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조직을 개편하겠습니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던 박주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시스템 온. 검색,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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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일지=== 848건
프로젝트=== 17,856건
보고서=== 639건
회의록=== 828건
통신 관련 프로젝트 건수: 17,856건
통신 관련 프로젝트 매출액: 20,219,124,807원
파인랭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통신 시장의 규모를 다시금 확인하니 가슴이 웅장해졌다.
물론, 2020년까지의 매출액이긴 하지만, 90년도 초반부터 이동통신 관련 번역이 줄을 잇고 있었다.
2G, PCS 또는 CDMA(코드 분할 다중 접속)라고 불리는 이동통신 기술.
미국의 월컴이라는 곳이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있으며, 월컴 또한 파인랭스의 고객이었다.
96년도 이동통신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번역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국내에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이동통신 사업에 뛰어들면서 한설정보통신, 극성정보통신, 크트프리텔, 신세계통신, 한국통신까지 총 5개의 이동통신 서비스 회사가 난립하게 된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011, 016, 017, 018, 019로 시작되는 개인 휴대폰를 갖게 되었고 012, 015로 시작되는 삐삐서비스는 시장에서 점차 사라졌다.
뜨거웠던 반응만큼이나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각 통신 회사들은 기지국을 늘려야 하는 상황에 몰리고 그에 따라 번역 물량이 쏟아져 나왔다. 파인랭스의 황금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당시 박주혁이 파인랭스를 챙기지 않아도 잘 돌아갔던 이유가 바로 이동통신 시장의 태동기였기 때문이다. 파인랭스는 통신 번역 시장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었지만, 권선호가 퇴사한 후 예상 매출이 절반 넘게 줄어버렸다.
그전까진 500억도 우스울 것이라 예견했었건만···.
박주혁의 안광이 매섭게 빛났다.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겠어.’
박주혁은 직원들에게 얘기할 것들을 다시 한번 속으로 정리한 후 비장한 표정으로 사장실을 문을 열었다.
박주혁이 사장실을 나서자 직원들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났다. 순식간에 사무실이 복닥복닥해졌다.
회사 규모 대비 회의실이 크지 않았기에 전 직원이 자리하려니 상당히 옹색했다. 직급이 높은 사람들은 자리에 앉고 나머지는 콩나물시루처럼 서 있어야만 했다. 박주혁은 비좁은 회의실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무실도 옮겨야 하는데.’
앉으면 눕고 싶다고 출근 첫날부터 생각했었는데 어느덧 한 달이 넘게 흘러버렸다. 직원들이 모두 입장하고, 마지막으로 박영희가 허겁지겁 회의실로 들어와 인파를 헤치고 착석했다. 박주혁은 목을 한번 가다듬고 큰 소리로 말했다.
“다들 프로젝트 진행에 바쁠 테니 회의를 빠르게 진행하겠습니다.”
박주혁의 입이 열리는 순간 뭔가를 바쁘게 적는 직원들. 마치 입시학원에서 강사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메모하는 학생들 같았다.
“파인랭스의 조직을 개편하겠습니다.”
하지만, 박주혁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의 팬이 메모지 위에 우뚝 멈춰 섰다. 직원들은 눈을 크게 뜨며 주변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곧 웅성거림이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권선호도 허를 찔렸는지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미간을 좁힌 채 박주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오늘부터 번역 1부, 2부는 번역연구팀으로 통폐합됩니다.”
최소영과 구경숙 팀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서로를 마주 봤지만, 별달리 반응할 수 없었다. 박주혁이 그리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기에···.
“번역연구팀은 앞으로···.”
박주혁은 말끝을 흐리며 화이트보드에 순서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회의실 가득한 직원들의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긴장감이 역력한 눈빛으로 박주혁이 그리는 그림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박주혁이 순서도를 완성하고 고개를 돌리자, 회의실이 다시 한번 술렁였다.
“저게 대체 뭐야?”
“말도 안 돼.”
“우리보고 프리랜서 관리하라는 거야?”
“프리랜서를 발굴하고 교육을 한다고?”
“그럼, 번역은 누가 해?”
회의실에 있는 직원 대부분이 번역부 사람들이었기에 박주혁의 순서도 그림 하나로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번역연구팀은 앞으로 프리랜서 관리가 주 업무가 됩니다.”
박주혁의 선언에 회의실이 난장판이 되었다.
“아니,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번역 1부 최소영 팀장이었다.
“흥분하지 마시고, 제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흥분 안 하게 생겼어요? 파인랭스에 번역하러 왔지. 프리랜서를 관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최소영 팀장이 큰 소리로 소리치자 번역부 사람들이 더욱 술렁거렸다. 박주혁도 이럴 것이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저항이 거셌다.
“맞습니다! 사장님. 재고해주세요!”
“이건 아니죠!”
여기저기서 항의성 고함이 터졌고,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권선호가 벌떡 일어나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흥분하지들 말고 사장님 얘기를 다 들어보고 그 후에 발언권을 얻고 말하세요. 여기가 시장입니까? 이런 식으로는 회의 진행이 안 됩니다. 모두 자중하세요!”
권선호가 중재하자 분위기가 살짝 누그러들었다. 박주혁이 평소 예상했던 대로 번역부는 이미 권선호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권선호는 회사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번역부를 손에 쥐거나 다름없었다.
박주혁은 좁아지는 미간을 재빨리 피며 권선호를 향해 덤덤하게 말했다.
“권 부장님. 감사합니다. 우선 제 얘기를 듣고 나서 의견을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조 과장님. 어제 통신 중계기 업체 미팅 결과를 이 자리에서 공유할 수 있을까요?”
조광연은 자신이 호명되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통신 중계기 제조사들과 면담 결과. 모두 파인랭스와 거래를 할 의향이 있었습니다.”
“거기까지 하셔도 됩니다. 모두 조 과장님의 얘기를 들으셨죠? 통신 중계기 제조사. 이미 여러분들은 극성정보통신의 문서를 접했습니다. IT 분야에서 파인랭스보다 앞서는 회사는 없습니다. 이는 모두 번역부의 힘이 아니었으면 얻을 수 없는 타이틀이었겠죠.”
박주혁은 번역부를 달래려는 듯 그들을 치켜세우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지금 중계기 제조사 전체가 저희와 거래하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에릭숀, 너텔, 요키아, 극성정보통신, 루센트, 알파텔, ANT까지. 번역할 문서가 몰리게 되면 지금 여기 계시는 번역부 직원들로 소화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조직 개편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박주혁이 말을 끊고 잠시 회의실을 둘러봤다. 영업팀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듣는 얘기였는지 눈을 끔벅이다 박주혁의 눈길을 피했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자, 박주혁은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거리는 최소영을 불렀다.
“최소영 팀장?”
최소영은 자신이 호명되자, 움찔거리더니 박주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번역이 얼마나 의뢰 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가능 여부를 판단할 수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최소영 팀장이 잘 말해주셨습니다.”
박주혁은 다시 화이트보드로 몸을 돌리며 7개 기업의 이름을 쭉 써 내려갔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구경숙 팀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구 팀장. 극성정보통신, 600페이지 번역에 며칠 걸렸습니까?”
“예? 아, 그게 6일입니다.”
“17명의 번역사가 600페이지 번역에 6일이 걸렸습니다.”
박주혁이 데이터를 들고 말하기 시작하자 당당히 어깨를 펴고 얼굴을 붉히던 몇몇 직원들의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17명의 번역사라면 4일 안에 소화해야 맞는 분량이죠?”
박주혁의 팩트 체크에 번역부는 입을 쭉 빼고 고개를 슬그머니 숙였다.
“영업팀 한 대리.”
“예, 옙!”
“IT 중계기 제조업체들로부터 의뢰될 분량이 어느 정도로 추산됩니까?”
“어···. 극성정보통신과 거래했던 데이터로 유추해보면 회사당 매달 약 500~1,000페이지를 의뢰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박주혁은 다시 화이트보드로 몸을 돌려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최소로 잡아 500페이지라고 계산해 봅시다. 7개 회사 3,500페이지입니다.”
숫자를 적어 내려가자 번역부 직원들이 급격히 의기소침해졌다.
“중계기 제조사들로부터만 3,500페이지입니다. 거기에 신규고객인 봄바디오 외 기타 고객들의 물량이 더해진다고 보면 월 최소 4,000~5,000페이지란 소리입니다. 최소영 팀장. 이 분량을 우리 번역부가 한 달 안에 모두 소화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
최소영은 처음에 흥분하여 소리칠 때와는 달리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래서 조직을 개편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이미 프리랜서로 전향한 심형직씨와 같은 유능한 번역사를 발굴하여 확보할 수 있다면, 매달 10,000페이지가 넘는 분량도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소영과 구경숙이 창백한 얼굴로 권선호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권선호는 그들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박주혁. 번역부가 와해하면 파인랭스는 끝이야. 그걸 모르는 거냐?’
권선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최지훈 쪽을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최지훈이 권선호에게 바짝 다가섰다.
“최 대리.”
“예, 부장님.”
권선호가 짧게 자기 생각을 최지훈에게 전달했고, 최지훈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주혁은 회의실 분위기를 장악했다고 판단하고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여러분. 파인랭스는 현재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현재에 만족하는 순간 영광은 과거의 것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발전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겨우 선두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화해야 합니다. 혁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의 위치를 사수할 수 있습니다.”
연설과 같은 박주혁의 말이 끝나자, 감수팀과 개발팀 그리고 조광연과 한기훈이 소름이 끼치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감탄사를 뱉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쏟아지는 날 선 눈빛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박주혁의 말에 감탄한듯했다.
분위기를 살피던 최지훈이 때를 맞춰 손을 들었다.
“사장님의 비젼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현재 7개 중계기 업체가 우리와 번역할 의향이 있다는 것이지 실제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최지훈의 말에 맞장구를 치듯 번역부 직원 몇몇이 호응했다.
“맞아요!”
“실제 거래가 일어난 것도 아닌데 조직 개편이라니요?”
최지훈은 번역부 직원들의 지원사격을 등에 업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사장님께서는 너무 먼 미래를 보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부분은 재고가 필요해 보입니다. 프리랜서를 가용해야 한다는 것에 저도 동의하지만, 이런 급격한 변화는 거부반응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직원들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안정적인 운영을 조금 더 고민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최지훈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번역부 직원들이 우뢰와 같은 박수를 쳤다.
생각지 못한 격한 호응에 머쓱했는지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박주혁은 박수가 잦아들 때까지 잠시 기다린 후 말했다.
“최 대리.”
“예.”
“하나 묻겠습니다. 이번에 낙찰된 OECD 번역은 분량이 얼마나 됩니까? 직접 입찰도 하셨으니 잘 알고 계시죠?”
박주혁의 말에 최지훈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떴다.
“그, 그건···.”
최지훈은 박주혁의 질문에 당황했고 권선호는 눈을 부릅뜨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낙찰된 것을 어떻게···!’
아직 결과 발표가 나지 않은 OECD 프로젝트였다. 심지어 낙찰 여부를 미리 알려온 이원희의 전화 또한 권선호가 직접 받았고 그의 메시지를 아직 박주혁에게 전달하지도 않았었다. 정보는 차단되어 있을 텐데 박주혁은 OECD 프로젝트 낙찰 소식을 알고 있었다.
유명한 국장이 박주혁에게 연락한 사실을 권선호는 알 수 없었으리라.
최지훈이 당황하여 멈칫거리자 박주혁이 잽싸게 말을 이어갔다.
“제가 너무 급작스럽게 질문했나 보군요. 이번에 수주한 외무부 OECD 번역 프로젝트가 약 5,000페이지입니다. 물론 기간의 여유가 있긴 하지만, 벌써 우린 시험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박주혁은 잠시 말을 끊고 좌중을 둘러봤다.
권선호는 OECD 낙찰 정보를 박주혁이 알고 있다는 것에 살짝 놀랐지만, 아직 공식적인 발표는 아니었다. 그는 박주혁의 시선을 피해 최지훈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직 공식 발표가 아니야. 밀어붙여.”
권선호의 말에, 최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