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0화 (10/136)
  • 010화 이 명함 값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박주혁은 사무실의 PC를 전부 확인하고 소프트웨어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예상대로 라이센스가 갖춰지지 않은 소프트웨어는 없었다.

    99년 불법 소프트웨어 단속에서 문제가 됐던 매킨토시와 CAD를 아직 구비하지 않았으니 문제 될 일이 없었다.

    박주혁은 소프트웨어 체크리스트를 옆으로 밀치고 최지훈이 뽑아온 고객 리스트를 살펴보며 미소 지었다.

    “역시 이 리스트가 목표였겠지. 그리고···.”

    박주혁은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화면에는 최지훈의 컴퓨터에서 복원했던 파일 중 하나가 열려있었다.

    [OECD 프로젝트 협력사 및 연락처.xls]

    박주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파일을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시스템 온. 검색, OECD”

    - 검색 중.

    - ‘OECD’와 관련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역시 없어. OECD라···.”

    박주혁은 의자에 몸을 묻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어디선가 삐삐거리는 소리가 들려 박주혁이 눈을 조금 크게 뜨며 주변을 둘러봤다.

    옷걸이에 걸어뒀던 외투 속에서 얄팍한 기계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삐삐?”

    번호도 가물가물하던 삐삐지만, 분명 소지하고 있었다.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삐삐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가 찍혀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한 후 삐삐에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디선가 들어본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박주혁입니다. 호출하신 분 계신가요?”

    “아! 박 사장. 날세 봄바디오 이원희.”

    “아 지사장님. 번역본은 잘 사용하셨나요?”

    “누가 보면 진짜 지사장 된 줄 알겠네. 허허허. 박 사장 덕분에 본사에서 긍정적으로 지사 설립을 검토해보겠다더군. 자네 말대로 짜깁기했으면 얼굴에 먹칠할뻔했어. 다시 한번 고맙네. 오늘 연락한 건 그것 때문이 아니고 자네에게 소개해줄 사람이 있는데 주말이긴 하지만, 혹시 잠시 시간 되나?”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죠. 어디십니까?”

    박주혁은 전화를 끊고 남산으로 향했다.

    이원희는 일전에 함께 저녁을 먹었던 일식집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랏샤이마세!”

    박주혁이 종업원에게 이원희 씨를 찾아왔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로 안내했다.

    한적한 곳에 있는 룸을 열고 들어가니, 이원희 외에 한 명이 더 있었다.

    그는 박주혁이 들어서자 고개를 들어 힐끔 박주혁을 쳐다봤다.

    “안녕하십니까? 이원희 지사장님.”

    “어이구! 박 사장 오셨구먼. 이리, 내 옆에 앉게.”

    박주혁이 자리하자, 이원희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박주혁을 소개했다.

    “명한아, 아까 말했던 파인랭스의 박 사장이다.”

    “아, 그 번역 회사요?”

    “이번에 도움을 많이 받았지. 믿을 만한 친구야.”

    “그렇군요.”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박주혁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외무부 국제기구국 유명한 국장입니다.”

    박주혁은 외무부 국제기구국이라는 말에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고 손을 맞잡았다.

    ‘아까 권선호가 만든 파일에도 있었던 이름이야. 유명한 국장. 이게 이렇게 연결되는 건가?’

    “파인랭스의 박주혁 사장입니다.”

    “생각보다 젊으시군요.”

    유명한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말투는 무미건조했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기보다는, 박주혁에게 큰 관심이 없는 느낌이었다.

    ‘번역 회사의 젊은 대표라면 호기심이라도 있을 법한데.’

    젊었을 때는 망나니처럼 살았다고는 하나, 파인랭스가 크게 기울면서부터는 열심히 사회생활을 했던 박주혁이었다.

    ‘번역 회사라서···인가?’

    외무고시를 패스한, 소위 엘리트라고 불리는 사람으로서 아마 번역이라는 것에 별다른 감흥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당시만 해도, 능력 없는 사람이나 외부에 번역을 맡긴다는 인식이 존재했다.

    후에 문화콘텐츠 산업이나, 컴플릭스 같은 OTT 사업의 규모가 커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특히나 외무부에서 번역을 의뢰한다는 것은, 영문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영문으로 글을 작성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박주혁은 불현듯 과거, 모 기업과 미팅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90년대에는 그래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희소성이 있었다.

    그래서 번역사라고 하면 사회에서도 제법 인정을 받는 편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를 넘어가면서부터는 달라졌다.

    조기 교육을 받았거나 유학을 다녀온, 영어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번역 회사와 왜 미팅하는 겁니까? 저희가 하면 됩니다. 요새 영어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 게으른 사람이나 번역을 맡기죠. 읽고 바꾸면 되는 것인데, 잠만 조금 줄이면 되는 일 아닙니까.

    - 번역은 비용 낭비입니다!

    박주혁을 앞에 두고, 클라이언트들이 했던 말이었다.

    대놓고 무시하는 말들이었지만, 당시 박주혁은 웃으면서 허리만 굽신거렸을 뿐이었다.

    그들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당연히 영어를 잘한다면 직접 번역하는 것이 품질 면에서 가장 좋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는 담당자이지, 번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번역을 의뢰하는 것은, 담당자가 영어를 못해서가 아니라 물리적인 ‘시간’이 없어서이다.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숨은 뜻은 자신도 영어를 잘하니 똑바로 번역하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직접 번역을 해봤던 사람일 확률이 높았고.

    번역이 얼마나 시간이 많이 들어가고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인지 알기 때문에 더욱 저렇게 딴지를 거는 것이다.

    당장 진행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인데,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번역할 시간이 있을 리가···.

    외무부라고 다를 것은 없을 터.

    전문 영문 에디터들이 외무부에 있지만, 그들이 작성하는 것은 브리핑 자료나 외무부 공식 문서 등 대외적으로 사용될 문서가 주가 된다.

    OECD 가입을 위한 기본 자료, 계획서 및 질의응답서 등 중요도는 다소 떨어지지만, 양은 많은 문서를 번역할 인력은 없었다.

    결국 시간이 부족해 번역 외주를 나가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외주는 파인랭스로 와야 했다.

    박주혁은 유명한의 건조한 눈빛을 마주하며 빈 술잔을 채웠다.

    이원희가 타이밍 좋게 건배를 제안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한잔하시죠! 잔들 들어요.”

    유명한은 박주혁과 함께 하는 자리가 다소 거북한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 예.”

    잔을 부딪치고 입안에 소주를 털어 넣은 박주혁이 유명한에게 말을 걸었다.

    “국장님. 요새 엄청 바쁘시겠습니다.”

    “음, 뭐. 그렇죠.”

    유명한은 박주혁을 다소 경계하고 있는 듯했다.

    초면이니 그럴 수밖에.

    “90년부터 OECD 가입을 위해 뛰셨을 텐데, 이제 곧 결과가 나오죠?”

    박주혁의 말에 유명한이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이원희가 박주혁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야! 자네, 인제 보니 OECD에 관심이 있었군?”

    “하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한 관심사 아니겠습니까? 선진국과 상호 경제 발전을 공동으로 모색하고 세계 경제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협력기구인데, 가입만 된다면 우리나라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지겠습니까?”

    “흠···.”

    회 한 점을 집어 입에 가져가던 유명한이 박주혁을 슬쩍 쳐다봤다.

    박주혁은 재빨리 다음 질문을 던졌다.

    “국장님, 그래서 말인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저희, OECD 가입할 수 있겠습니까?”

    “··· 그건 제가 결정하는 부분이 아니지요.”

    유명한의 입에서는 여전히 찬 바람이 휭휭 불었다.

    유명한이 말을 아끼면서, 박주혁은 다음 플랜을 위해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들겼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유명한이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 넣더니 입을 열었다.

    “이 선배님.”

    “으응?”

    “OECD 가입이 정말 우리나라에 득이 된다고 보십니까?”

    박주혁은 그의 질문에 내심 놀랐다.

    OECD 가입으로 자본시장이 개방되며, 외국 자본이 한국으로 흘러들어오면서 환율이 급락하게 된다.

    환율이 떨어지면서 수출 경쟁력이 약화됐고, 결과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97년 IMF의 직접적인 영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단기외채 비중이 높아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위기를 부추겼다는 평은 있었다.

    “어허, 우리 후배께서 취했나?

    이원희가 어색하게 웃으며 유명한의 어깨를 툭툭 쳤고, 때마침 박주혁의 머릿속에서는 계산이 끝났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는 국장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고견은 무슨···.”

    피식 웃은 유명한 국장은 말없이 다시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표정.

    박주혁의 눈빛에 이채가 잠깐 비쳤다가 사라졌다.

    “국장님께서는···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어느새 얼굴이 붉어진 유명한은 박주혁의 물음에 고개를 힐끔 돌리고는,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OECD 가입하면 자본시장이 열립니다. 외국 자본이 들어오겠죠.”

    유명한의 조곤조곤한 말투에, 박주혁과 이원희는 차분히 그의 말에 집중했다.

    그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후폭풍을 우려한 유명한은 OECD 가입 후 벌어질 부작용에 대해 몇 번이고 상부에 보고를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 위에 계신 분들은 왜들 그렇게 고집이 센지···.”

    그럴 수밖에.

    YS가 자신의 공으로 만들기 위해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으니.

    “심지어 OECD 가입이 선진국으로 가는 유일한 지름길인 것처럼 포장되고 있습니다.”

    유명한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고, 박주혁은 얼른 그의 빈 소주잔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국장님 의견에 공감합니다. 국장님 같은 분이 공직에 계시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유명한의 살짝 커진 눈이 박주혁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다시 술잔으로 돌아갔다.

    “··· 유명무실이죠. 현직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유명한의 건조한 눈빛은, 아마 회의감이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연거푸 소주를 들이켜던 유명한은 어느새 시뻘게진 얼굴을 테이블에 그대로 박은 채 잠이 들었다.

    “허허, 이 친구. 술이 많이 줄었구먼.”

    이원희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고, 박주혁은 괜찮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주혁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를 부축해서 데리고 나갔고, 주차된 차의 뒷좌석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잠시 후 대리 기사가 주차장에 도착했고 유명한의 차는 이내 식당을 빠져나갔다.

    자리로 돌아오니, 이원희가 겉옷과 짐을 챙기고 있었다.

    박주혁이 가까이 오자, 이원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박 사장. 이거 참, 미안하게 됐네. OECD 관련해서 번역할 것이 많다 해서 내 이 자리를 마련했는데, 후배가 진상만 피우고 가버리는구먼.”

    “괜찮습니다.”

    박주혁은 유명한의 명함을 꺼내 보이며 담담하게 웃었다.

    “이 명함 값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응? 어허허!”

    이원희는 박주혁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박 사장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보통 고위 공직자가 술자리에서 신세 한탄을 하고 가는 경우는 두 가지다.

    자리를 내려놓을 생각이거나, 아니면 상대방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나.

    ‘어느 정도 관계는 쌓은 것 같고.’

    대학 선배인 이원희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며 소개한 사람이 박주혁이었으니.

    ‘생각보다 잘 풀릴 수도 있겠는데?’

    박주혁은 기분 좋게 귀갓길에 올랐다.

    택시에 올라타니 그제야 취기가 올라와 머리가 지끈거렸다.

    #

    월요일.

    박주혁이 커피를 들고 사장실로 들어서 한 모금 마시고 신문을 펼치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권 부장님. 월요일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어제 출근하셨다 들었습니다.”

    “아! 권 부장 그런 자료를 만들고 있었으면 귀띔이라도 해주시지 그랬습니까?”

    박주혁의 말에 권선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런 미세한 표정 변화에서 박주혁은 뭔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권선호의 눈은 다시 초점을 맞췄고 나긋나긋 말했다.

    “아직 미완성 자료입니다. 좀 더 보완하여 보여드려야 했었는데 아쉽습니다.”

    ‘아쉽겠죠. 들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안 그렇습니까?’

    박주혁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덕분에 전산화가 더욱 속도를 낼 것 같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권선호는 허리를 굽히고 사장실을 나갔다.

    어깨와 얼굴이 굳어 있는 권선호을 보며 박주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고객 리스트가 전부가 아니던데···. 그 부분은 모르고 계시는군요.’

    아침부터 권선호에게 한 방 먹이니 상쾌했다.

    심영찬과 오전 미팅을 끝내고 박주혁은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점심 언저리였다.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의 삐삐가 요란하게 울어댔다.

    삐삐를 꺼내 찍힌 호출 번호를 확인한 박주혁의 눈이 커졌다.

    ‘음?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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