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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13화 (13/136)
  • 013화 그러니까. 꼬리를 자르시겠다?

    박주혁은 시스템 문구를 읽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파인랭스의 성장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 사원 권한이 대리 권한으로 변경됩니다.

    - 대리 고유 권한으로 검색항목에 번역사(프리랜서)가 추가됩니다.

    - 검색 조건을 말하면, 파인랭스 DB에서 불러올 수 있습니다.

    “대리 직급으로는 보안문서를 아직 볼 수 없나 보군. 그나저나 여태까지 번역사 검색이 안 되고 있었다니···.”

    박주혁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턱을 쓰다듬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번역 회사들은 얼마나 질 좋은 번역사를 확보했느냐에 따라 회사의 역량이 결정되는 척박한 환경에 놓여있었다. 아무리 시스템적으로 품질의 향상성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지만, 사실 번역의 질은 친절하게 쓰인 원문과 실력 있는 번역사, 그리고 마무리를 잘하는 감수자에 의해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인랭스가 번역업계에 발을 빨리 들여놓은 덕에 질 좋은 번역사를 확보했으니 망정이지, 후발 주자였다면 업계 선두라는 타이틀도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을 것이다.

    물론, 박영희라는 인재 또한 한몫했다.

    사람들 심리가 그렇듯 번역사들은 잘나가는 회사에 취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에 따라 잠재력이 있는 번역사는 파인랭스와 상위 번역 회사에 경쟁하듯 취업했다. 번역 회사에 간택 받지 못한 번역사들은 점차 규모가 작은 소규모 번역 회사들을 전전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형식의 사업 구조가 무려 10년을 이어지다 보니 번역 회사들이 놓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번역사의 실력 향상이라는 변수였다.

    파인랭스와 상위 번역 회사에 취업하지 못한 번역사 지망생들은 낮은 단가와 넘쳐나는 물량으로 자신의 실력을 탄탄히 쌓아갔다. 상위 번역 회사들이 질 좋은 원문의 문서들을 우아하게 소화하고 있을 때, 그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원문과 씨름했다. 원문을 거지같이 써놓은 의뢰자에게 번역이 개판이라는 클레임을 들으면서도 그들은 꿋꿋하게 번역실력을 쌓아갔다.

    상위 번역 회사들이 온실이라면, 그들은 야생의 잡초.

    그렇게 실력을 쌓은 번역사들이 IMF 이후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해야겠지?”

    박주혁은 소나타2의 시동을 걸어 외무부를 빠져나가며 생각에 빠졌다.

    번역업계는 경기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된 만큼, 6개월을 앞서 경제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 국문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비중이 높으면 경기가 유지되거나 좋아진다는 신호였다. 그만큼 국내 생산품들이 수출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반면, 국문화 비중이 높아지면, 수입이 늘어나고 수출이 줄어드는 경기 침체의 시그널이었다.

    96년 후반부터 번역 의뢰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고, 국문화 비중이 높아질 것이다. IMF에 앞서 시장이 경기 침체의 시그널을 보내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성장만 거듭해온 번역 시장이 침체할 것이라고 예상한 대표는 없었을 것이다. 박주혁을 비롯해 대부분 CEO가 일시적인 현상이라 믿었다.

    파인랭스는 고맙게도 권선호가 직원들을 데리고 나가주는 덕분에 인건비를 선제적으로 감축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회사들은···.

    번역 물량이 확 줄어버리는 IMF에 많은 번역사를 보유한 회사는 6개월도 채 버티지 못하고 파산했다. 그렇게 시장에 쏟아진 능력 좋은 번역사들이 무슨 일을 하겠는가?

    바로 프리랜서 번역가였다.

    하지만, 그들은 잡초처럼 자라온 번역사들에게 밀려 과거의 영광만 떠올리다 대부분이 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다. 박주혁이 파인랭스의 전 직원이었던 번역사에게 연락했을 때 그의 반응이 대표적인 예였다.

    “전 단어당 200원 아니면 안합니다.”

    단어당 200원.

    한 페이지를 이루는 단어 수가 대략 400~600단어, 한 페이지 번역에 12만 원, 번역 회사의 마진까지 더한다면 페이지당 15~20만 원이라는 소리였다. 외환 위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금을 확보해야 하는 시기에 한 페이지에 15만 원이라면 누가 번역을 의뢰하겠는가?

    그들이 그렇게 과거의 영광 속에 갇혀 있을 때,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번역사들은 단어당 30~40원을 내걸고 접근해 왔다. 그리고 그들이 시장을 장악했다.

    박주혁은 운전대를 신촌으로 틀며 번역사 ‘심형직’을 떠올렸다.

    파인랭스에서 근무 후 프리랜서로 전업한 인물이었다. 故 박찬희도 심형직을 매우 아껴 파인랭스를 퇴사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그에게 번역을 의뢰했다. 그 당시 심형직이 파인랭스와 협의한 단가가 단어당 40원.

    심형직은 파인랭스와의 의리로 지킨다는 명목하에 저렴한 단가에 협의했고, 파인랭스는 그의 선심에 물량으로 보답했다. 그렇게 파인랭스와 심형직의 동행은 계속됐다.

    망하기 직전까지 말이다.

    95년인 지금도 심형직은 프리랜서로 파인랭스와 연을 맺고 있었다. 비록 번역사들이 사내에 있었음에도 심형직에게는 일정 물량을 꼬박꼬박 의뢰하고 있다. 품질과 속도 면에서 그를 따라올 자는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박찬희가 그를 놓치기 싫었으리라.

    심형직과 그러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파인랭스는 이미 프리랜서 관리에 익숙했다.

    박주혁은 차를 몰아 회사로 복귀하는 내내 파인랭스의 체질 변화에 대해 고민했다.

    “하긴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효과적으로 하느냐···.”

    과거에는 권선호가 직원들을 빼가면서 자연스럽게 체질 개선이 됐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업무에 차질이 생겨 떨어져 나갔던 고객들이 많았던 점을 떠올리면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는 것을 박주혁은 잘 알고 있었다.

    주차하고 나서도 운전대를 잡은 채 한참을 골똘히 고민하던 박주혁이 눈에 이채를 띠며 차에서 내렸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군.”

    #

    권선호는 최지훈과 사무실에 복귀하자마자 옥상으로 향했다.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아 품을 뒤졌다.

    - 치익!

    어느새 곁에 다가왔는지 최지훈이 라이터에 불을 붙여 권선호에게 내밀었다.

    “부장님. 여기···.”

    “고맙다.”

    권선호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허공에 뱉어내더니 말했다.

    “최 대리.”

    “예.”

    “박주혁이 어떻게 알았을까?”

    최지훈도 흰 연기를 내뿜으며 한숨 쉬듯 답했다.

    “글쎄요···.”

    “밀고자가 있는 것 같다.”

    “...”

    최지훈은 권선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담배 연기만 내뿜었다.

    “부장님.”

    “?”

    최지훈이 목소리를 깔고 권선호를 불렀고 권선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최지훈을 바라봤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더는 못하겠습니다.”

    권선호가 미간을 좁히며 담배를 문 채 말했다.

    “거의 다 왔는데 약한 소리 하지 마.”

    “아니요. 박주혁 사장.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이러다 부장님 말씀처럼 제가 밀고자가 될 것 같아서 안 되겠습니다. 전 부장님을 배신하기 싫습니다.”

    “최 대리!”

    권선호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최지훈은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표정 변화 없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부장님은 이번 일 몰랐다고 하십시오. 제가 한 것으로 꾸미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헛소리.”

    “진심입니다. 부장님 아니었으면 파인랭스에 입사도 못 했겠죠.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파인랭스에서 챙겨야 할 것들이 많으시잖아요. 제가 다 덮어쓰고 가겠습니다.”

    최지훈의 진심 어린 말에 권선호는 눈에 힘을 주더니, 고개를 돌려 담배를 피웠다. 권선호는 짧아진 담배를 바닥에 집어 던진 후 발을 비벼 불씨를 끄며 말했다.

    “난 사람, 안 버린다.”

    권선호가 단호하게 말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부장님!”

    최지훈은 그런 권선호의 뒤에 대고 소리쳤지만, 권선호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박주혁.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당하진 않는다.’

    #

    박주혁이 막 사무실로 올라왔을 때 계단에서 내려오는 권선호와 마주쳤다. 권선호는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허리를 숙여 박주혁에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네. 시말서. 준비되면 들어오세요. 오늘 내로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박주혁은 냉기 가득한 말투로 권선호를 쏘아붙였지만, 권선호는 담담하게 받아냈다.

    ‘당황하지도 않는군. 무슨 변명을 하시려고?’

    박주혁은 그대로 사장실로 들어갔다. 외투와 서류 가방을 던지듯 옷걸이에 걸고는 의자에 몸을 실었다. 긴장의 연속이라 그런지 평소와 달리 피곤함이 엄습했다.

    “힘드네. 오늘은 고기를 먹자고 해야겠다.”

    퇴근 후 어머니와 함께 할 삼겹살과 소주를 떠올리며 머리를 식히는데 사장실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최지훈이었다. 그는 품에서 서류를 꺼내 박주혁에게 내밀었다.

    “시말서인가요?”

    “사직서입니다.”

    박주혁이 사직서라는 말에 고개를 들어 최지훈을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박주혁을 쳐다보지 않았다.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음.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번 입찰 몰아주기는 제가 부장님께 제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책임지시겠다는 건가요? 그걸 승인 또는 묵인한 것은 권 부장 아닙니까?”

    “아, 아닙니다! 분명 제가 제안했고 부장님은 제게 권한을 누릴 기회를 주신 것뿐입니다.”

    박주혁은 미간을 좁힌 채 최지훈의 얘기를 경청했다.

    그냥 개소리였다.

    ‘그러니까. 꼬리를 자르시겠다?’

    박주혁은 최지훈의 사직서를 책상에 살며시 내려놓고 말했다.

    “고민해보겠습니다. 권 부장의 시말서를 검토한 후 수리 여부를 정하겠습니다.”

    “사, 사장님! 권 부장님은 정말 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업체들과 협의하였고 부장님께 말씀드렸더니, 함께 자리해주신 겁니다. 보고하지도 않고 왜 이런 짓을 했냐며 엄청나게 욕먹었습니다. 제발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주혁은 권선호의 방패막이를 자처하는 최지훈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최 대리.”

    “예.”

    “하나 물어봅시다.”

    박주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최지훈이 고개를 들어 박주혁과 시선을 마주했다.

    “오늘 최 대리가 한 일이 회사에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길래 그렇게 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납득할 수 있는 사유가 있다면 없었던 일로 하겠어요.”

    “...”

    박주혁이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지 최지훈이 우물쭈물했다.

    “음. 그러니까···. 이번 입찰을 포기하는 대신 얻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겁니까?”

    “말하자면 그렇지요.”

    최지훈의 눈동자가 좌우로 왔다 갔다 했다.

    말을 지어낼 때, 그러니까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이 세 가지나 나왔다. 음을 내뱉으며 말을 꾸며낼 시간을 벌었고, 상대방의 말을 반복했으며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빼박이다.

    뻔히 알고 있지만, 박주혁은 최지훈의 얘기를 들어주기로 했다.

    “그게, 음···.”

    최지훈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할 때 사장실 문이 열리며 권선호가 들어왔다.

    “사장님. 권 부장입니다. 최 대리가 상의도 없이 사직서를 낸 것 같아 급하게 들어왔습니다.”

    권선호가 사장실로 들이닥치자 최지훈이 눈을 크게 뜨고 권선호를 쳐다봤고 박주혁은 딱히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박주혁은 태연하게 권선호를 향해 물었다.

    “아 권 부장. 최 대리가 이번 일은 자신이 꾸민 일이라던데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권선호의 말에 최지훈이 펄쩍 뛰며 놀라는 모습에 박주혁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껏 권선호가 최지훈에게 지시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최지훈의 반응을 보니 스스로 선택한 것 같았다.

    ‘사람을 체스 말처럼 쓰더니. 챙길 사람은 챙긴다는 건가요? 그럼 어디 그럴싸한 변명 좀 들어봅시다.’

    박주혁은 권선호의 입에서 어떠한 말이 나올지 궁금해졌다.

    “아니라면, 권 부장이 지시한 것이란 말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박주혁이 살짝 짜증을 내며 미간을 좁혔고 권선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긋나긋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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