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9화 (9/136)
  • 009화 잠깐 들어오세요 커피나 한잔하게.

    - 지잉. 지이잉.

    권선호는 부인인 이송이와 부둥켜안고 있다가 진동 소리에 상체를 벌떡 일으켜 삐삐를 낚아챘다. 이송이는 흥이 깨졌는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뭔데 그래요?”

    “중요한 메시지야.”

    권선호가 침대에 걸터앉아 수화기를 들자, 이송이는 이불을 끌어 몸을 감싸며 권선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녹음된 메시지를 확인한 권선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협탁에 놓여있는 물을 따라마신 후 씩 웃으며 이송이를 돌아봤다.

    “이제 곧 우리 마누라가 사모님 되시겠네.”

    “풉. 사모님은 무슨, 만년 부장의 마누라지.”

    "어허! 곧 사모님 소리 듣게 해줄께!"

    이송이는 사모님 소리가 싫지는 않았는지 입꼬리를 올렸고 권선호는 그런 이송이를 슬쩍 밀어 눕히며 끌어안았다. 이송이의 입가에 다가선 권선호는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우리 사모님. 앞으로 떵떵거리며 살게 해줄게.”

    “난 지금도 좋은걸? 하지만, 사모님도... 읍!.”

    권선호는 이송이의 말을 자르고 입술을 깨물듯 덮쳤다. 이송이는 권선호의 리드에 몸을 맞기며 허리를 꺾으며 신음했다.

    “하읍!”

    #

    일요일.

    불이 꺼져 있는 사무실 구석의 모니터 한 대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사무실에 출근한 최지훈.

    탕비실 근처에 있는 프린터에 용지를 보충한 그는 부팅된 컴퓨터에서 자료들을 클릭한 뒤, 인쇄를 시작했다.

    - 위이이잉.

    레이저 프린터가 예열을 하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곧 문서를 뽑아내며 불편한 기계음을 토했다.

    - 철커덕. 즈즈즉.

    “내가 이래서 일요일에 온 거 아냐. 쯧.”

    프린터가 요란한 소리를 냈기 때문에 많은 양을 인쇄하면 동네방네 소문내는 꼴과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사람이 없을 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프린터기가 문제없이 작동하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최지훈은 귄선호의 이메일로 파일을 송부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인터넷 속도가 느려터진 바람에, 파일을 올리는 것도 하세월이었다.

    어쨌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출근해 자료들을 뽑고 있으니 마음은 편했다.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으니까···.’

    콧노래를 흥얼거린 최지훈은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 의자에 몸을 묻었다.

    여유롭게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는 순간.

    - 덜컥!

    갑자기 사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푸웁?!”

    뜨거운 커피가 목에 걸려 한참 동안 기침을 해댄 최지훈이 사무실의 문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였다.

    “쿨럭! 아오, 누구···?”

    이내 문 앞의 인물과 눈이 마주친 최지훈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사, 사장님!”

    최지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탕비실로 향하는 길목으로 뛰쳐나왔다.

    “오! 최 대리님. 황금 같은 일요일에 웬일입니까?”

    “아, 그, 그게.”

    - 철커덕. 즈즈즉!

    오늘따라 프린터가 더욱 요란하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박주혁은 최지훈에게서 시선을 돌려 탕비실 쪽을 바라봤다.

    “어디, 제안서 제출하려나 보죠?”

    “예?”

    최지훈은 굳은 표정으로 박주혁을 쳐다봤다.

    ‘씨발. 어쩌지?’

    안절부절못하는 최지훈을 뒤로하고 박주혁은 탕비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지훈은 부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자신의 모니터를 바라봤는데 업로드되고 파일이 눈에 들어왔다.

    ‘제기랄. 제기랄!’

    그는 황급히 전송을 취소하고 봄바디오 관련한 업무 자료를 화면에 띄우고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개를 떨궜다.

    ‘망했어.’

    최지훈의 눈이 초점을 잃고 갈팡질팡했다.

    박주혁은 탕비실에 들어가 맥슴 커피를 뜯어 컵에 부으며 프린터가 토해내는 문서를 힐끔 쳐다봤다.

    회사 이름, 담당자 이름, 견적 건수, 매출액, 이메일, 연락처 등이 빽빽이 쓰여있는 고객 리스트였다.

    ‘역시. 움직일 줄 알았다. 권선호.’

    박주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들고 탕비실에서 나와 최지훈을 힐끔 쳐다봤다.

    고개를 떨구고 있는 최지훈은 망연자실(茫然自失)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박주혁이 최대리를 조용히 불렀다.

    “최 대리님.”

    “예! 예?”

    “잠깐 들어오세요. 커피나 한잔하게.”

    “아, 알겠습니다.”

    최지훈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퍽 재미있었다.

    박주혁이 사장실로 들어간 후 최지훈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터덜터덜 사장실로 향했다.

    ‘뭐라고 하지?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거냐고! 씨발. 권 부장. 이 개새끼!’

    - 철커덕. 즈즈즉.

    오늘따라 유독 프린터의 소리가 컸다.

    최지훈이 사장실로 들어오자, 박주혁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주말에도 나와서 봄바디오를 챙기는 겁니까? 고생이 많군요.”

    “예? 아, 예.”

    풀이 잔뜩 죽은 최지훈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마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하리라.

    박주혁은 최지훈의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렸다.

    아무런 말 없이.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커피를 홀짝거리는 소리만이 공허함을 채웠다.

    - 호록.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최지훈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분명 박주혁이 최지훈의 상태를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무런 말이 없었다.

    최지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24살 어린 사장이라고 살짝 깔보고 있었는데, 직접 마주하니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박주혁의 눈 빛에 속내까지 모두 까발려지는 느낌이었다.

    사회의 쓴맛 단맛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선 나올 수 없는 눈빛이었다.

    결코 24살에 나올 수 있는 내공이 아니었다.

    능구렁이도 이런 능구렁이가 없었다.

    박주혁은 최지훈의 목을 꽉 틀어쥐고 숨이 끊겨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지훈이 결국 압박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사, 사장님.”

    “음?”

    커피를 입에 가져가며 박주혁은 눈을 내리깔아 최지훈을 바라봤다.

    온화한듯했지만, 먹잇감을 마주하는 뱀의 눈이었고 최지훈은 바들바들 떨고 있는 토끼였다.

    “오늘은 무슨 일로···?”

    “아아. 심영찬씨가 전산 관리까지 맡기기 미안해서 내가 직접 도와주려고 왔습니다.”

    “예? 전산 관리를 사장님께서 직접이요?”

    “왜요? 이상한가요?”

    “아, 아니요.”

    박주혁이 영어영문학과 컴퓨터 공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어설프게 배워서 전산화가 뭔지도 모르면서 설레발친다고 권 부장이 그렇게 험담을 했었다.

    이게 어딜 봐서 설레발치는 눈빛인가?

    최지훈은 몸을 움찔거리며 앞에 있는 커피를 마셨다.

    박주혁은 커피를 마시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에 제안하려는 겁니까?”

    “예? 아, 그게···.”

    최지훈이 우물거리며 말을 흐리자, 박주혁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힘주어 말했다.

    “한번 가져와 보세요. 그렇게 자신 없어 하지 말고 제가 한번 보죠.”

    “예!?”

    - 닥닥닥.

    턱이 눈치도 없이 달달 떨려 이빨이 부딪히는 것 같았다.

    최지훈은 떨리는 턱을 손으로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탕비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리도 무거울지 몰랐다.

    - 철커덕. 즈즈즉.

    프린터는 눈치도 없이 아직도 문서를 뱉어내고 있었다.

    ‘빼박이다. 사직서 써야겠네. 후.’

    최지훈은 인쇄물을 챙겨 사장실로 향했다.

    생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할퀴고 무는 법이다.

    ‘어차피 권 부장이 회사 차리면 데리고 간다고 했으니까. 차라리 총대를 메자.’

    마음을 고쳐먹자 눈빛이 살아났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최지훈은 사장실에 들어서 서류를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박주혁은 서류를 받아 읽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지훈은 박주혁의 반응을 보자마자 허리를 숙이며 입을 달싹였다.

    “퇴···.”

    그때 박주혁이 환하게 미소지으며 최지훈의 말을 잘랐다.

    “최 대리. 조금 감탄했습니다.”

    “사···. 예?”

    최지훈이 어안이 벙벙하여 눈을 끔벅였다.

    파인랭스의 고객 리스트 전부가 손에 들려있는데 감탄한다니?

    대체, 박주혁 이 새끼는 뭐란 말인가.

    ‘미친놈인가?’

    박주혁은 최지훈의 의아한 눈빛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영업팀이 전산화에 비협조적이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뒤에서 자료를 만들고 있었군요.”

    “!”

    최지훈은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 맞습니다. 당연히 영업팀도 전산화에 동참해야죠. 하.하.하.”

    박주혁은 최지훈에게서 시선을 돌려 문서를 한장 한장 넘겼다.

    “이야, 이렇게 디테일하게 정리하고 있을 줄이야. 좀 놀랍군요.”

    “저, 전산화에 모든 정보가 들어가야 한다고 해, 했습니다. 시, 심영찬씨가요.”

    박주혁이 자신의 떨림을 눈치채지 못하길 간절히 빌며 말했지만, 어쩔 수 없이 말을 더듬었다.

    심하게 떨고 있는 최지훈을 슬쩍 바라보던 박주혁이 서류를 들고 일어나 자신의 책상 위에 툭 하고 던져놓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영업은 사기성이 짙어야 한다는데. 최지훈 너는 아직 멀었구나. 잘도 이런 녀석이랑 일하겠습니다. 권선호씨.’

    박주혁은 최지훈을 돌아보며 웃었다.

    “뭘 그렇게 긴장한 겁니까? 아무리 사장이라지만 제가 더 어리잖습니까?”

    “그, 그래도 사장님이십니다.”

    박주혁은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나머지 자료도 다 인쇄되면 가져오세요. 그리고 퇴근하세요.”

    “네. 예? 아, 아직 일이···.”

    변명하려 했지만, 모든 말이 다 궁색할 것 같아 최지훈은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전산 관리 차원에서 제가 컴퓨터를 다 살펴볼 계획이거든요. 영업팀부터 확인할 생각인데. 급한 일 아니면 월요일에 하세요.”

    “아···.”

    최지훈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이미 겨드랑이며 등이며 땀으로 축축했다.

    “알겠습니다···.”

    최지훈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답하고는 부리나케 자리로 돌아갔다.

    권 부장이 빼내라고 했던 자료들을 빨리 삭제 해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파일들을 클릭하고 삭제를 눌렀다.

    팝업 멘트를 확인하지도 않고 최지훈은 OK를 누른 후 짐을 챙겨 서둘러 일어났다.

    몸을 돌렸는데 박주혁이 벌써 영업팀 쪽으로 다가와 있었다.

    “아, 최 대리님 컴퓨터 끄지 말고 가세요. 어차피 켜야 하거든요.”

    “예, 예.”

    최지훈은 종료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멈칫했다.

    ‘어차피 다 지웠으니까.’

    “사장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요. 좋은 주말 되세요.”

    최지훈이 그렇게 헐레벌떡 사무실을 나간 후, 박주혁은 옅은 미소와 함께 최지훈의 자리에 앉았다.

    “뭘 그렇게 허둥지둥거리셨을까?”

    박주혁은 최지훈이 흔적을 없애려고 한 파일들을 복구했다.

    파일들을 확인한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이고, 꼼꼼도 하셔라. 이대로 전산화하면 딱 맞겠네.”

    박주혁은 자신의 메일로 파일들을 포워딩시켰다.

    시간이 좀 걸릴 일이기에 다른 컴퓨터들의 소프트웨어를 확인하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최지훈을 향하던 너그러운 박주혁의 미소는 어느새 섬뜩하게 변해있었다.

    ‘이대로 가시려고 했습니까? 아직 보이지 않은 카드들도 남았을 텐데 이러면 섭섭하죠.’

    #

    - 지이잉.

    권선호는 가족들과 점심을 먹다 말고 허리춤에서 떨리는 진동을 확인하기 위해 숟가락을 내려놨다.

    ‘최 대리? 한참 자료를 빼야 할 시간에···. 왜?’

    권선호가 미간을 좁히며 삐삐를 확인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송이가 권선호의 눈치를 살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뭐가 입에 안 맞아요?”

    요즘 들어 부쩍 입이 권선호의 입이 짧아져 걱정하던 참이었다.

    “아니, 호출이 와서, 잠깐만.”

    이송이는 권선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지만, 금세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엄마! 밥 더 주떼요.”

    “엄마! 난 무우울.”

    “응 그래그래.”

    남편을 걱정할 짬도 없이 이송이는 어린 쌍둥이를 챙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선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쌍둥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고는 거실 쇼파에 앉아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떨리는 최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 부장님. 죄송합니다. 오늘 박주혁 사장이 갑자기 출근하는 바람에···. 자료가 유출됐지만, 박 사장은 전산화를 위해 자료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주말에 쉬시는데···.”

    권선호는 최지훈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놨다.

    “젠장!”

    권선호가 버럭하며 쇼파를 내리쳤는데 TV 리모컨이 눌리며 티비가 켜졌다.

    티비에서 마침 뉴스가 전파를 타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신청을 지지한다며 외무성 관리들이 밝혔습니다. OECD 사무총장은 한국의 경제 자유화 진전 정도가 가입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 팟!

    권선호가 신경질적으로 티비를 끄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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