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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22화 (22/136)
  • 022화 사직 사유.

    “좋은 아침입니다!”

    박주혁은 활기찬 목소리로 사무실 문을 열었다. 먼저 와있던 조광연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고, 권선호가 피곤한 얼굴로 탕비실에서 커피를 가지고 나오며 박주혁과 마주쳤다.

    “오셨습니까?”

    “아, 권 부장. 좋은 아침이군요.”

    “예.”

    ‘음? 어제 일찍 들어가지 않았나?’

    피곤함이 잔뜩 묻어 있는 권선호의 표정에 박주혁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지만, 이내 탕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장실로 들어온 박주혁은 커피 한 모금을 하고, 신문을 펼치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황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아, 박팀장. 어제 얘기했던 스터디 그룹 말입니다.”

    “예. 사장님.”

    “박 팀장이 직접 전사 메일을 쓰면 어떨까요?”

    “제가요?”

    박영희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박주혁의 배려였다. 이런 복지 정책을 사장이 아닌 팀장이 제안했고 그것을 사장이 받아들였다면 팀장의 권위가 서는 일이다. 아직 앙금이 남아있는 번역연구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는 박영희에게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었다.

    “네. 박 팀장이 제안했다는 식으로 공지하시고 스터디 그룹의 장을 맡으세요.”

    “하지만···.”

    “그렇게 하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갸웃거리던 박영희는, 이내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작게 탄성을 내뱉고는 사장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편, 박주혁은 전화를 끊고 다시 신문을 뒤적거렸다.

    '뭐, 박 팀장이라면 대충 눈치챘겠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글자들을 휙휙 넘기다가, 책상 구석에 놓여있는 외무부 공문이 눈에 띄었다.

    “시기를 놓칠 뻔했군.”

    박주혁은 수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지사장님. 안녕하십니까? 박주혁입니다.”

    “오! 박 사장. 오랜만이야. 낙찰 소식 들었지?”

    “예. 어제 도착했더라고요. 덕분에 수주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흠. 그랬구만···. 축하하네.”

    이원희는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끝을 살짝 흐렸다. 찰나였지만, 이원희가 무엇인가를 언짢아하는 것 같았다. 이럴 때는 직접 만나서 풀어야 한다.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재빨리 이원희에게 말했다.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 언제 시간이 있으십니까?”

    “어. 나야 프리하지. 그런데 유명한 국장이 시간이 되는지 모르겠네?”

    “제가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박 사장. 이번엔 거하게 얻어먹을 겁니다?”

    “하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대화에서는 껄끄러운 감정이 느껴지지 않은 것을 보니, 박주혁에 대해 언짢음은 아닌 것 같았지만, 뭔가 찜찜했다.

    ‘흠. 뭐가 있긴 한데···.’

    박주혁은 의문을 뒤로 한 채, 유명한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사장님. 공문 받으셨습니까?”

    “예. 덕분에 수주하게 되었습니다.”

    “거,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그저 기회만 줬을 뿐. 모든 것은 박 사장이 해낸 것이라니까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름 아니고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 언제 시간 괜찮으신지요?”

    “아···. 어디 보자.”

    유명한 국장이 수첩을 넘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 이거 내 스케쥴에 맞춰야 하는 게 미안하긴 한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바쁘신 분에 맞추는 게 당연한 거죠.”

    “어디 나만 바쁜가? 경제를 이끌어가는 사람이라면 다 바쁜 거지. 오늘 저녁은···. 정통부 동기와 약속이 있고···. 내일, 점심 어때요?”

    박주혁은 정통부라는 단어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정보통신부.

    94년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정보통신산업의 진흥을 위해 개편된 정부 조직이었다. 정보통신산업의 전반적인 것을 수립 및 조정하고 통신사업자의 허가, 육성 및 공정경쟁과 관련된 정책을 수립하는 곳이었다. 즉, 박주혁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인맥이라는 뜻이다.

    “내일 점심도 괜찮지만, 오늘 동기분과 만나신다고요?”

    “음? 그렇지 대학 동기죠.”

    “그렇다면 이원희 지사장님께는 후배 아닙니까?”

    “과가 다르긴 하지만, 후배는 후배지···. 가만. 박 사장, 설마?”

    “안 되겠습니까?”

    박주혁이 무엇을 노리는지 눈치챈 유명한이 허허거리며 웃었다.

    “불편해할 수도 있는데. 내 한번 물어보리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박주혁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정통부라···.’

    #

    권선호는 옥상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그의 다크써클이 진했다. 다시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이는데 조광연이 올라와 권선호 옆에 섰다. 권선호는 조광연을 힐끔 쳐다보고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후우”

    권선호가 허공에 연기를 내뱉을 때 조광연도 담배를 하나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아 주머니를 더듬거리자 권선호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 치익!

    권선호가 라이터에 불을 붙여 내밀자, 조광연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권선호의 라이터로 상체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부장님. 고맙습니다.”

    “그래.”

    무뚝뚝한 권선호의 대답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애꿎은 담배 연기가 허공을 수놓았다. 어색함을 참기 힘들었는지 조광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스터디 그룹을 만든다더라고요.”

    “스터디 그룹?”

    권선호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되물었고 조광연은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 뭐냐. 박 사장이 언어점수 받아오면 황금도 주고 어쩌고···.”

    권선호는 조광연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담배를 다시 입에 가져갔다.

    “같이 언어 공부할 수 있도록 이것저것 지원한다더라고요.”

    “그래? 직원들이 좋아하겠네.”

    “전 싫습니다.”

    조광연이 정색하자 권선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틀어 그를 쳐다봤다.

    “왜?”

    “전 영어가 싫거든요.”

    “풉.”

    조광연의 한마디에 권선호가 웃음이 터질뻔했다.

    “조 과장. 자네 번역회사 사람이야. 영어가 싫다니.”

    조광연도 스스로 말에 어폐가 있다고 느꼈는지 껄껄 웃더니 담배를 입에 가져갔다.

    “그나저나, 부장님 표정이 말이 아닙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흠. 그냥 집안일.”

    “왜요? 또 아들이 아파요?”

    조광연의 물음에 권선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피웠다. 권선호의 아들이 아프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조광연이었기에 더는 캐묻지 않았다. 아들이 경기를 일으켜 숨을 못 쉰다거나 심장이 멈추는 일이 종종 있다고 들어서 알고 있었다. 권선호가 간혹 이렇게 초췌한 몰골로 출근하는 날이면 응급실에서 밤새 아들을 간호하다가 오는 것이다.

    “고생하십니다.”

    “...”

    권선호는 말없이 담배를 다시 입에 가져갔다. 둘의 침묵은 권선호가 담배를 다 피우고 몸을 돌릴 때까지 이어졌다. 권선호는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리다 말고 우뚝 멈춰서 조광연을 불렀다.

    “조 과장.”

    권선호의 부름에 조광연이 눈을 살짝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예?”

    권선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IT 중계기 제조업체들이 우리와 거래한다고 했지?”

    “예. 이동통신사업에 사활을 걸고 있더라고요.”

    “음. 그중에 특히 공격적인 곳이 어딘가?”

    “흠···. 제가 보기엔 너텔과 에릭숀이 혈안이 되어 있긴 하던데···.”

    “그래···? 그렇군.”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권선호는 몸을 돌려 한쪽 입꼬리를 샐쭉 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 과장. 아직 시장 보는 눈은 없군.’

    조광연은 뒤돌아가는 권선호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담배 연기를 다시 내뿜었다.

    #

    박주혁은 사장실에서 파인랭스 시스템을 띄워놓고 이것저것 훑어봤다.

    “음. 극성정보통신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할 테고, 95년도에 새로 추가되지 않은 업체는···. ANT와 알파텔.”

    미국 최대 통신사업자인 ANT와 프랑스 기업인 알파텔.

    1980년대 한국이 TDX(전자교환기)를 개발한다는 소리에 콧방귀를 뀌었던 업체들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엔지니어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TDX 개발에 성공했고 세계에서 10번째로 전자교환기를 개발한 나라가 되었다.

    TDX 개발 초기 ANT는 한국은 절대 전자교환기를 개발할 수 없다며 교환기 제조업체와 담합하여 가격을 2배나 올렸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부를 우롱했다.

    “아니, 교환기 공급가가 왜 갑자기 2배가 된 것입니까?”

    “한국정부가 TDX 개발을 포기한다면 현재 대비 1.5배의 가격으로 계약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진 굴욕에도 정부는 끈덕지게 밀어붙였고 TDX 개발이 성공하는 순간, ANT는 가격을 기존의 절반으로 내려버리는 강수를 둔다.

    안정성과 가격을 앞세워 TDX를 사장시킨다는 계략이었지만, 정부는 통신업체들이 TDX를 필수로 구매하도록 법까지 개정하며 TDX를 시장에 안착시켰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정보통신에서 기술 독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ANT나 요키아, 에릭숀과 같은 괴물 기업들에 끌려다녀야만 했을 것이다.

    “ANT와 알파텔이 TDX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나왔었는데. 흠, 권선호가 확실히 보는 눈은 있단 말이지.”

    회사를 반 토막 낸 권선호지만, 번역업계를 바라보는 그의 사업적 시야가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PCS 사업에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펼칠 ANT와 알파텔을 공략한 것만 봐도 그렇다. 물론, 다른 업체들의 물량도 많았지만, 이제 막 창업한 회사가 모든 IT 업체를 끌고 갈 수는 없을 터. 박주혁이 권선호의 입장이었어도 ANT와 알파텔을 택했을 테지.

    박주혁이 미간을 좁힌 채 턱을 쓰다듬는 사이, 전화벨이 울렸다.

    “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아! 박 사장. 유명한 국장입니다. 동기 녀석한테 얘기했는데···.”

    유명한이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니 뜻대로 되지 않을 모양이다.

    “예. 불편하시다면 어쩔 수 없죠.”

    “아니 그게 아니라. 단둘이 만나는지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네?”

    “아, 그렇습니까? 괜찮습니다. 나라를 위해 애쓰시는 분들께 식사 한 번 대접 못 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전자통신연구소의 소장이라는데. 박 사장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유명한이 미안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지만, 박주혁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유명한과 통화를 끝낸 박주혁은 재빨리 이원희에게 전화를 넣었다.

    “지사장님···.”

    이원희도 인맥을 넓힐 수 있다면 좋은 거라며 흔쾌히 참석하겠다고 답했다.

    “이렇게 연결되는 거였다면···. 권선호가 욕심낼 수 있었겠어.”

    봄바디오 이원희와 연결된 순간 외무부와 정통부 그리고 전자통신연구소까지 넓어지고 있었다. 박주혁에게 있어서 분명 이원희는 기연이었다. 그리고 전생에서는 권선호의 기연이었겠지.

    약속이 확정된 후 박주혁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파인랭스 영어 스터디 그룹을 모집합니다.]

    박영희가 보낸 스터디 그룹 모집 메일이었다. 순간 직원들과 함께 공부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박주혁이 가입하는 순간 스터디는 일의 연장선이 돼버릴 것이다. 박주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네. 파인랭스 조광연 과장입니다.”

    “아, 조 과장. 그 방금 스터디 그룹 메일 받아봤나요?”

    “예? 아. 예에.”

    “가입해야죠.”

    “아, 사장님 저한테 대체 왜 그러세요?”

    “구 과장도 스터디 그룹에 관심 있어 하던데?”

    “예? 구 과장···. 아 진짜. 사장님!”

    이상하게 조광연을 놀리면 유쾌했다. 한기훈 대리가 조광연을 가끔 골리는 것이 이해됐다. 박주혁은 미소와 함께 전화를 끊으며 중얼거렸다.

    “사람 좋은 조광연이 왜 먼저 그만뒀을까?”

    문뜩 조광연의 퇴사 이유가 궁금해진 박주혁이었다.

    “시스템 온. 검색, 조광연 사직서.”

    - 검색 완료되었습니다.

    박주혁은 조광연의 사직서를 스크롤하여 사직 이유를 살펴봤다.

    [사직 이유: 권선호.]

    “어? 이게 뭐야. 허허. 조 과장답네.”

    박주혁이 회사를 내팽개치고 있을 때, 조광연은 권선호의 비위 사실을 어떻게든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주혁은 항상 자리에 없었고, 경영지원팀은 이미 권선호의 편이었다. 조광연이 박영희를 미리 알았더라면 달랐겠지만···.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같이 갑시다. 조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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