜콜한 학창 시절 얘기와 자신들의 치적 얘기가 지나간 후, 이연호가 이원희를 쳐다보며 말했다.

    “선배님. 봄바디오는 대체 언제 지사를 낸다고 합니까? 이러다 망부석 되시겠어요.”

    “아니. 후배님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지?”

    “에이. 철도 신호 쪽 장비로 인허가 신청도 하시고선 무슨···.”

    이연호 역시 그는 유머러스함 뒤에 송곳니를 숨기고 있었다. 이원희가 살짝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자 이연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 누구야 우원식이던가 그 친구가 얘기하더군요.”

    “뭐? 우 대리가?”

    “예. 한국에 지사 설립좀 하게 인허가 빨리 내달라고 통사정하던데요?”

    “이런. 쓸데없는 짓을···.”

    이원희는 목이 탔는지 막걸리를 벌컥 마셨고, 이연호는 연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이렇게 선배님을 알게 되었으니 인허가 빨리 내라고 채찍질 좀 해야겠습니다. 그래야 선배님이 지사장 되시죠. 하하하.”

    자신이 힘 좀 쓰겠다는 얘기였지만, 이원희는 불쾌했는지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리고 이연호는 박주혁에게 시선을 옮기며 힘주어 말했다.

    “우리 쪽에 번역도 있는 것 같던데 어떻게 제가 힘 좀 써볼까요?”

    ‘이런, 개새끼.’

    이원희는 선배니까 힘을 써보겠지만, 너는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였다. 이연호의 생각을 읽은 박주혁이 살짝 웃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흰 실력으로 승부하겠습니다.”

    예상외의 반응이었는지 이연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자식 봐라?’

    이원희와 박주혁의 반응을 살피던 유명한이 이연호를 노려보며 막걸릿잔을 들었다.

    “이연호! 뭐 하는 거야? 아직도 그 성격 못 버렸어? 기분 좋은 자리에서···. 자, 잔 드세요! 선배님. 박 사장도.”

    유명한이 제때 이연호를 찍어누르지 않았으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이원희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잔을 들었지만, 박주혁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때 묵묵히 상황만 지켜보던 기철우가 막걸리를 비우고 박주혁에게 물었다.

    “박 사장님. IT 쪽 일을 많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 부분은 조 과장이 잘 알고 있죠. 조 과장?”

    “예!”

    조광연이 힘차게 답하며, 기철우에게 파인랭스의 IT 경험에 대해 줄줄 읊었다.

    “파인랭스는 IT 전문 번역회사로 TDX 개발 때부터 번역에 참여하여···.”

    TDX라는 소리에 기철우와 이연호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서로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TDX?”

    한국을 세계 10대 전자교환기 개발국으로 만든 TDX. 그 단어 하나로 모든 설명은 끝났다.

    한국의 TDX 개발 참여했었던 이연호와 기철우였다. TDX 개발 당시 해외 논문과 타 회사의 전자교환기 매뉴얼을 파인랭스가 번역했을 리 만무했다.

    이연호와 기철우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조광연의 말을 끊었다.

    “잠깐만요. 조 과장님.”

    이연호가 미간을 좁히며 조심스럽게 조광연에게 물었다.

    “파인랭스. 예전 사명이 혹시···?”

    조광연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링크 번역원입니다.”

    조광연의 말에 이연호와 기철우가 눈을 부릅뜨며 놀라워했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박주혁은 당황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야?’

    파인랭스의 전신인 링크 번역원은 3인 체제의 소규모 번역회사였다. 박주혁의 아버지, 그러니까 故 박찬희 사장은 링크 번역원의 직원 3인 중 1인으로 번역을 담당했었다. TDX 번역 이후 자금흐름이 좋지 않던 링크 번역원을 인수하여 파인랭스로 키워 낸 것이 박찬희였다.

    무려 15년 전에 사용했던 링크 번역원이란 이름을 이연호와 기철우가 알고 있다니.

    ‘어떻게?’

    박주혁의 머릿속에 의문을 품은 채 이연호와 기철우의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