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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21화 (21/136)
  • 021화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 취이익!

    두툼한 삼겹살이 불판에 올라가며 비명을 질렀다. 박주혁은 고기 집게와 가위를 들고 눈빛을 매섭게 빛내자, 심영찬이 황급히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며 박주혁의 손에 들린 집게와 가위를 빼앗으려 했다.

    “사장님. 제가 구울게요.”

    “아니. 오늘은 제가 굽겠습니다.”

    박주혁이 정색하며 말하자, 심영찬이 어색한 자세로 굳어 눈을 끔벅였다. 박주혁은 심영찬의 당황하는 눈을 보며 말했다.

    “고생한 직원을 위해 이 정도는 해야죠.”

    “하, 하지만···.”

    “생각보다 잘 굽습니다. 그렇게 멍청히 서 있지 말고 잔이나 채워봐요.”

    “아! 예.”

    심영찬이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며 박주혁과 박영희가 웃었다.

    - 똘똘.

    “건배!”

    박주혁은 고기를 뒤집으며 심영찬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영찬씨, 개발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사장님 생각을 구현한 것뿐입니다.”

    “그게 어디 쉽나요? 제가 생각이 너무 복잡해서 말이죠.”

    박주혁의 말에 심영찬이 피식 웃었다. 박영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 비워진 소주잔에 잔을 채우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안 힘드세요?”

    “?”

    박주혁은 박영희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옆으로 갸웃했다.

    “어린 나이에 조직을 이끈다는 게···. 물론, 잘하고 계시지만, 혹시 너무 힘드시면 저희에게 기대도 됩니다.”

    박주혁은 박영희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살짝 뜨며 되물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더 기대라면···. 혹시 회사를 넘기란 소린가요?”

    말끝에 박주혁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고 심영찬이 거기에 호응해 박영희를 핀잔했다.

    “와. 박 팀장님. 너무하시네!”

    그러자 박영희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심영찬의 귓불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심 선수가 끼어들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나?”

    “아악! 아파요. 아프다고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는데 조광연의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계셨군요!”

    박주혁이 고개를 돌려 조광연을 쳐다보는 순간 얼굴이 살짝 굳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활짝 웃었다. 박주혁의 시선은 조광연의 옆에 있는 구경숙에게 옮겨갔다.

    “구 과장도 함께 있었어요?”

    “아, 퇴근하는데 근처에 있길래 함께 왔습니다.”

    “잘하셨네요. 어서 앉아요. 오늘 삼겹살은 회사가 쏩니다.”

    박주혁의 말에 조광연이 과장된 몸짓으로 좋아했다. 하지만, 구경숙은 박주혁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자리했다.

    - 치이익!

    사람이 추가되며 돼지 한 마리를 더 잡아야 했다. 처음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조광연과 구경숙이 합석하면서 다소 식었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다행히 어색하진 않았다. 박주혁은 술잔을 기울이며 조광연과 구경숙에게서 묘한 기류가 느껴져 흘깃 바라봤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박주혁이 조광연에게 술을 따르며 은근슬쩍 물었다.

    “그런데 두 분 무슨 관계입니까?”

    “예?”

    조광연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러자, 박영희와 심영찬도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가자미눈을 뜨고 조광연을 쳐다봤다.

    “아니, 다들 왜 그러세요? 저희 아무 관계 아닙니다! 구 과장님. 뭐하세요? 빨리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조광연이 손사래 쳤지만, 옆에 있던 구경숙은 고개를 숙인 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더 수상함을 느낀 박주혁이 물었다.

    “구 과장, 반응이 더 수상한데?”

    그제야 고개를 든 구경숙이 얼굴이 빨개지며 말했다.

    “저희 아무 관계 아닙니다. 퇴근하다 우연히 마주친 것뿐이에요.”

    얼굴이 붉어진 구경숙을 보며 심영찬이 수상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평소 소심하던 구경숙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조 과장님은 제 타입이 아닙니다.”

    구경숙이 정색하자, 왁자지껄 웃던 사람들이 구경숙을 빤히 쳐다봤다. 박주혁은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재빨리 잔을 들며 외쳤다.

    “자자. 실없는 농담 그만하고 잔 들어요!”

    “건배!”

    술잔이 몇 차례 오가고 나자, 계속 야근했던 심영찬이 몸을 가누질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박영희가 박주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장님. 심 선수. 이대로는 안될 것 같은데요?”

    “티, 팀장님. 저한테 왜 그러세요? 사장님. 저 괜차스니다!”

    혀까지 꼬부라지는 것이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2주간 밤을 새우다시피 했으니 몸이 견디질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박주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영찬씨. 보내고 올 테니 더 먹고 있어요.”

    “아니, 사장님 제가 하겠습니다. 앉아 계세요.”

    조광연이 황급히 일어나 심영찬을 부축했지만, 다리가 풀린 심영찬을 지탱하기 버거워했다. 박주혁이 반대쪽에서 심영찬을 붙잡자 균형이 겨우 유지되었다.

    “같이 갑시다.”

    “아니. 뭔 술을 이렇게 마셨데요?”

    조광연이 민망하다는 듯 심영찬을 나무랐지만, 박주혁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남자들이 자리를 비우고 나자, 박영희와 구경숙만 자리를 남아 술잔을 기울였다. 아직도 서먹한 두 사람이었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

    박주혁과 조광연은 심영찬을 택시에 태웠다. 박주혁은 앞 좌석의 창문으로 기사에게 택시비를 쥐여주며 말했다.

    “기사님. 이 친구 잘 좀 데려다주십시오.”

    보통 술이 떡이 된 손님을 택시 기사들은 기피한다. 하지만, 택시비가 두둑하다면···. 기사는 손에 집힌 지폐 두께가 제법 된다는 것을 눈치채고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제가 책임지고 안전 귀가시키겠습니다.”

    그때 쓰러져있던 심영찬이 빽 소리쳤다.

    “아직입니다. 저 괜찮습니다. 사장님!”

    “내일 출근 안 해도 되니까 푹 쉬어.”

    “에예?”

    심영찬이 눈을 번쩍 뜨며 놀랐지만, 택시는 악셀을 밟으며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박주혁이 막 발걸음을 돌릴 때, 조광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사장님. 이런 말씀 조심스럽습니다만···.”

    “음? 뭔데요. 말씀해 보세요.”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권선호의 행동이 미심쩍다는 말로 시작한 조광연은 박주혁의 표정을 살피며 쭈뼛거렸다. 회사를 위한 충정 어린 말이었지만, 혹여나 상사를 험담하는 속물로 비칠까 걱정됐다. 하지만, 박주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광연의 말에 경청하고 있었다.

    “최근에 최 대리가 퇴근 전 무엇인가를 인쇄합니다. 그러면 권 부장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인쇄물을 챙겨 퇴근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박주혁은 담담하게 웃을 뿐이었다.

    “제가 어떻게 발견했냐면···.”

    심각한 얼굴로 이어지는 조광연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회식 장소 앞까지 도착했다.

    “조 과장. 그 얘기는 우선 속에 묻어두세요.”

    “예. 알겠습니다.”

    박주혁은 조광연에게 당부한 후, 밝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박영희와 구경숙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박주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박영희에게 물었다.

    “박 팀장, 무슨 일 있어요?”

    “예? 아, 아닙니다.”

    박영희가 눈을 크게 뜨는 모습이 낯설었다. 무슨 얘기 중이었길래 이렇게 당황하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기분 좋은 대화는 아닌 것은 분명했다. 구경숙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분위기가 묘한데···?’

    구경숙은 권선호가 회사를 차려 나갈 때 가장 먼저 쫓아갔던 인물 중 하나였다. 번역 능력이 특출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애초부터 권선호 라인으로 평가했던 인물이었는데···. 박주혁이 권선호의 카드들을 뺏으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일이 재미있어지는군.’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구경숙에게 물었다.

    “구 과장. 이번에 언어 시험 점수에 따라 황금돼지 선물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 아. 동기부여도 되고 좋을 것 같습니다.”

    박주혁의 급작스러운 질문에 구경숙이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박주혁의 제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막힘없이 답했다.

    “자신감 있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황금돼지는 이미 떼놓은 당상인가요?”

    “예? 그럴 리가요. 당장 옆에 박 팀장님도 계시는걸요.”

    구경숙의 말에 박영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지금 저 놀리는 거죠?”

    “예? 그럴 리가요. 박 팀장님의 평소 감수 실력에 제가 얼마나 감탄하는데요. 제가 오역한 것도 귀신같이 찾아서 고치시잖아요.”

    “읽고 쓰는 것과 듣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입니다. 흠흠.”

    박영희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헛기침을 했지만, 영어 좀 한다는 사람은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듣기 영역이 꽝이라는 말이었다.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박영희의 말에 동의해줬다.

    “그럼요. 다르죠. 듣고 말하는 것은 다른 레벨입니다.”

    “그쵸! 사장님도 뭘 아시는군요.”

    박영희가 얼굴을 펴고 반기자, 조광연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너무들 하시네요. 전 영어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다고요.”

    조광연의 말에 모두 풉하고 웃어버렸다. 박주혁은 여세를 몰아 직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참에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보면 어떻습니까? 명색이 번역회사에 다니는데 언어점수는 하나 있어야죠.”

    박주혁의 말에 구경숙이 반색하며 손뼉을 쳤다.

    “어머, 좋은 생각이세요.”

    “그렇죠? 그렇다면 스터디 그룹을 회사에서 지원하겠습니다.”

    박영희와 구경숙이 반색하며 좋아할 때 조광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사장님. 전 영어 알레르기가 있다니까요!”

    “조 과장은 필수로 가입하세요.”

    “아, 아니. 사장니임!”

    박주혁이 정색하며 말하자 조광연이 몸을 배배 꼬았다. 그 모습에 박영희와 구경숙이 박장대소했다. 어둡던 구경숙과 박영희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진 것을 확인한 박주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선, 구경숙부터 내 사람으로 만드는 거다.’

    박주혁이 분위기를 좋게 끌고 가고 있었는데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구경숙이 갑자기 고개를 떨구더니 박주혁에게 사과를 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했습니다.”

    뜬금없는 사과에 박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숙을 쳐다봤다.

    “갑자기 무슨 소리입니까?”

    박주혁이 되물었지만, 구경숙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부답이었다. 박주혁은 단둘이 얘기하고 있던 박영희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박 팀장?”

    박영희는 맏언니처럼 구경숙의 등을 쓸어 위로하며 박주혁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나중에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얘기를 꺼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조광연도 영업맨답게 분위기를 눈치채고 가만히 박주혁의 잔에 술을 채웠다.

    “사장님. 한잔하세요.”

    “음. 그래요.”

    좋았던 분위기가, 구경숙의 사과로 인해 차갑게 식었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었다. 전생에는 몰랐던 구경숙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니 말이다. 박주혁은 소주를 입안에 털며 고개 숙이고 있는 구경숙과 그녀를 위로하는 박영희를 지긋이 쳐다봤다.

    ‘그래.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내가 너무 옹색했던 것 같군.’

    권선호와 그 패거리들에게 알게 모르게 적의를 가졌던 박주혁이었지만, 구경숙을 계기로 생각을 살짝 고쳐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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