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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17화 (17/136)
  • 017화 누구나 정시 퇴근을 꿈 꾼다.

    권선호의 버프를 받은 최지훈이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박주혁에게 질문했다.

    “사장님. 아직 발표전인 OECD 프로젝트의 낙찰 여부를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최지훈의 날카로운 질문에 권선호가 의기양양하여 팔짱을 끼며 박주혁을 노려봤다.

    '박주혁의 정보원 파악이 급선무다.'

    재빨리 평정심을 찾은 최지훈을 보고 박주혁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누군가의 조력이 있는 것이 역력해 보였지만, 박주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낙찰 여부가 의심된다면 며칠 뒤 확인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낙찰이 확정된 후에 조직을 개편하면 늦습니다.”

    박주혁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자 권선호가 미간을 좁혔고 최지훈은 재빨리 받아쳤다.

    “낙찰받았다면 축하할 일이긴 하지만, 그 사실 하나로 조직 개편을 강행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더구나 OECD 프로젝트는 단발성입니다. 어쩌다 한 번 터지는 비정규적인 일이란 소리죠. 그런 일로 회사의 핵심 부서인 번역부를 재편한다면 파인랭스의 경쟁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최지훈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박주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최 대리가 많은 생각을 하고 있군요. 파인랭스를 사랑하는 마음이 여기까지 느껴져 제가 다 흐뭇합니다.”

    마음에 없는 소리를 자연스럽게 흘리며 박주혁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려 할 때, 조광연이 큰소리로 최지훈을 꾸짖었다.

    “최 대리. 지금 뭐하는 짓이야! OECD뿐 아니라 IT 중계기 제조업체의 번역 물량이 예견되는 상황이야.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 뻔한데. 네가 직접 번역할 생각인가 보지?”

    “과장님.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조광연이 박주혁을 돕기 위해 나섰지만,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번역부 직원들이 득달같이 조광연을 향해 소리쳤다.

    “조 과장님은 좀 조용히 해요. 왜 윽박지르세요!”

    “이게 회의에요? 조 과장님만 발언권 있냐고요!”

    직원들은 박주혁에 대한 불만을 조광연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조광연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는지 팔짱을 낀 채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침음했다.

    “으으음.”

    분위기가 과열되자 권선호가 다시 분위기를 중재했다. 하여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타이밍 하나는 잘 잡는 권선호였다.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진정된 후, 박주혁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최 대리. OECD가 단발성인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번역부가 1~2달 밤샘한다면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그런데 언제까지 그렇게 일할 생각이십니까? 밤낮없이 일하고 주말도 반납한 채 파인랭스에서 근무하는 것이 여러분의 보람입니까?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최소영과 구경숙을 포함한 번역부 직원들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분명 그의 말처럼 밤을 새우고 주말 없이 번역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그게 누구나 원하는 삶일까? 박주혁의 팩트 폭격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박주혁은 혹시 모를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기다렸지만, 회의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저는 여러분의 적이 아닙니다. 단순히 번역의 케파를 늘리기 위해 이런 조직 개편을 강행한다는 편견은 접어 두십시오. 회사에 머무는 시간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보다 많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행복하게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하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그게 제가 여러분께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의 복지라 생각합니다.”

    박주혁의 말에 회의실이 숙연해졌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프로젝트가 몰리면 다 같이 밤을 새워야만 한다. 당장 어제도 봄바디오와 극성정보통신 문서들로 야근을 한 번역부 직원들이었다. 퀭한 다크서클을 쓰다듬으며 번역부 최소영과 구경숙이 서로를 힐끔 마주 보며 속삭였다.

    “이러다 정말 번역부가 없어지겠어.”

    최소영과 구경숙은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 같아 불안했다. 박주혁의 마지막 말에 흔들리는 부하직원들의 모습마저 두 팀장의 마음을 들쑤셨다. 최지훈은 분위기가 한 번에 변하자 안절부절못하고 권선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권선호도 당장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박주혁의 말에 실린 무게가 엄청났다.

    그 누가 정시퇴근을 꿈꾸지 않았겠나?

    특히나 주 5일제가 시행되지도 않은 90년대다. 야근과 철야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오죽하면 직원들의 생명력을 뽑아 환전한다는 얘기가 있겠나. 90년대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만큼 혹사당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박주혁의 ‘정시에 퇴근하는 삶을 살게 해 주고 싶다’라는 말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와 다를 게 없었다.

    흥분과 반발로 뜨거웠던 회의실은 박주혁의 화법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 상태로 번역부 통폐합을 밀어붙여도 반발은 없을 것 같았지만, 박주혁은 한 발짝 물러나기로 했다.

    “제 진심을 여러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번역부 통폐합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 같으니.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내일 오전에 다시 회의를 진행하는 것으로 하죠. 어떠십니까?”

    직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박주혁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번역부를 없애려 하는 공공의 적에서 순식간에 빛을 비추는 구원자가 된 박주혁의 말에 거역할 수가 없었다. 박주혁은 직원들의 표정을 살피고는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직원들이 모두 업무로 복귀한 후 회의실에는 최소영과 구경숙 그리고 권선호와 최지훈만 남았다. 최소영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권선호와 최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장님. 박 사장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우리가 이렇게 흔들려야 해요? 이러다가 진짜 우리 프리랜서 관리를 해야 하는 거라고요!”

    권선호는 입을 꾹 다문 채 말없이 최소영을 쳐다봤고 그녀는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권 부장님. 디데이가 언제예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다 같이 짐 싸죠.”

    최소영의 패기 어린 말에 구경숙이 조심스럽게 동의를 표했다.

    “맞아요. 전 부장님 따라갈 테니까···.”

    번역부 팀장들이 권선호를 부추길 때 최지훈이 으르렁거리며 그들의 말을 잘라버렸다.

    “팀장님들. 회사 내에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조심해주세요. 그리고 권 부장님께서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지 않겠습니까?”

    최지훈이 정색하며 최소영과 구경숙을 끌고 회의실을 황급히 빠져나갔다.

    텅빈 회의실.

    옅은 미소와 함께 권선호의 안광이 빛났다.

    ‘후후. 박주혁, 자충수를 뒀구나.’

    #

    박주혁은 사장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화두는 던졌다. 잠시 혼란이 있겠지만 결국 내 뜻을 받아들이겠지.’

    예상대로 권선호의 세력들이 들고일어나며 회사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위기를 넘어서야만 파인랭스를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을 터.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출혈이 따르는 법이다.

    ‘이미 벌어진 일. 최단기간 내에 완료한다.’

    박주혁이 재차 마음을 다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시스템 온. 프리랜서 지원자 관리.”

    - 검색 중···.

    - 1,530명의 지원자가 현재 샘플 테스트를 받지 않았습니다.

    - 프리랜서 지원자 목록을 확인하시겠습니까?

    프리랜서 지원자만 1,530명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샘플 테스트조차 발송하지 않았다.

    심형직처럼 검증된 프리랜서를 쓰는 것만으로도 물량이 부족했다. 그에 따라 지원자 관리는 손을 놔버렸었다. 사실 이들을 관리할 인력도 후반엔 남아있지 않기도 했고···.

    ‘이번엔 이런 일 없을 거야.’

    박주혁은 지원자 목록을 쭉 훑으며 종이에 메모했다. 이미 20년 넘게 사용한 프로그램이었기에 분류는 잘 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만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렇게 눈앞에 잘 정리되어 있으니 일의 진도가 빨랐다. 시스템의 화면을 출력할 수 있거나 다른 메일로 보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아직 그런 기능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박주혁은 조급하지 않았다.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박주혁은 눈앞에 나타난 정보들을 필기하듯 써 내려간 후 나지막이 말했다.

    “시스템 오프.”

    박주혁은 적어논 분류항목을 쭉 훑었다. 현재 가장 필요한 분류는 번역 가능 분야였다. 통신과 건설 쪽 프리랜서를 선별해 번역연구팀에서 실력을 검증해야하고 피드백을 통해 파인랭스에 맞는 옷을 입혀야만 한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IT 업체의 물량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박주혁은 생각을 정리한 후 수화기를 들어 심영찬을 불러들였다.

    “예. 사장님.”

    “영찬씨, 시스템 개발 진행이 어떻게 되고 있나 궁금한데.”

    “뼈대를 만드는 중이고 현업으로부터 필요한 메뉴와 기능들을 취합하고 있습니다.”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달력을 봤다.

    ‘아직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어. 앞으로도 8개월은 더 지나야 베타 테스트를 돌리겠군. 더 빨리는 무리겠지?’

    이미 매일 같이 야근하고 있는 심영찬에게 드라이브를 건다는 것은 좋은 생각 같지 않았다. 박주혁은 자신이 정리한 프리랜서 관리에 들어갈 메뉴를 건네며 말했다.

    “시스템에 프리랜서 지원자 관리라는 항목을 만들 생각입니다.”

    시스템이 개발되고 추후 업데이트 될 내용이었지만, 박주혁은 개발단계에서 부터 기능을 추가시킬 생각이었다. 결국 질 좋은 프리랜서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곧 미래의 힘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프리랜서 관리라. 아까 회의 때 말씀하신 것이군요.”

    “맞아요. 시스템에서 프리랜서를 바로 확인하고 컨택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네요.”

    “좋은 생각이신 것 같긴 한데. 반발이 심할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되세요?”

    “예. 조금···.”

    심영찬이 걱정하는 바를 박주혁도 느낄 수 있었다. 조직이 흔들리는 것 같은 불안감. 박주혁도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번역부가 송두리째 흔들린다면 파인랭스에 닥칠 여파는 상상할 수 없었다.

    번역부가 이탈하면 품질 클레임이 터지며 그로 인해 고객이 떠나가는 연쇄 도미노. 박주혁이 지금 드라이브를 거는 것이 그런 리스크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에 살아남을 수 없어요. 새로운 정책이 싫어 퇴사하겠다는 사람은 막지 않을 생각입니다. 영찬씨가 걱정하는 바는 알겠지만,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파인랭스는 건재할 겁니다.”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다만 그로 인해 사장님이 힘드실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박주혁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심영찬을 올려봤다. 심영찬의 맑은 눈에서 그의 진심이 흘러나왔다.

    ‘그래. 영찬아. 넌 그런 사람이었지. 똑같아서 고맙다.’

    박주혁은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심영찬의 팔뚝을 몇 차례 치며 말했다.

    “대표의 일은 고객과 직원에게 욕을 먹는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박주혁의 말에 심영찬이 눈을 크게 뜨고는 곧 박주혁의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내렸다. 박주혁이 오늘따라 더 커 보였다. 고작 시스템만 개발하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가슴은 뜨거웠다. 그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힘주어 말했다.

    “사장님. 저는 욕하지 않겠습니다. 어떻게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음? 하하.”

    박주혁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흠. 영찬이가 뭔가 의욕이 넘치는데···. 이럴 때 살짝 드라이브를 건다면?’

    박주혁은 씩 웃으며 심영찬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영찬씨가 날 도우려면 시스템 개발을 서둘러야겠는걸?”

    “할 수 있습니다!”

    심영찬은 크게 외치듯 말하며 땅을 향하던 시선을 들어 박주혁을 마주했다. 이글거리는 심영찬의 눈을 마주하니 천하의 박주혁도 살짝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사람 눈이 타오를 수도 있나?’

    심영찬은 허리를 90도로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의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고 발걸음 하나하나에 힘이 잔뜩 실려있었다. 의욕이 철철 넘치는 심영찬을 보니 박주혁도 덩달아 힘이 솟는 것만 같았다.

    ‘조직 개편을 하려 했더니 심영찬을 각성시켜버렸네. 덕분에 개발은 속도가 나겠어.’

    박주혁은 사장실을 나가는 심영찬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소득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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