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20화 (20/136)

020화 삼겹살에 소주 어때?

번역부와 감수팀을 통합해 번역연구팀으로 재편성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불협화음은 있었지만, 번역연구팀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박영희의 역할이 컸다. 그녀는 급격한 변화를 주기보다는 프리랜서 테스트와 확보에 초점을 맞췄고 번역업무를 계속 진행하도록 했다. 급격한 업무의 변화보다는 서서히 변화되는 것을 택한 것이다. 그에 따라 기존 번역부 직원들의 불만도 잦아들었다.

일시적인 현상이겠지만···.

‘역시. 잘 선택했어.’

박주혁은 박영희의 보고를 들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려있던 공문 하나를 박영희에게 쓱 내밀었다. 박영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공문을 읽어내려가더니 곧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사장님! 저희가 진짜 낙찰받았군요!”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경제 분야 프리랜서도 확보해야 할 겁니다.”

“프리랜서 분류는 이미 진행하고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박주혁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박 팀장. 제가 항상 품질을 강조하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혹시 뭔지 아십니까?”

“음.”

박영희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고민하더니 답했다.

“고객과 약속한 납기 아닐까요?”

“납기도 물론 중요한 것 중 하나이긴 합니다만, 이것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박주혁이 말을 끊고 박영희를 똑바로 바라봤고,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박주혁의 눈을 마주했다.

“바로 보안입니다.”

“보안이요?”

박영희가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하다는 듯 박주혁을 바라봤다.

90년대 기업들은 아직 문서 보안이라는 개념이 약했다. 이직율이 낮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아직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활용해 소프트카피 문서를 양산할 시기는 아니었기에 더 그러했다.

지금도 의뢰 들어오는 문서의 대부분은 파일철이 되어 있거나 제본 형태인 하드카피 문서들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번역부의 업무 중 많은 일을 차지했던 것이 타이핑이기도 했다. 하드카피를 소프트카피로 납품해달라는 조건이 붙기 때문이다. 너무 긴박할 경우 타이핑 단기 아르바이트도 고용할 정도였으니, 90년대 번역은 정말 하드코어 했다.

민간기업도 이럴진대 정부 부처의 문서는 안 봐도 CCTV였다. OECD 문서도 아마 트럭으로 파인랭스로 배달이 올 것이다. 그러면 번역연구팀에서 분류작업을 통해 문서를 복사해 배부해야 한다. 소프트카피로 전부 교체되려면 앞으로도 5년 이상은 기다려야 하고 그쯤이 되면 문서 보안에 대한 인식이 강해진다. 아무래도 하드카피보다 유출될 루트가 많기 때문이다. 최지훈이 왜 고객 리스트를 무리해서라도 인쇄하려고 했겠는가?

“그렇습니다. 앞으로 고객이 의뢰하는 문서들에 대한 보안을 철저히 지켜야 할 겁니다. 지금 낙찰받은 OECD 문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공적인 문서가 외부로 유출된다면 어떻겠습니까?”

박주혁의 말에 박영희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갔다.

“그, 그렇다면 프리랜서를 활용하지 못할 텐데요.”

걱정스러운 눈빛의 박영희를 보며 박주혁은 너그러운 눈빛으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니죠. 그러니까 프리랜서들에게 보안각서 또는 보안 계약을 체결해야 합니다.”

“아!”

박주혁의 의도를 알아챈 박영희가 눈을 빛내며 메모했다. 이런 성실한 태도가 박영희가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일 것이다. 박주혁은 메모하고 있는 박영희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초안은 제가 작성해 볼 테니 박 팀장이 수정 후 최종안을 만들어 보도록 합시다.”

“아, 예! 알겠습니다.”

박주혁은 박영희와 미팅을 끝내고 컴퓨터 앞에 앉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시스템 온. 검색, NDA.”

- 검색 중입니다···.

- 검색 완료

- 총 23,687건이 검색되었습니다.

NDA(Non-Disclosure Agreement).

기업 간 또는 기밀 사항을 접하는 사람들과 맺는 기밀 유지 협약으로 혹시 모를 정보 유출에 대한 제약 사항과 책임을 명시한 계약의 하나이다.

박주혁은 수없이 나열된 NDA 중 가장 최근에 체결될 NDA를 클릭했다.

[(주) 파인랭스는 한국콜라에서 의뢰한 번역작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 한국콜라(이하 “갑”이라 칭함)가 (주) 파인랭스(이하 “을”이라 칭함)에게 제공하는 제반 정보의 비밀을 유지할 것을 약속하며,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눈앞에 있는 글자들을 읊으며 타이핑하던 박주혁이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중얼거렸다.

“맞아. 한국콜라와도 거래를 했었지. 계속 유지했다면 좋았을 텐데···.”

전 세계 메가 히트 브랜드 콜라의 번역을 파인랭스가 수주하여 번역을 진행했지만, 파인랭스가 망하며 그 연을 이어가지 못했었다. 박주혁은 아쉬움을 달래며 박영희에게 보낼 보안 계약서를 작성 후 인쇄했다.

- 철터덕. 즈즈즉.

박주혁은 인쇄된 프리랜서 NDA를 들고 박영희에게 다가갔다.

“자, 박 팀장. 한 번 작성해봤는데 읽어보고 팀원들과 논의해서 수정 후 다시 한번 보여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완성되면 심형직 번역사에게도 서명을 받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박주혁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한 장을 더 내밀었다.

“이건?”

“근로 계약서를 작성했지만, 직원들과 별도로 NDA가 체결되지 않은 것 같아 함께 작성해봤습니다. 함께 검토해보세요.”

“아아! 알겠습니다.”

박영희는 눈을 빛내며 박주혁이 건넨 문서를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약의 완벽함에 놀랄 때쯤 예상하지 못한 문구에 눈을 크게 떴다.

“SNS? 너튜브? 이건 뭐지?”

박영희가 다시 한번 훑어보는 구문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을’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비밀정보를 공개 또는 누출할 수 없다. SNS(Social Network Service) 및 너튜브와 같은 사적인 공간과 영상매체 또한 이에 포함된다.]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그대로 베낀 박주혁의 작은 실수였다.

#

- 띠리리.

박주혁은 반가운 마음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예. 어머니.”

“주혁아! 지금 강남에 나와 있는데, 좋은 사무실이 하나 있다.”

“그래요?”

박주혁은 사무실 매매에 관심이 있을 뿐, 임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어머니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기는 싫어 밝게 대답했다. 최효정 여사는 박주혁의 밝은 목소리에 다시금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채광도 좋고, 월 임대료도 최대한 맞춰준다고 하더라.”

“그렇군요. 역이랑도 가깝나요?”

“관심 있으면 주말에 같이 가볼까?”

“아니요. 후보들을 만들어 놓고 나중에 한꺼번에 보죠?”

“아, 그래. 알았다. 몇 개 더 보고 추려놔야겠구나.”

“네. 무리하지 마시고요. 천천히. 쉬엄쉬엄 아시죠?”

최효정에게 작은 일거리라도 줄 핑계였는데 너무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어 살짝 걱정이었다. 물론, 퇴근 후 최효정의 표정을 보면 어느 때 보다 밝고 또 건강해 보였지만 말이다. 최효정 여사를 떠올리며 잠시 미소 짓고 있는데 사장실 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네. 들어오세요.”

심영찬이 핼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며 들어왔다.

“사장님···.”

핼쑥한 모습답게 목소리도 기어들어 가는 심영찬을 보고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버럭 화를 냈다.

“영찬씨. 몰골이 그게 뭐야?”

“아?”

심영찬은 박주혁의 핀잔에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펴보더니 머쓱했던지 머리를 긁적였다.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사람이 먼저지 일이 먼저가 아닙니다.”

“네, 알겠습니다.”

심영찬은 배시시 웃으며 박주혁에게 다가와 말했다.

“사장님. 드디어 파인랭스 시스템의 초기 버전을 웹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심영찬의 몰골에 속이 상했지만, 시스템의 초기 버전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에 박주혁은 반색하며 되물었다.

“어! 벌써?”

“예. 며칠 내에 보실 수 있다고 말씀드렸죠? 저, 약속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건 내가 잘 알고 있고. URL이 뭐죠?”

심영찬의 깨알 PR을 박주혁은 당연하다는 듯 넘겨버렸다. 심영찬은 허탈한 듯 미소 짓더니 품에서 URL이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박주혁은 서둘러 컴퓨터에 몸을 바짝 붙여 URL 주소를 입력했다. 심영찬도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라 그런지 양손을 비벼가며 긴장감을 풀기 위해 애썼다.

- 타다닥 탁!

URL를 입력한 박주혁이 시원하게 엔터를 쳤고 곧 파인랭스 시스템의 초기 버전이 블록이 쌓이듯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

박주혁의 감탄사와 함께 심영찬의 얼굴이 붉어지며 생기가 돌았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했을 시간이었지만, 사장실의 불은 꺼질 생각이 없었고 박주혁은 심영찬과 모니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열변을 토했다.

“뼈대는 좋아. 여기에 좀 더 살을 붙여서···.”

심영찬은 박주혁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메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그럼, 여기는 견적 관리에서 이렇게 연결되겠군요. 바로 인쇄할 수 있도록 기능도 추가해야겠습니다.”

“그렇지!”

둘은 찰떡 호흡을 자랑하며 파인랭스 시스템의 발전 방향을 논했다. 밤을 새울 기세였던 그들을 막은 사람은 퇴근하려던 박영희였다.

- 똑똑.

“네. 들어오세요.”

박주혁이 반사적으로 노크에 응답했고, 박영희가 들어와 투덜거렸다.

“저, 이제 퇴근합니다. 그런데 저 선수 집에 좀 보내시라니까 붙잡고 계세요?”

박영희의 날카로운 말에 박주혁이 멋쩍게 웃으며 시계를 올려봤다. 시곗바늘이 어느덧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러게요.”

무덤덤한 그들의 대답에 박영희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박주혁은 심영찬과 박영희를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시간도 늦었는데 삼겹살에 소주 어때요?”

박영희가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박주혁을 핀잔했다.

“아니. 매일 같이 야근한 선수에게 소주라뇨. 저 선수는 빼고 저랑 하시죠.”

박영희가 웃으며 말했고, 심영찬이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아니. 팀장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고생은 제가 했는데 삼겹살과 소주는 팀장님이 드시겠다는 겁니까?”

서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말속에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박주혁은 미소 짓고 짐을 챙기며 말했다.

“5분 뒤 출발합니다.”

“예!”

박주혁은 외투를 입으며 최효정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일하다 보니 좀 늦었습니다. 일찍 전화했어야 했는데.”

“아니다. 일하다 보면 그럴 수 있지. 저녁은 먹고 하는 게냐?”

“이제 직원들과 먹으려고요.”

“그래.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최효정과 전화 통화를 마친 박주혁이 사장실을 나서자, 박영희와 심영찬이 기다렸다는 듯 박주혁의 뒤를 따랐다. 박주혁이 사무실 출구 쪽으로 향하는데 다 퇴근한 줄 알았던 사무실에 조광연이 남아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작성하고 있었다.

“어? 조 과장. 아직 퇴근 안 했어요?”

“아. 사장님. 외근 보고서 작성하느라요.”

“급한 것 아니면 내일 하지 그래요?”

“내일 작성하면 현장감을 살릴 수 없습니다.”

조관영의 대답에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 썼으면, 한잔하러 갑시다.”

“예? 아 네! 어디로 가시는지 알려주시면 완성하고 합류하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회식 자리가 만들어졌다.

#

권선호는 굳은 표정으로 퇴근길에 오르며 자신의 서류 가방을 꽉 쥐었다. 마치 보물단지를 들고 있는 듯 말이다. 무사히 집에 도착한 권선호는 서류 가방을 서재에 조심히 내려두고 이송이를 불렀다.

“여보. 나 왔어. 내가 아침에 얘기한 거 끝냈어?”

이송이는 밥을 차리다 말고,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답했다.

“예. 말한 대로 사업자등록증을 만들긴 했는데. 이래도 되는 걸까요?”

이송이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사업자등록증을 꺼내 권선호에게 내밀었다. 그는 말없이 사업자등록증을 훑어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법인명: 베스트 번역, 대표자: 이송이.]

아직 사업지가 집 주소이고 대표가 와이프 명의로 되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우선 이렇게 첫 출발을 했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말이다.

“여보. 수고했어.”

“나야 뭐 세무서 왔다 갔다 한 것 밖에 있나요? 어서, 씻고 오세요. 식사하게.”

“그래.”

권선호는 씻고 나와 오랜만에 거실에서 놀고 있는 쌍둥이들을 품에 안았다.

“아빠! 저리가!”

“왜? 싫은데? 요 녀석이!”

“아하하!”

최근 들어 권선호가 저렇게 밝은 표정으로 아이들과 놀아준 적이 없었다. 이송이는 권선호와 아이들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자, 밥 먹자! 여보. 식사하세요.”

이송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빠의 등에 올라탔던 쌍둥이들이 쪼로로 식탁으로 내달렸다.

“밥!”

“바바밥!”

권선호는 그런 아이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원, 녀석들. 밥이 그렇게 좋아?”

“응. 엄마가 해준 게 쬐고야!”

“아빠도 빠리와!”

말은 어눌해도 아빠를 챙기는 쌍둥이들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뜨거웠다. 권선호는 웃으며 식탁에 앉아 기분 좋게 밥숟가락을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송이도 함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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