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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12화 (12/136)
  • 012화 박주혁! 네가 왜 여기에?

    권선호와 최지훈은 외무부 회의실에 앉아 프레젠테이션을 차례를 기다렸다. 발표라고 해봐야 구매부서 담당자에게 자료를 준비하지 못해 입찰을 포기한다는 말 한마디면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래 관계를 위해 이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어야만 했다. 다음 프로젝트가 외무부에서 나오지 말란 법이 없으니 말이다.

    구매부 담당자도 이런 입찰 몰아주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했기에 입찰포기 업체에 별다른 패널티를 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90년대는 사업하기 참 좋은 세상이었다.

    “자, 다음은 탑 번역입니다.”

    “예!”

    이번 OECD 프로젝트를 낙찰받기로 사전모의 된 탑 번역이 제본된 회사소개서와 제안 내용을 담당자들에게 배부했다.

    “저희 탑 번역은 1992년도에 설립된 회사로···.”

    권선호는 팔짱을 낀 채 탑 번역의 프레젠테이션을 여유롭게 쳐다봤다. 그때 허리춤에 있던 삐삐가 진동을 울렸다.

    - 지이잉.

    아직 파인랭스의 순번이 오지 않았기에 권선호는 차분한 표정으로 삐삐를 살폈다. 8282라고 써있는 호출 번호가 권선호의 미간을 좁히게 했다.

    ‘김진우···. 뭐가 그렇게 급한 건데?’

    권선호는 최지훈에게 상체를 숙여 속삭였다.

    “잠깐 전화 좀 하고 올 게. 진우가 계속 호출을 하네?”

    “예. 부장님.”

    권선호는 슬그머니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와 복도에 마련된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파인랭스 김진우 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김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회사에 무슨 일 있어?”

    “아! 부장님. 왜 인제야 연락하시는 겁니까? 큰일 났다고요!”

    “큰일이라니?”

    김진우는 권선호와 최지훈이 외근을 나간 직후 박주혁이 찾았다고 전했다.

    “외근 간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대수라고 호출을 몇 번씩하고 그래?”

    “아니, 그게 아니라. 사장님께서 회사소개서를 20부 인쇄한 후 출발하셨어요.”

    권선호의 미간이 순간 확 좁혀졌다.

    ‘박주혁? 이 자식이. 또 어디로?’

    권선호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혈액이 머리 위로 뻗쳐 올라왔다. 오전에 느꼈던 목을 조여오는 기분 나쁜 느낌에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권선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김진우에게 물었다.

    “어디로?”

    “그, 그건 저도···.”

    흥분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했건만, 김진우의 대답에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왔다.

    “야 이, 멍청아! 사장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냐!”

    막상 소리를 질러놓고 나니 민망해진 권선호가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 방음 처리가 나름 되어 있긴 하지만,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십상이었다. 다행히도 프레젠테이션 중이라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장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가장 먼저 보고하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그랬지. 진우씨. 잘했는데 다음에는 사장님의 행선지 정도는 기본으로 알려줬으면 좋겠네?”

    “아, 알겠습니다.”

    권선호가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공중전화 부스를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공중전화 부스 문을 열려다 말고 재빨리 닫으며 중얼거렸다.

    ‘바···. 박주혁! 네가 왜 여기에?’

    예상 밖 인물의 등장에 놀란 권선호가 입을 떡 벌렸다. 박주혁은 공중전화 부스 안에 있는 권선호를 미처 알지 못했는지 그대로 지나쳐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중전화 부스 안에 있던 권선호의 눈이 박주혁의 뒷모습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상당한 충격이었는지 그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

    박주혁은 OECD 번역 프로젝트 입찰 프레젠테이션이 열리는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막 탑 번역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다음 업체의 프레젠테이션이 준비 중이었다.

    사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담당자가 구매부 주관 담당자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이자, 그걸로 프레젠테이션이 끝이었다.

    “타플라는 입찰 포기 의사를 밝혔습니다. 다음은···.”

    사회자의 얘기를 들은 박주혁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이 새끼들이 장난질이나 하고···. 떨어지더라도 후회가 없어야 하는 법인데.’

    담당자는 문서를 몇 장 넘기곤 파인랭스를 호명했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던 최지훈이 벌떡 일어나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잠시만요. 부장님이 잠시 화장실을 가셨습니다.”

    “아, 예···.”

    담당자는 불쾌한 눈빛으로 문서를 몇 장 넘기더니 이어 말했다.

    “파인랭스도 입찰 포기인가요? 회사 소개 자료가 누락입니다.”

    입찰 포기임을 알고 있던 최지훈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박주혁이 앞으로 나서며 최지훈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부, 부장님. 오셨어요?”

    최지훈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짓누른 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가 기대한 권선호의 얼굴이 아니었다. 박주혁임을 확인한 최지훈의 눈이 앞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억! 사, 사장님?”

    “최 대리.”

    “네, 넵! 병···!”

    최지훈은 너무 놀라 자신의 관등성명을 외칠 뻔했다. 박주혁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최지훈을 노려본 후 서류 가방에서 회사소개서를 꺼내 건넸다.

    “이런 중요한 자료를 회사에 두고 가면 어떻게 합니까?”

    “...”

    최지훈은 박주혁이 건네준 회사소개서를 멍하게 내려봤다. 박주혁은 최지훈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드리며 말했다.

    “뭐해요? 나눠 줘야지요?”

    “예? 아, 예!”

    최지훈이 헐레벌떡 회사소개서를 외무부 담당자들과 관계자들에게 배포하는 사이 박주혁이 사회자에게 다가가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직원 실수로 회사소개서가 누락된 것 같네요.”

    “예? 아. 괜찮습니다.”

    박주혁은 정중히 회사소개서를 사회자에게 건넨 후 회의실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 박주혁 사장입니다. 오늘 프레젠테이션은 제가 직접 하도록 하겠습니다.”

    박주혁의 말 한마디에 장내가 웅성거렸다.

    “뭐야? 파인랭스 사장이 직접 발표한다고?”

    “권 부장은 어디 갔어?”

    “이러면 얘기가 틀리잖아.”

    분위기가 소란스러워 박주혁이 발표를 할 수 없자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소리쳤다.

    “모두 조용히 하세요!”

    가뜩이나 뻔히 보이는 입찰 몰아주기로 마뜩잖았는데 파인랭스 사장이 등장하여 분위기가 변하자 내심 기뻤던 사회자였다. 소란이 사그라들자, 박주혁이 큰 목소리로 회사 소개를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놀란 마음을 추스른 권선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회의실로 들어와 최지훈 옆에 앉았다.

    “부, 부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

    “예? 부장님!”

    최지훈이 권선호를 닦달하며 보챘지만, 권선호도 할 말이 없었다.

    “조용히 해. 생각 좀 하게.”

    권선호가 양손을 깍지낀 채 턱을 괴고 박주혁이 발표하는 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박주혁 저놈이 어떻게 알았지?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었는데.’

    권선호는 눈을 매섭게 뜨며 생각해 봤지만, 이 정보가 새어 나간 루트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 박주혁의 발표가 시작됐다.

    #

    “여태까지 설명해 드린 모든 것들은 품질 향상을 위한 파인랭스만의 차별화된 전략입니다. 우리는 품질 외에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 OECD 가입을 위한 번역에서 가장 핵심은 바로 품질일 것입니다. 늘 품질에 대해 고민하고 원스톱 번역이 가능한 파인랭스가 이번 OECD 번역 프로젝트의 적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번 발표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 짝짝짝.

    오늘 발표 중 한번도 나오지 않던 박수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심지어 몇몇 번역 회사 영업 담당자도 입을 살짝 벌린 채 박주혁을 향해 손뼉을 쳤다. 그 모습을 보며 권선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존심도 없나···. 멍청한 놈들.’

    박주혁은 발표를 마치고 권선호 옆에 다가와 앉았다. 속 시끄러운 권선호였지만, 태연하게 박주혁을 맞이했다.

    “사장님. 발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권 부장. 앞으로 이런 발표회에서는 자리를 비우는 결례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박주혁의 말에 권선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훈수를 두는 모습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왔지만, 권선호는 베테랑 영업맨이었다.

    “예.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묻고 싶으신 겁니까?”

    “...”

    “그 전에 왜 보고 하지 않았는지가 먼저입니다. 시말서 준비하세요.”

    박주혁의 차가운 말에 권선호는 입을 꽉 다물며 고개를 숙여 알았다는 뜻을 전했다. 두 사람의 살벌한 분위기에 최지훈만 안절부절못하며 시선 둘 곳을 찾아 눈알을 굴렸다.

    번역 회사들의 발표가 모두 끝나자, 박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무부 담당자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외무부 담당자들과 일일이 인사하고 악수하며 명함을 건넸다. 물론,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말도 잊지 않았다.

    그런 박주혁을 바라보던 권선호도 이를 악물고 재빨리 박주혁 곁으로 다가와 담당자들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추후 외무부와의 연줄까지 끊길 것 같다는 불안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故 박찬희 사장과 함께 고군분투하던 시절로 돌아간 듯 허리를 숙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잘 부탁드립니다. 파인랭스 권선호 부장입니다.”

    박주혁은 자신을 따라오며 큰소리로 인사하는 권선호를 슬쩍 쳐다보고는 자리로 돌아와 가방을 챙겨 발걸음을 옮겼다. 최지훈은 권선호와 박주혁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렸다. 그런 최지훈을 향해 박주혁이 말했다.

    “최 대리.”

    “예!”

    “회사로 복귀 후 시말서 작성하세요.”

    “예···.”

    최지훈은 고개를 떨궜고 박주혁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권선호가 담당자들과 인사 후 자리로 돌아왔을 때 박주혁은 자리에 없었다.

    “사장님은?”

    “먼저 가셨습니다.”

    “제길.”

    권선호가 인상을 쓰며 턱을 쓸었다. 짐을 챙겨 회의실을 빠져나오자, 타 번역 회사 담당자들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권선호에게 달려들었다.

    “권 부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우리랑 장난쳐?”

    “회사에 다 보고해놨는데 일을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해!”

    직접적으로 욕만 안 했을 뿐, 그들의 말속에 쌍욕들이 한가득했다. 권선호는 서류 가방에서 확약서를 꺼내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을 향해 권선호는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사죄했다. 권선호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따지려 들던 사람들이 머쓱해졌다.

    최지훈은 분위기가 꺾이자, 인파를 헤치고 들어와 권선호를 챙겨 자리를 피했다. 권선호를 챙겨 주차된 차에 도착하자 최지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장님···.”

    권선호는 살짝 어지러운 듯 차에 손을 짚고 기대더니 거친 숨을 뱉어내며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

    박주혁은 회의실을 빠져나와 국제기구국 국장실로 향했다. 유명한 국장의 비서가 박주혁을 알아보고 목례하며 수화기를 잽싸게 들었다.

    “국장님. 박주혁씨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박주혁이 국장실로 들어가자, 유명한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발표가 아주 멋졌다던데요?”

    “그저 사실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국장님 덕분에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 사장. 아까도 말했지만, 이원희 선배 얼굴 보고 난 살짝 정보를 준 것밖에 없습니다. 결재서류에 파인랭스가 적혀있으면 그건 박 사장이 이뤄낸 겁니다.”

    유명한과 짧은 담화를 끝낸 후 박주혁은 쏘나타2에 올라탔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몸이 살짝 나른했다.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쉰 후 속으로 중얼거렸다.

    “봄바디오와 외무부. 모두 과거에 없던 것들이야. 이게 권선호의 또 다른 카드였을까?”

    이번 OECD 프로젝트가 권선호의 카드였는지 확인할 방법이 박주혁에게는 있었다. 그는 자동차 시트에 몸을 묻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시스템 온.”

    그의 말과 함께 눈앞에 낯익은 문구들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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