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4화 (14/136)
  • 014화 어쭙잖은 거짓말.

    박주혁이 미간을 좁히며 권선호를 노려봤지만, 그는 한 점 부끄럼이 없다는 듯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OECD 번역 프로젝트 입찰 몰아주기는 최 대리의 생각이 맞습니다. 관련하여 얘기를 듣고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해 그대로 진행했을 뿐입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예. 그렇습니다.”

    박주혁이 턱을 괴고 권선호에게 집중하자 그는 말을 이어갔다.

    “OECD 가입을 위한 자료들을 번역하는 데 있어. 저희에게 리스크가 무엇이겠습니까?”

    권선호가 박주혁에게 화두를 던지자, 박주혁이 미간을 좁히며 권선호를 노려봤다.

    ‘이 새끼가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그 눈빛을 읽었는지 권선호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바로 품질 이슈일 겁니다.”

    “시작도 하지 않은 일에 품질 이슈를 걱정한다는 말입니까? 누가 영업을 하면서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라고 했나요?”

    “그것이 아닙니다. 저는 최 대리가 이렇게 속이 깊은 친구인지 몰랐습니다. 말을 듣고 보니 저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진행을 말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부 프로젝트, 거기다가 OECD 가입이라는 대외적인 문서에서 작은 품질 이슈라도 발생한다면 번역 회사로서는 씻을 수 없는 이미지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박주혁이 권선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분히 되물었다.

    “그래서요?”

    “최 대리는 그러한 이미지 타격을 비껴갈 묘안을 낸 겁입니다. 탑 번역이라는 회사를 앞세우는 것이죠. 품질 이슈가 발생 돼도 탑 번역만 타격을 입게 되는 겁니다.”

    “음?”

    박주혁이 잘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하자, 최지훈이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탑 번역이 화살받이가 되고 번역은 입찰 몰아주기에 참여한 회사 규모대로 나누어 진행하기로 협의했었습니다.”

    최지훈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며 권선호를 힐끔 쳐다봤다.

    권선호는 그런 최지훈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박주혁이 최지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풉! 푸하하.”

    박주혁의 웃음에 권선호가 미간을 와락 좁히며 그를 노려봤고, 최지훈은 당황하여 눈을 끔벅였다.

    박주혁은 크게 웃고는 눈물을 살짝 훔치며 말했다.

    “품질 이슈가 발생했을 때 파인랭스의 이미지를 보호하겠다는 것이 이유였다는 말입니까?”

    권선호를 모욕하는 웃음과 행동이었지만, 권선호는 좁혔던 미간을 펼치며 차분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사장님.”

    최지훈도 권선호와 호흡을 같이하며 크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사장님. 진심을 호도하지 말아 주십시오!”

    두 사람의 뻔뻔한 거짓말에 박주혁은 웃음을 딱 멈추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정색했다.

    “지금. 그걸 저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몰리셨네요. 권선호 씨.’

    품질 이슈를 대비해 타 회사를 전면에 내세우고 번역 물량은 취하겠다는 그럴싸한 거짓말. 품질이 걱정이었다면 더욱더 한 회사가 전담하는 것이 맞지 않나? 권선호와 최지훈이 계획한 일은 품질 이슈를 만드는 것이지, 품질을 올리는 방법이 아니란 말이다.

    “권 부장 말대로 진행한다면 품질 이슈를 막는 것이 아니라, 일으키는 것이죠. 탑 번역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게 무슨···?”

    “번역회사들과 하고자 했던 일이 샘플 번역 짜깁기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

    박주혁의 말에 최지훈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권선호을 바라봤다. 권선호는 굳은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박주혁은 내밀었던 상체를 의자에 기대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

    “얼맙니까?”

    난데없이 얼마냐는 말에 최지훈이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탑 번역에게 주는 조건으로 떨어지는 게 있었을 것 아닙니까?”

    “사, 사장님! 맹세코 그런 일 하지 않았습니다.”

    최지훈이 억울했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그때, 권선호가 최지훈의 팔목을 잡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사장님. 저희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권 부장. 우리 솔직해집시다. 어쭙잖은 거짓말로 절 농락하지 마시고요.”

    박주혁이 다시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양손을 깍지끼고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권선호는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온 답은 하나였다.

    박주혁은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이 사건을 덮으려 하고 있었다. 권선호는 눈을 내리깔며 한숨과 함께 말했다.

    “500만 원입니다.”

    최지훈이 눈을 더 크게 뜨며 권선호를 빤히 쳐다보더니 경악스럽게 소리쳤다.

    “부, 부장님!”

    하지만, 권선호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박주혁이 권선호의 태도를 보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500만 원이군요.”

    사장실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고 적막이 흘렀다.

    최지훈만 안절부절못하며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갔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울부짖었지만, 박주혁과 권선호 사이에 알 수 없는 협상은 이미 체결된 것 같았다.

    “이렇게 하죠. 권 부장과 최 대리의 징계는 3개월 감봉으로 하겠습니다. 더는 토 달지 마십시오.”

    권선호는 박주혁의 말에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부, 부장님!”

    최지훈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권선호는 최지훈의 목덜미를 눌러 억지로 박주혁에게 인사를 시켰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예. 그러셔야 할 겁니다. 파인랭스의 사훈이 정직, 신뢰 그리고 존중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존중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두 번은 없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권선호가 고개를 숙인 채 칼같이 대답했다. 그리고 최지훈은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럼 나가서 일들 보세요. 시말서는 작성해서 가져오시고요.”

    “알겠습니다. 사장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권선호는 다시 한번 박주혁에게 허리를 숙이더니 최지훈을 잡아끌고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모두 나가고 박주혁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파인랭스의 이미지?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박주혁의 양쪽 입꼬리가 귓가로 올라갔다.

    ‘권선호. 네가 지금 나가면 곤란하지. 아직 카드가 남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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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지훈은 권선호 뒤에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자신 때문에 권선호까지 감봉되었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부, 부장님···.”

    “시말서나 써. 난 사람 안 버린다 했다.”

    “예···.”

    최지훈은 눈가를 소매로 훔치며 자리에 앉았다. 혼자 짊어지고 갈 생각이었는데 권선호가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들 줄 상상도 못 했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철두철미한 사람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부하를 위해 나서는 모습에 최지훈은 감동했다.

    ‘앞으로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부장님.’

    엄숙한 분위기에 김진우는 보고할 사항들을 적어둔 수첩을 만지작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외근을 나갔던 조 과장과 한 대리가 때마침 회사에 복귀했다.

    “다녀왔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다녀온 일은?”

    “아, 뭐 늘 만나던 고객이라 별다른 얘기는 없었습니다. 항상 납기 좀 지켜달라는 얘기죠.”

    “그래. 보고서 작성해.”

    조광연 과장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딱딱하게 굳은 권선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최 대리는··· 또 왜 저래요?”

    “아무 일 없었어.”

    “아, 예. 한 대리. 사장님께 외근 다녀왔다고 보고해. 난 보고서 작성할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조광연은 권선호에게 더 캐묻지 않고 본인의 맡은 일을 착실히 해나갔다. 보통 이런 엄숙한 분위기면 캐묻고 싶은 것이 사람 심리일진대 조광연은 전혀 관심 없는 듯 보였다.

    그때 김진우가 조광연에게 슬그머니 다가와 속삭였다. 아무래도 다가서기 어려운 권선호보다 호쾌한 성격의 조광연이 편했다.

    “저, 과장님. 오늘 전화 온 것들인데요.”

    “음?”

    조광연은 김진우가 건넨 수첩을 쓱 훑어보더니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걸 왜 진우 씨가 다 받았어? 이거 최 대리 담당이잖아?”

    조광연은 최지훈을 힐끔 바라봤지만, 그는 눈물을 훔치며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차마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랄까? 조광연은 다시 고개를 돌려 김진우를 쳐다봤다.

    네가 대답해보라는 눈빛이었지만, 그는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했다.

    “아, 대체 뭔데?”

    “그, 그게···.”

    김진우는 조광연에게 가까이 다가가 자신이 아는 것들을 속삭였다. 조광연은 단편적인 정보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감을 잡았다. 영업맨의 직감이라는 것이 작용했을 터.

    “음···. 그래?”

    조광연은 미간을 좁히며 권선호와 최지훈을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진우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조광연을 올려봤다. 조광연은 거침없이 최지훈을 향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최 대리. 오늘 외근 있었어?”

    “예? 아, 네.”

    “최 대리 담당회사에서 연락이 왔나 본데. 그렇게 울상짓고 있으니 얘가 말을 못 걸고 있잖아.”

    그제야 최지훈이 아차 싶었는지, 김진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아. 진우씨. 어디서 연락 왔습니까?”

    조광연은 고개를 돌려 김진우를 슬쩍 내려보며 윙크를 했고 김진우은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했다.

    “대리님 한설정보통신이랑···”

    김진우가 최지훈에게 간 후, 조광연은 자리에 앉아 얼굴을 두툼한 손으로 쓸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권선호 새끼가 뭔가를 꾸미는 것 같긴 한데···. 저 뱀 같은 자식은 속을 알 수 없단 말이지.’

    최근 들어 권선호와 최지훈의 행태가 눈에 거슬렸던 조광연이었다. 사실 권선호와는 초창기부터 스타일이 달라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호탕한 조광연과 달리 권선호는 속을 알기 어려운 모략가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권선호에게 정보를 캐보려 해도 이빨도 들어가지 않는 것을 알기에 조광연은 김진우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최지훈을 바라봤다.

    ‘최 대리를 구워삶아 볼까?’

    최지훈이 김진우와 얘기가 끝난 듯 보이자, 조광연은 최지훈에게 대가가 어깨를 툭 치고는 검지와 중지를 입에 가져가는 시늉을 했다. 최지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광연과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권선호는 그런 그들에게 가만히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모니터로 시선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후. 감봉 3개월에 최지훈을 곁에 둘 수 있다면 저렴한 거지. 내가 반드시 파인랭스를 통째로 먹어주겠어. 박주혁!’

    모니터를 바라보는 권선호에게서 안광이 번뜩였다.

    #

    “후우.”

    최지훈은 조광연이 건넨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올려봤다.

    “조 과장님.”

    “어.”

    최지훈이 다시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최지훈도 권선호를 닮아가면서부터 이런 식이었다.

    조광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최지훈에게 물었다.

    “권 부장한테 혼났냐?”

    “예? 아니요.”

    최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하. 자식이 비싸게 구네. 점점 누굴 닮아간단 말이지.’

    아무래도 그냥은 털어놓지 않을 것 같자, 조광연은 최지훈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오늘 술 한잔하자.”

    “예? 괜찮습니다. 과장님과 술 마시면 다음 날이 무척 힘들다고요.”

    최지훈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조광연은 최지훈에게 헤드락을 걸며 말했다.

    “야! 이 자식아. 너 기분 풀어주려고 하는 거지 내가 술을 먹고 싶어서 그런지 알아?”

    “아! 아파요. 이거 사내 폭력이에요. 아아!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조광연은 최지훈에게 확답을 받은 후, 사무실로 내려가 한기훈 대리에게도 오늘 저녁 약속 비우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기훈이 기겁하며 말했다.

    “또요? 지금도 속이 쓰려요.”

    “야! 오늘은 우리 최 대리. 기분 좀 풀어줘야 하니까 무조건 비워 알았냐!”

    “아이씨. 진짜. 저도 데이트도 하고 결혼 좀 합시다.”

    “야! 넌 임마. 파인랭스와 결혼한 거라고 내가 했냐? 안 했냐.”

    조광연은 한기훈에게 헤드락을 걸며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그런 그들을 향해 번역부와 감수팀에서 죽일 듯 노려봤지만, 소란의 중심이 조광연인 것을 알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권선호와 최지훈의 시말서를 받은 박주혁이 얼마 뒤 퇴근하자, 조광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서 가자며 신호했다.

    “야. 김진우. 너도 빨리 나와 임마.”

    “예! 예.”

    권선호는 조광연을 따라나서는 최지훈을 말리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뒀다. 이미 머릿속에는 박주혁이 OECD 프로젝트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박주혁이 대체 어떻게 알았지?’

    그때 사장실의 전화기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주혁이 이미 퇴근했기에 누군가 당겨 받아야 하는 상황. 권선호는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당겼다.

    “파인랭스 권선호 부장입니다.”

    “오! 권 부장. 나 이원희인데 박 사장은 퇴근했나?”

    “아 안녕하십니까? 지사장님. 사장님은 퇴근하셨습니다. 저한테 말씀하시죠.”

    “아. 조금 빨리 전화했어야 했는데. 아쉽게 됐군. OECD 번역 파인랭스가 단독 수주했어! 축하한다고 전해주게.”

    이원희의 말에 권선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며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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