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화 입찰 포기라니!
박주혁은 호출기에 찍힌 번호를 보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곧장 수화기를 들어 전화를 돌렸다.
“네, 국제기구국 유명한 국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국장님. 파인랭스 박주혁입니다. 어제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아, 박 사장님. 덕분에 잘 들어갔습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하시나요?”
박주혁은 유명한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영업팀으로부터 외무부에 프레젠테이션을 한다는 보고를 들은 바 없었다.
매일 출근 후 커피와 신문 그리고 업무일지를 확인하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었건만, 외무부 프레젠테이션 관련하여서는 단 한 글자도 본 적 없었다.
박주혁은 미간을 콱 구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권선호···.’
박주혁이 잠시 망설이는데 유명한이 말을 이었다.
“참석자가 최지훈 대리와 권선호 부장으로 등록되어 있군요···. 음?”
유명한이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다급하게 종이를 넘겼다.
소리가 얼마나 거친지 수화기 너머 박주혁에게까지 들렸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멈추자 유명한이 수화기에 중얼거렸다.
“이상한데···.”
“국장님?”
“아, 박 사장님. 파인랭스는 이번 입찰 포기합니까?”
입찰 포기라니?
박주혁은 유명한의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권선호가 파인랭스의 단물을 빨아먹으려고 작정했다지만, 아직 소속은 파인랭스였다.
그런데 입찰 포기라니.
“국장님. 파인랭스의 순서가 언제입니까?”
“순서가 뒤쪽이긴 합니다만···. 어라?”
유명한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박 사장님. 오늘 들어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간단히 회사 소개라도 준비하세요. 오후 3시입니다. 도착하시면 제게 연락 한번 주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박주혁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가만히 모니터를 쳐다봤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전자 입찰이 보편화되지 않은 90년대는 입찰서류를 밀봉하여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아무리 보안을 철저히 한다지만, 사람이 하는 일에는 구멍이 있기 마련이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업체가 얼마에 입찰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비리가 만연했고 입찰 몰아주기도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이번 OECD 번역 관련하여서도 몇몇 번역 회사들은 입찰 몰아주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입찰 몰아주기를 알지 못했던 박주혁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입찰 비리인가?”
입찰 몰아주기도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중 하나였지만, 박주혁은 알지 못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회사에 복귀했을 때는 이미 ‘나라장터’라는 전자 입찰시스템이 자리를 잡은 뒤였기 때문이다.
박주혁이 공공 입찰 관련해서 잘 모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공공 입찰은 단가가 짜고 물량이 많아 업체들이 기피하는 프로젝트가 대부분이다.
추후 신생 업체들의 씨드베드가 되는 역할일 뿐 부가가치가 높은 프로젝트는 아니란 소리다.
그래서 파인랭스는 공공 입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물론 파인랭스가 쓰러져 갈 때는 공공 입찰이라도 해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었다.
입찰 시장은 민간기업을 상대하는 것과 달리 가격으로 승부하는 그들만의 놀이터가 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잠시, 과거를 떠올려 본 박주혁은 사장실을 나와 영업팀 자리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권선호와 최지훈은 자리에 없었다.
박주혁은 남아있는 김진우 사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권 부장과 최 대리 어디 갔나요?”
“오, 오늘 업체 미팅이 있다고 일찍 나가셨습니다.”
영업팀은 자주 업체 미팅이 있었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보고도 없이 외근을 갔다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박주혁이 미간을 좁히며 쳐다보자, 김진우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느 업체?”
“그, 그건 저도 잘···.”
김진우를 닦달해봐야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파티션 위에 올린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김진우의 눈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사, 사장님. 권 부장님 호출해볼까요?”
“됐어.”
아직 화를 삭이지 못한 박주혁의 말투는 시리도록 차가웠다.
박주혁은 짧게 심호흡을 한 후 김진우에게 지시했다.
“지금 당장. 경제 관련된 레퍼런스들로 회사 소개서 인쇄해서 가지고 오세요.”
“경제 분야 말씀입니까?”
“네. 최대한 빨리! 가져오세요.”
“네, 넵!”
김진우가 재빨리 자세를 고쳐잡고 자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박주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전산화만 되어 있어도 그냥 뽑히는 것을···.’
박주혁이 씩씩거리며 사장실로 들어가자, 사무실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박영희가 박주혁을 힐끔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실로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번역 2부 구경숙은 황급히 수화기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 지이잉.
권선호는 호출기를 꺼내 확인했다.
삐삐 화면엔 떨렁 숫자 ‘1111’이 찍혀있었다.
숫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권선호가 그 의미를 알아채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비상사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최지훈이 권선호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비상사태라뇨?”
“그러게, 비상사태라고 호출이 왔네.”
“회사일까요?”
“누가 장난치나 보지.”
권선호가 삐삐를 다시 허리춤에 차려는데 진동이 또 울렸다.
- 지이잉.
권선호는 미간을 좁히며 삐삐를 쳐다봤다.
익숙한 번호에 권선호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회사 전화번호였다.
‘구경숙 직통번호잖아. 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나?’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어 답답했지만, 지금은 당장 몇 시간 뒤에 있을 입찰이 더 중요했다.
들러리 역할이었지만, 반드시 참석해야만 한다.
이번 입찰은 파인랭스의 순번이었지만, 권선호가 선심 쓰는 척 순서를 양보했기 때문이다.
프레젠테이션에 앞서 타 회사 영업 담당자들과 미팅할 때,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어필하고 추후, 자신이 독립했을 때 입찰 몰아주기에 대한 확약서를 받는 날이기도 했다.
이미 약속된 플레이였지만, 그래도 준비를 해야만 하는 법이다.
권선호는 서류 가방을 열어 확약서를 꺼내 읽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다시 한번 삐삐가 울렸다.
- 지이잉.
“아, 뭔데?”
권선호가 짜증스럽게 말하며 확약서를 가방에 넣고 호출기를 꺼내 봤다.
이번에는 김진우의 직통번호와 함께 ‘8282’라는 번호가 찍혀있었다.
구경숙에 이어 김진우까지 의미심장한 번호를 보내왔다.
권선호는 누군가 뒷덜미를 당기는 것 같은 느낌에 미간을 와락 좁혔다.
오전에 박주혁에게 최지훈이 인쇄한 고객 리스트가 전산화 준비를 위한 자료라며 둘러댈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무엇인가 쪼여오는 듯한 기분 말이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권선호를 덮쳤지만, 차는 어느덧 종로에 도착했다.
“부장님. 도착했습니다.”
“그래. 들어가자.”
권선호와 최지훈은 한 카페로 들어갔고 싸구려 풍경음이 권선호와 최지훈을 반겼다.
- 딸랑.
풍경음에 먼저 도착해 있던 타 번역 회사 사람들이 권선호와 최지훈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권 부장님. 최 대리, 여기야!”
권선호는 언제 불길함을 느꼈냐는 듯 표정을 확 바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타 회사 사람들과 악수를 했다.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 입찰 몰아주기에 참여한 회사들이 모두 모이자, 권선호는 서류 가방에서 확약서를 꺼내 돌리며 말했다.
“이번 입찰, 포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다들 알지?”
업계 선두를 달리는 파인랭스가 상당한 분량이 예상되는 OECD 프로젝트를 포기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다들 의아해했다.
애초에 OECD 번역 물량을 자체 소화할 수 있는 업체는 국내에 몇 없었다.
자체 소화가 가능한 몇 안 되는 회사인 파인랭스가 이번 프로젝트를 양보하겠다는데 반기지 않을 번역 회사는 없었다.
파인랭스가 권리를 포기해 줌으로써 비리에 참여한 업체들은 회사 규모에 맞게 OECD 물량을 조금씩 나눠서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그런 연유로 입찰 몰아주기에 참여한 담당자들은 군말 없이 권선호가 작성한 확약서에 서명했다.
[추후 공공 입찰 중 권선호의 요청이 있을 시 우선순위를 양보한다.]
당장 눈앞에 떨어질 콩고물 때문에 확약서의 주체가 파인랭스가 아닌 권선호였음에도 이에 대해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권선호는 서명된 확약서를 일일이 확인하고는 웃으며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중얼거렸다.
‘이로써 한 발 더 가까워졌군.’
#
김진우는 심영찬과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그야말로 어리바리한 신입사원이었다.
영업팀은 외근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리를 자주 비우는지 몰랐다.
조 과장과 한 대리는 늘 상 외근을 가니까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오늘따라 자리를 잘 비우지 않던 권 부장과 최 대리까지 자리를 비웠다.
의지할 곳 없는 척박한 사막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김진우는 그래도 맡은 바 소임을 다하려 열심히 전화를 받고 차근차근 메모했다.
고객이 잘 모르는 질문을 하면 담당자가 외근이라 복귀하면 전달하겠다는 멘트로 위기를 넘겼다.
“후우.”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영업팀 파티션을 손으로 내리치듯 잡으며 말했다.
- 턱!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린 김진우의 눈이 확 커졌다.
‘헉! 사장님? 하필이면 다 외근 나갔을 때···. 젠장!’
“권 부장과 최 대리 어디 갔나요?”
김진우는 겁부터 덜컥 났다.
상사가 어디 갔냐는 간단한 질문임에도 그의 입이 덜덜 떨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글거리는 사장님의 눈빛에 오금이 저렸다.
겁에 질려 있는데 사장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다이렉트 오더를 내렸다.
“지금 당장. 경제 관련된 레퍼런스들로 회사소개서 수정해서 가지고 오세요. 최대한 빨리!”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본능적으로 자세를 고치고 앉아 컴퓨터를 마구 뒤졌다.
‘경제 분야. 경제 관련 프로젝트!’
김진우는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며 회사 소개서 수정에만 몰두했다.
- 철커덕. 즈즈즉.
프린터가 뱉어낸 회사 소개서를 들고 김진우는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사장님.”
“들어와요.”
김진우는 사장실에 들어가자마자 회사소개서를 박주혁에게 내밀었다.
한장 한장 정독한 박주혁은 김진우를 향해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차분하게 말했다.
“고생했어요. 20부 제본해놓으세요.”
“알겠습니다!”
김진우는 사장실을 나와 벽에 기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흐아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심영찬이 눈을 끔벅이며 김진우를 쳐다봤다.
“왜 그래?”
“나, 사장실 처음 들어갔잖아. 너무 무섭다.”
“사장님. 친절하시잖아?”
“넌 아직 못 본 거야. 그 눈빛을···.”
김진우는 품에 회사소개서를 안은 채 몸을 부르르 떨었고 심영찬은 고개를 갸웃하며 김진우를 빤히 쳐다봤다.
#
박주혁은 김진우가 준비한 서류를 챙겨 종로로 향했다.
늠름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지나 외무부 주차장에 도착하니 시계가 2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늦지는 않았네.”
박주혁은 서둘러 외무부로 들어가 유명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장님. 박주혁입니다.”
“도착하셨습니까? 3층으로 올라오시죠.”
“알겠습니다.”
박주혁은 국제기구국 사무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 국장실로 향했다.
안경을 쓰고 있는 비서가 박주혁을 잡아 세우며 말했다.
“어떻게 오셨죠?”
“유명한 국장님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성함이?”
“박주혁입니다.”
비서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수첩을 살피더니 수화기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국장님. 박주혁이라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유명한 국장의 비서는 박주혁에게 들어가라며 손으로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박주혁이 국장실로 들어서자, 유명한이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제, 오늘 이틀 연속보니 정들겠습니다?”
“하하. 국장님 어제보다 얼굴이 밝아 보이십니다.”
“박 사장 덕분에 어제 스트레스를 좀 풀었습니다. 자, 앉으세요. 회사소개서는 준비하셨나요?”
“예. 여기 준비했습니다.”
박주혁은 회사소개서를 꺼내 유명한에게 건넸고 그는 회사소개서를 스르륵 훑어보더니 말했다.
“박 사장님. 아무래도 입찰 비리가 좀 있는 것 같은데···. 혹시 탑 번역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탑 번역이면···.”
공공 입찰 시장을 꽉 쥐고 있던 회사 중 하나였다.
민간기업을 상대했던 파인랭스와는 마주칠 일이 없던 회사였다.
다만 소문으로는 낮은 단가를 유지하기 위해 번역 입문자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악질 기업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들어는 봤습니다.”
“이번 입찰은 탑 번역으로 몰아주는 분위기네요. 제가 보기에 탑 번역은 이번 프로젝트에는 어울리지 않는 회사인 것 같습니다. 이런 회사에 국민의 혈세를 줘야 한다는 게 탐탁지 않군요.”
박주혁은 유명한의 말을 들으며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래에 들었던 소문으로 탑 번역을 매도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박주혁은 권선호와 같은 부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유명한은 박주혁의 표정을 살피고 자신의 책상에 있던 입찰서류를 박주혁에게 슬그머니 내밀며 말했다.
“박 사장의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모르는 일이셨나 봅니다.”
“한 조직의 대표라면 부하직원들을 믿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분명 사유가 있을 겁니다.”
“직원을 믿는 사장님이라. 파인랭스 직원들은 좋겠습니다. 우리 윗선도 좀 그러면 좋을 텐데 말이죠.”
유명한은 말을 마치고 허탈하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이번 프레젠테이션은 박 사장이 직접 하세요. 파인랭스 직원들은 발표도 안 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입찰 몰아주기입니다. 박 사장이 입찰 쪽은 잘 모르는 것 같아 알려드리는 겁니다.”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유명한의 얘기를 경청했다.
“파인랭스는 이번 입찰 말고 다음 건수를 노리는 걸 테지만, OECD 물량이 좀 많아야지요. 이원희 선배답지 않게 그런 자리까지 마련한 것을 보면 어지간히 박 사장이 마음에 드셨나 본데. 선배 얼굴을 봐서 살짝 도와드리는 거니 판단은 박 사장이 하세요.”
유명한은 프레젠테이션만 잘하면 탑 번역이 파인랭스의 적수가 되겠냐며 말끝을 흐렸다.
즉, 탑 번역 외에 프레젠테이션을 제대로 준비한 회사는 없다는 소리였다.
박주혁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정보 감사합니다. 낙찰받게 되면 제가 밥 한 번 사겠습니다.”
“나 말고, 이원희 선배에게 사세요.”
“그러겠습니다. 국장님은 우연히 합석하시는 걸로 하시죠.”
“음? 하하하. 그거 솔깃하군요.”
어제와 달리 유명한은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