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8화 (18/136)
  • 018화 쿠데타는 아직이야.

    조직 개편이라는 화두를 던진 박주혁은 온종일 번역부 직원들에게 시달렸다.

    직원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줄지어 면담 요청을 해왔다. 직원들에게는 중대한 사안인 만큼 박주혁은 면담을 거부할 수 없었고 하나하나 받아주다 보니 어느덧 시곗바늘이 7시를 가리켰다. 마지막 면담자가 사장실을 나가고 박주혁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휴.”

    몸은 힘들었지만, 직원들의 생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있었고 얼추 그림은 그려졌다. 물론, 내일 오전 회의 후에나 그들의 진심을 알 수 있겠지만, 지금 까지는 그래도 긍정적인 비율이 높은 것 같았다. 박주혁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퇴근을 서둘렀다.

    사무실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번역부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고 있다가 박주혁이 사장실을 나오자 흠칫 놀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의 심정이 이해되기에 박주혁은 애써 모른척했다. 자신의 뒷담화가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에 씁쓸했지만, 이 또한 겪어야 하는 과정 중 하나다. 박주혁은 사무실을 빠져나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좀 걸을까?’

    심란하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걷는 것이 도움이 된다.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음과 생각이 정리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박주혁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로 신촌을 배회했다. 직원들에게 그런 압박을 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신촌에는 박주혁 또래의 인파가 넘쳐났다. 특히나 이대상권과 근접한 곳에는 흔히 패션 피플이라 불리는 여성들이 배꼽티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장년층들과는 세대차이라는 벽이 만들어져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참을 배회하다 박주혁은 벽돌처럼 생긴 휴대폰들과 명함 케이스 같은 삐삐들이 잔뜩 진열된 가게 앞에 멈춰 섰다. 얼마 전 매뉴얼을 업데이트 번역했던 모터놀라의 마이크론택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박주혁의 시선은 마이크론택에 머물러 있었는데, 점원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서 오십시오! 요즘 잘나가는 삐삐는 이겁니다.”

    휴대폰은 워낙 고가였고 아직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점원은 삐삐를 꺼내 선보이며 베시시 웃었다. 누가 보더라도 박주혁은 신입사원 같은 외모와 나이였으니 가게 점원의 선택은 적절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아니요. 휴대폰 좀 볼 수 있을까요?”

    “휴대폰이요? 그럼요! 보실 수 있죠. 안으로 들어오세요.”

    점원이 갑자기 깎듯 하게 허리를 숙이며 자리를 안내했다. 나름 VIP를 위한 자리인지 의자에 푹신한 방석도 놓여있었다.

    “요즘 휴대폰 가격이 좀 내려갔습니다. 시의적절하게 구매하시는 겁니다.”

    점원은 벽돌 같은 휴대폰 모델들을 보여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호객행위를 했다.

    ‘시의적절하긴 곧 PCS가 깔릴 텐데···.’

    박주혁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점원이 펼치는 휴대폰 중 마이크론택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스타트택이 출시 전이라 크기가 다소 컸지만, 그나마 가장 휴대용으로 적합했다. 숫자 버튼이 있는 무전기라고 하면 딱 맞았다.

    “보시는 안목이 뛰어나시군요. 모터놀라의 마이크론택이라는 제품입니다. 모터놀라 아시죠? 미군에서···.”

    점원이 전직 판매왕 타이틀이라도 거머쥐었었는지 온 힘을 다해 모터놀라의 역사에 대해 읊어댔고 마이크론택의 장점에 관해 설명했다.

    결론만 놓고 보면 제일 비싸고 좋은 제품이란 소리였다.

    박주혁은 점원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안타깝지만, 번역도 하고 직접 내용 검토도 했었다. 마이크론택이 휴대용 전화기 그 이상, 이하도 아니란 것을 박주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박주혁은 점원을 심드렁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두 개 주십시오.”

    “두, 두 개요? 이걸···. 두 개요?”

    점원이 눈을 크게 뜨며 박주혁을 빤히 쳐다봤다. 100만 원이 넘는 핸드폰을 2대나 사겠다는 젊은 손님에 점원은 상당히 놀란 것 같았다. 하긴, 가입비와 등록비까지 하면 대당 200만 원을 호가하니 놀랄만도 하다.

    박주혁은 점원의 표정에 개의치 않고 담담히 말했다.

    “예. 카드 결제되죠?”

    “아아. 되죠. 됩니다!”

    #

    박주혁은 뿌듯한 표정으로 커다란 쇼핑 봉투를 들고 귀가했다.

    최효정은 커다란 쇼핑 봉투와 박주혁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뭘 사 왔니?”

    “어머니, 쇼파에 앉아 보세요.”

    박주혁이 다짜고짜 최효정을 거실에 있는 쇼파에 앉히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이 사고 칠 때마다 보이던 눈웃음이 박주혁의 얼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뭔데 그래?”

    “자, 이건 어머니 것.”

    박주혁이 봉투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내 최효정의 무릎에 올렸다. 최효정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박주혁을 쳐다봤다.

    “이, 이게 뭐니?”

    “휴대폰이라는 겁니다.”

    “휴대폰?”

    티비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던 휴대폰이 신기하긴 했지만, 최효정은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고 물렸다.

    “이런 비싼걸···. 환불하거라.”

    어떤 말을 해도 최효정이 받아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박주혁은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이번에 모터놀라 휴대폰 번역을 했는데 고객이 써보라며 시제품을 줬어요.”

    박주혁의 말에 그제야 최효정의 눈빛이 조금 풀렸다.

    “그래?”

    아직 의심하는 것 같았지만, 한고비는 넘겼다.

    박주혁은 기본적인 사용법을 설명하고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최효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 띠리리.

    “어머! 선도 없는데 진짜 전화가 오네?”

    “좋죠? 다음에 더 좋은 것 나오면 바꿔 드릴 테니까 쓰세요. 1번 꾸욱 누르면 저한테 전화가 걸리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시고요.”

    “그러마. 어머. 참 튼튼해 보이네.”

    모터놀라의 마이크론택, 스타트택의 구버전으로 당시만 해도 최소형 휴대폰이었다. 미군 군납 업체답게 상당히 견고한 것이 특징이었다.

    최효정은 휴대폰을 옆에 끼고 다니며 무척 기뻐했다. 친구들에게 전화해 깨알 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보니 뿌듯하기까지 했다.

    ‘진작에 사다 드릴걸.’

    최효정이 기뻐하는 모습에 오늘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았다. 와이프가 왜 그렇게 쇼핑에 열을 올렸었는지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참을 휴대폰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던 최효정은 식탁에 앞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박주혁을 보고 화들짝 놀라 헐레벌떡 주방으로 뛰어왔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배고프지? 어서 밥 먹자.”

    “배 안 고파요.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 가져올걸. 그랬네.”

    “내가 뭘 좋아해. 그냥, 신기해서 그래. 신기해서.”

    최효정은 민망한지 얼굴을 붉히시며,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다.

    저녁 밥숟가락을 뜨며 박주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머니. 사무실을 옮겨야 할 것 같은데요.”

    “사무실을? 무슨 문제라도 있니?”

    “그건 아닌데. 월세도 너무 높고 비좁아서요.”

    최효정은 눈을 끔벅이며 박주혁을 바라봤다.

    “그래서 시간 있으시면 바람도 쐬실 겸 사무실 좀 알아봐 주시겠어요?”

    “시간은 된다만···. 어디로 옮기려고?”

    “구로공단 쪽에 새로 짓는 건물이 있다더라고요.”

    “뭐?”

    구로공단이라는 얘기에 최효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미래에는 G밸리 또는 구로디지털단지가 불리지만, 90년 후반까지만 해도 구로공단이라는 이름이었다. 80년대까지는 봉제업이 지역의 일자리를 책임졌었다. 하지만, 산업구조가 변화하며 구로공단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2000년도에 정부가 IT 첨단 산업 단지로 육성하기 전까지는 거의 버려진 곳이나 진배없었다. 그런데 박주혁이 사무실을 그런 낙후된 곳으로 옮기겠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주혁아, 구로공단은 파인랭스와 같은 지식 사업이 갈만한 곳이 아니야. 거긴 공장들이 있는 곳이라고.”

    “알고 있죠. 하지만 우리 주 거래처인 극성정보통신도 가리봉에 있어요. 예전과 달리 첨단 업체들로 하나둘 채워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구로공단이라니. 차라리 강남 쪽으로 알아보는 게 어떻겠니?”

    강남에서 임대로 사무실을 빌릴 수는 있겠지만, 임대로는 부동산 수익은 기대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낙후된 상태의 구로공단이라면 사무실을 구매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박주혁은 OECD와 IT 중계기 업체들의 물량을 수주 후 현금을 확보해 대지를 사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을 때 들어가야 투자수익이 극대화되는 법이다. 그리고 박주혁은 구로공단과 가리봉이 G밸리에 편입되며 첨단산업단지가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회사를 가리봉과 구로공단 쪽으로 옮겨 부동산 투자 수익도 노릴 복안이었던 것이다.

    “어머니 이번에 옮길 때는 임대가 아니라. 사무실을 매매할 생각입니다.”

    “?”

    이해할 수 없다는 최효정의 표정에 박주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지금 회사의 자금 흐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OECD와 IT 업체들이 모두 파인랭스와 거래하게 될 거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최효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은행 이자도 높고···. 우선은 강남도 알아보고, 네 말대로 구로공단 쪽도 한번 둘러보마.”

    “예. 천천히 알아보셔도 됩니다.”

    “나도 부동산은 잘 모르니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고.”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바람도 쐬실 겸 친구분들과 점심도 드시고 좀 돌아다니시라고요.”

    박주혁은 말하면서 미리 챙겨 둔 법인카드를 최효정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니?”

    “법인카드에요. 엄연히 회사 일을 하시는 건데. 사비 쓰시면 되겠어요? 이걸로 친구분들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부동산도 둘러보시고 그러세요.”

    최효정은 내심 싫지 않았는지 카드를 받아 가만히 쳐다봤다. 박주혁의 부인은 돌고래 소리를 냈었는데 최효정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아껴 쓰마.”

    “가끔 사고 싶은 것 있으시면 사셔도 돼요.”

    최효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빙그레 웃었다.

    #

    권선호는 번역부 직원들과 술집에 모여 향후 대책에 대해 논의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최소영과 구경숙 팀장이 조직 개편에 대해 볼멘소리를 했다.

    “아니. 말이 되냐고요. 우리가 번역하러 왔지. 프리랜서 뒷바라지하러 온 게 아닌데. 그리고 그들이 우리보다 번역 잘한다는 보장이 어딨어.”

    최소영의 말에 구경숙도 목소리를 높였다.

    “맞아. 맞아. 프리랜서가 전부 심형직 번역사 같겠어?”

    대부분의 번역부 직원들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부장님. 사장님이 대체 무슨 생각이실까요? 정말 우리가 정시에 퇴근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시는 걸까요?”

    술에 취한 한 번역부 직원이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권선호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물었다. 권선호도 박주혁의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없어 고심하고 있었기에 딱히 해 줄 말은 없었다.

    ‘사람을 더 뽑아야 하는 상황인데. 구조조정을 염두에 뒀을 리도 없고···.’

    “내일 사장님과 다시 한번 얘기해 봐야지.”

    “역시 부장님밖에 믿을 사람이 없네요. 박주혁 낙하산 사장 주제에 너무 한 거 아니야? 쳇!”

    직원의 볼멘소리에 권선호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사라졌다.

    그때 옆에 있던 최소영이 권선호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권 부장님. 다시 생각해봐도 이상하지 않아요? 프리랜서가 번역한 것을 우리보고 검토하고 피드백을 하라는 건데. 그럼 우린 번역사도 아니고 대체 뭐에요? 이런 식이면 일 못 하지. 전부 그만둘 수도 있다고요.”

    “음.”

    번역부의 분위기가 좋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면 쿠데타 직전의 분위기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직은 아니야.'

    자리에 앉아있는 직원들을 훑어보며, 권선호는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 봅시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번역부 직원들의 눈빛이 권선호에게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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