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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15화 (15/136)
  • 015화 변화는 지금부터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권선호의 목소리가 경직되어 있는 것을 눈치 챈 이원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음? 권 부장 무슨 일 있나? 목소리가 이상한데.”

    “아, 아닙니다. 지사장님 말씀을 메모하느라 그렇습니다. OECD 프로젝트가 낙찰됐다니 기쁘군요. 소식 감사합니다.”

    “그럼! 박 사장이 담당자들을 제대로 홀렸나 보더라고. 한턱 단단히 얻어먹을 테니까 꼭 메모 해놓으시게. 하하하.”

    권선호는 이원회와 통화가 끝난 후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일이 이렇게 된 거였군. 제기랄!’

    #

    “자, 잔 드시고.”

    조광연이 잔에 술을 채워 치켜들자, 권선호를 제외한 영업 팀원들이 큰소리로 외쳤다.

    “건배!”

    대표적인 회식 메뉴였던 삼겹살과 소주.

    파인랭스 영업팀은 가게 앞 도로에 놓여있는 드럼통을 용접해 만든, 간이 테이블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잔을 부딪쳤다. 가게 앞 거리를 마치 앞마당처럼 사용하는 삼겹살집.

    이제는 추억이 되었지만, 90년대에는 무척 흔했다. 술잔을 몇 차례 잔을 주고받은 후, 조광연이 최지훈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최 대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휴. 말도 마십시오.”

    최지훈은 오늘 외무부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조광연에게 말했다.

    “외무부에서 오늘 공개입찰이 있었어요.”

    “그랬어?”

    “아! 모르셨겠구나···.”

    최지훈은 순간 입을 다물고 상추에 삼겹살과 마늘을 올려 쌈을 쌌다. 조광연은 아차 싶었는지, 한기훈과 김진우의 잔에 술을 따르며 다시 분위기를 만들어가려 애썼다.

    ‘아, 새끼 진짜. 닮을 사람을 닮아라! 좀.’

    조광연은 다시 최지훈의 잔을 채우며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외무부에서 공개입찰을 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과장님. 같은 업계끼리는 입찰할 때 순번이 있어요. 원래 그렇잖아요? 돌아가면서 서로 잘 먹고 잘살자 그런 거죠.”

    금시초문(今時初聞)이었지만, 조광연은 정부 쪽 영업이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해줬다. 그와 동시에 조광연의 안광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 차례였는데. 권 부장님이 더 큰 건을 노리시겠다고 순번을 양보했어요.”

    조광연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영업의 기본은 기브 엔 테이크 그리고 밀고 당기기임을 고려해 봤을 때 최지훈의 얘기에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런데. 사장님이 나타나신 거예요.”

    “박주혁 사장이?”

    “예, 그렇다니까요!”

    조광연은 눈을 크게 뜨며 최지훈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박주혁이 직접 움직였다고?’

    박찬희 사장도 생전에 거래처를 직접 다니곤 했다. 조광연도 그와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전통적인 영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영업 방식이었다. 정직하게 다가서 신뢰를 구축하고 고객을 존중해줌으로써 스스로도 존중받았다. 참 독특한 방식이었지만, 효과는 좋았다. 조광연도 박찬희 사장의 영업 방법을 따라 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약점은 감추고 강점은 드러내고 싶은 것이 사람 심리 아니겠는가? 허심탄회하게 자신을 내려놓는 일이 조광연에게는 쉽지 않았다. 박찬희 사장과 함께했던 미팅이 불현듯 떠올랐는데 최지훈이 이어서 말했다.

    “글쎄. 사장님이 직접 발표하게 되면서 다른 회사들과 협의가 끝난 사항들이 모두 물거품이 된 거죠.”

    “곤란했겠군.”

    “예. 그런 협의 사항은 별도로 보고하지 않은 상태라··· 시말서도 쓰고. 뭐 그렇게 됐습니다.”

    “으음.”

    ‘보고하지 않고 일을 추진해? 뭔가 켕기니까 그랬겠지···.’

    조광연이 속으로 최지훈을 비웃었지만,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최지훈의 밑장빼기가 마음에 안 들었을까? 아니 소주가 유독 썼던 것 같다. 조광연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박 사장이 아직 어려서 그런 생리를 몰랐겠지.”

    “예. 그렇겠죠.”

    최지훈의 영혼 없는 대답에 조광연이 헛웃음을 삼켰다.

    ‘영혼 없는 말투까지···.’

    술자리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오늘 있었던 사실 일부와 권선호와 최지훈이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이었다. 돈 쓰고 시간 들여 얻은 정보치고는 빈약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상종 못 할 새끼들.’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 조광연이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후우.”

    흰 연기를 길게 내뿜은 조광연이 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권선호 그 새끼, 내가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쫌팽이 같은 놈!”

    조광연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거칠게 집어 던지고 발로 세게 비벼 껐다.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는데, 술을 마셔서 그런지 볼륨 조절이 잘되지 않은 모양이다. 위쪽 빌라 창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한 아줌마가 소리쳤다.

    “술 먹었으면 곱게 집에나 쳐가! 시끄럽게 소리 지르지 말고! 이 망할 새끼야!”

    “어이쿠! 죄송합니다.”

    조광연은 허리를 연신 굽신거리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빨리 돈 모아서 이 동네를 벗어나든가 해야지. 원.”

    #

    - 치이익!

    불판 위에 고기가 연기를 내며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웬 고기야?”

    “오늘 외근을 갔다 왔더니 힘들어서요. 항정살이에요 어머니.”

    “항정살?”

    “돼지 한 마리에 200g 정도만 나오는 고급 부위래요.”

    박주혁은 맛있게 익어가는 항정살을 뒤집으며 밝게 웃었다. 최효정의 앞접시에 다 익은 고기를 올리며 박주혁이 말했다.

    “다음엔 돈 좀 더 벌어서 소고기 사드릴게요.”

    “소고기는 무슨···. 됐다. 이것도 맛있네.”

    최효정은 박주혁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파인랭스가 호황기에 접어들었지만, 번역 회사 특성상 많은 돈을 만지지는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인건비 비중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노동집약형 사업이었기에 버는 족족 직원들 월급 주기 급급했다. 매출액의 60%는 고정 인건비로 지출되어야 했고 유지비 및 법인세로 30%를 제하고 나면 손에 쥐는 것은 10% 남짓. 그마저도 비상금으로 비축해야 했으니 손에 쥐는 것은 월급이 전부였다. 대기업 부장급 월급을 챙겨오고 있었지만, 회사 자금 상황이 안 좋을 때면 다시 회사에 밀어 넣어야 했다. 그로 인해 근검절약이 몸에 밴 최효정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박주혁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회사 운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과거가 떠오르자, 박주혁은 갑자기 목이 멨다.

    “콜록, 콜록.”

    “어이구. 그렇게 맛있어? 천천히 먹어.”

    최효정은 박주혁에게 물을 건네며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똘똘똘.

    박주혁은 잔을 채워 최효정에게 내밀었다.

    “주혁아. 엄마 술 못해.”

    “알아요. 짠 만 해주세요. 혼자 먹기 심심해서 그래요.”

    “직원들이랑 회식이라도 하지···.”

    “전 어머니랑 먹는 게 좋아요.”

    박주혁은 소주를 반병쯤 먹은 후 최효정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어머니. 권선호 부장. 잘 아시죠?”

    “권 부장? 그럼 알다마다. 고마운 사람이다.”

    “예. 그렇죠. 아버지와 파인랭스를 만들었으니까요.”

    “그럼. 고생 많이 했지.”

    최효정은 눈을 감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버지와 함께 고생한 권선호에 대한 미담이 있는 어머니시겠지만, 사실을 미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충격이 덜하실 테니 말이다. 최효정의 운명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연약한 최효정이 충격받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었다.

    ‘최대한 잘 돌려서 말하자.’

    “회사 체질을 좀 바꿔 보려 해요.”

    박주혁의 말에 최효정이 고개를 들어 박주혁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는 젓가락을 식탁에 살며시 내려놓으며 박주혁의 말에 집중했다.

    “무슨 문제가 있니?”

    “고정 인건비가 너무 높아서 수익성이 안 좋아요.”

    박주혁의 말에 최효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도 항상 그 말씀을 하셨단다. 인하우스 번역사를 전부 프리랜서로 교체해야 한다고 말이야.”

    최효정의 말에 박주혁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생각보다 깊게 알고 계시는 것에 놀랐고, 박찬희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아,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

    “그럼. 항상 효율성을 생각하시던 분이잖니. 하지만, 정리해고를 선뜻 못하시더구나.”

    “그렇죠. 그들은 직장을 잃는 셈이니까요.”

    최효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지만, 순간 눈빛을 바꿔 단호하게 말했다.

    “주혁아. 아버지는 정이 많은 것이 흠인 분이셨다. 사장이라면 무릇 결단의 순간에 주저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네가 필요하다고 느꼈으면 지금이 바로 결단의 순간인 거야. 망설이지 말거라.”

    항상 연약한 어머니라 생각했었는데···. 박주혁이 틀렸다.

    최효정은 누구보다 강인하고 추진력이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 덕에 파인랭스를 이렇게 키우실 수 있었던 것이구나.’

    파인랭스의 창립의 1등 공신은 최효정이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머니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권 부장도···.”

    “짤라.”

    충격받으실 최효정을 걱정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데 최효정이 정색하며 말했다. 박주혁은 최효정의 반응에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예?”

    “권 부장이 파인랭스에서 고생한 것은 알고 있지만, 변했더라.”

    “어, 어떻게 아셨어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권 부장의 눈빛을 보고 느꼈다. 네가 회사에서 뜻을 펼치려면 가장 먼저 없어야 할 인물이야. 네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니 확신이 드는구나.”

    박주혁은 오늘 최효정에게 세 번이나 놀랐다.

    ‘이미 판을 보고 계셨구나···. 진작에 여쭤볼 것을 그랬어.’

    “아직은 제가 배울 것이 많습니다. 조금 더 지켜보고요.”

    “그래. 신중한 마음가짐을 보니 안심하게 되는구나.”

    놀란 마음을 진정하려 박주혁이 소주를 천천히 마셨다.

    최효정은 박주혁이 소주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린 후 입을 여셨다.

    “직원들 퇴직금은 걱정하지 말아라. 준비되어 있으니. 주혁이 넌 네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회사를 끌고 가려무나. 난 우리 아들을 믿는다.”

    “···.”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렇게 큰돈이 있겠나.

    분명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챙겨두신 보험금과 부조금일 것이다.

    최효정의 말에 박주혁은 대답 대신 그저 살짝 웃어 보였다.

    #

    “좋은 아침입니다.”

    박주혁은 밝게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권선호의 꼬리를 잘랐다 붙인 것도 통쾌했고, 최효정과의 저녁도 환상적이었다.

    더 좋은 기분일 수 없었다.

    “오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사장님.”

    “오. 조 과장님 일찍 오셨네요?”

    “예. 앞으로 사장님보다 5분 일찍 오는 것이 목표입니다!”

    “하하하. 그것참 고마운 말씀입니다.”

    조광연 과장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고, 박주혁은 루틴대로 커피를 타 사장실로 들어갔다. 신문을 읽다 말고 어제 한기훈 대리가 구두 보고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사장님. 외근 다녀왔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다녀온 곳이 어디라고요?”

    “예. IT 장비업체들 순회 미팅 다녀왔습니다. 에릭숀, 너텔, 요키아, 극성정보통신, 루센트, 알파텔 그리고 ANT 입니다.”

    “통신 중계기 제조업체들이군요. 한 번에 도신 것 같네요? 힘드셨겠습니다.”

    “아닙니다. 회사들이 다 근처에 몰려 있어서 문제없었습니다.”

    “세부적인 사항은 보고서로 제출하시고, 피곤하실 텐데 마무리하고 퇴근하세요.”

    통신 중계기 제조업체들을 방문하라 지시했는데 그걸 조관영과 한기훈이 사흘도 되지 않아 전부 만나고 왔다.

    엄청난 추진력이라 살짝 놀랐는데, 보고서를 보니 그 내용 또한 기가 막혔다.

    1. 통신 중계기 제조업체들은 현재 믿을 수 있는 번역 업체를 찾고 있음.

    2. 곧 PCS 시장이 열릴 것을 고려하여 공격적인 투자가 이뤄질 예정이라 함.

    3. 6개 업체 모두 샘플 번역을 의뢰해 보겠다고 함.

    “조 과장과 한 대리는 시원시원하네. 마음에 들어.”

    보고서를 앞에 두고, 박주혁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그의 손가락이 멈추더니, 이내 키보드로 옮겨갔다.

    [오전 11시 전사 미팅 진행합니다.]

    엔터키를 누름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박주혁이 양복 상의의 단추를 잠갔다.

    “변화는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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