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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8화 (8/136)
  • 008화 일요일에도 출근해?

    전산화 구상도를 그린 후 몸을 돌린 박주혁은 심영찬의 이글거리는 눈을 마주했다.

    98년 처음 만났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다.

    결국은 파인랭스와 이어질 운명이었을까?

    박주혁이 눈을 살짝 크게 떴는데, 심영찬이 흥분한 어투로 말했다.

    “사장님. 제가 개발하고 싶습니다!”

    ‘멘트까지···. 너도 한결같구나.’

    박주혁은 미소지으며 심영찬에게 되물었다.

    “구상도만으로 어떤 프로그램인지 이해가 되나요?”

    “웹 기반 ERP 아닌가요?”

    WBE(Web Base ERP), SEP나 오리클처럼 자체 소프트웨어가 아닌 웹 베이스라는 점이 파인랭스 시스템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나 크룸같은 웹 브라우저로 바로 파인랭스 시스템에 접속이 가능한 것이다.

    대기업처럼 복잡한 업무 프로세스가 아니라 가능한 것이었지만, 90년대 중반 웹 베이스로 개발한다는 자체만으로도 획기적이었다.

    향후 웹에서 표준화 바람이 불며 등장한 HTML 5에 맞춰 다시 개발하는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웹 베이스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잘한 선택이었다.

    스마트폰에서도 접속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업무효율 면에서 확실히 좋았다.

    파인랭스의 큰 장점이 빛을 발한 것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비록 직원이 3명 밖에 없었지만··· 전 직원이 언택트 업무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시스템이다.

    미래가 떠오르니 씁쓸했지만, 미래는 바뀔 것이다.

    “확실히 웹 베이스 요소가 많긴 합니다. 개발할 수 있겠습니까?”

    심영찬은 박주혁의 물음에 대답하지도 않은 채, 뚫어지라 구상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혼자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박주혁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렸다.

    구상도를 한참을 바라보던 심영찬의 시선이 다시 박주혁에게 돌아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앗! 죄, 죄송합니다. 어떻게 개발해야 하는지 생각한다는 게 그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슬쩍 웃는 박주혁과 달리, 심영찬은 얼굴까지 붉히며 연신 사과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심영찬이 파인랭스에 올라탔다.

    #

    심영찬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일주일에 이틀은 야간 근무를 하는 조건으로 파인랭스에 합류했다.

    학업과 병행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황을 배려해준 박주혁에게, 심영찬은 오히려 고마워했다.

    그리고 솔직히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사무실에 혼자 개발하는 것이 더 좋았다.

    정상 출근할 때면 직원들이 어찌나 불러대는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분명 개발을 하기 위해 입사했건만, 직원들은 심영찬을 컴퓨터 관리직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키보드 선이 빠진 것조차 심영찬에게 쪼르르 달려와 고쳐달라고 땡깡을 부리는 직원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상하게 심영찬이 입사한 후 컴퓨터들이 더 말썽을 부리는 것 같을 정도였으니.

    그렇게 한 달 후.

    심영찬이 파인랭스 시스템의 뼈대를 만들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로 하나의 공문이 도착했다.

    우편을 정리하던 직원이 SW라는 문구가 쓰여있는 등기우편을 심영찬에게 전달했다.

    공문을 받아든 심영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더니 서둘러 사장실로 향했다.

    “저, 사장님.”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뛰어 들어온 심영찬.

    “무슨 일입니까?”

    “이 공문···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뭔데 그래요?”

    박주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심영찬이 내민 대봉투를 받아들었다.

    겉면에 쓰여있는 문구.

    [SW 저작권 준수 여부 확인 요청의 건]

    ‘이건···.’

    불법 소프트웨어 단속.

    90년대 후반, 소프트웨어 제작사의 권한을 위임받은 법무법인이 기업들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송부한 적이 있다.

    소프트웨어 제작사의 매출 증대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였기 때문에, 소프트웨어 업체들도 양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들었었다.

    심지어 돈 냄새를 맡은 정부까지도 벌금을 물렸다.

    소프트웨어 업체의 매출 증대, 법무법인은 그에 대한 수수료, 그리고 정부는 세수를 확보하는 윈윈 전략이었다.

    덕분에 SW 라이센스 확보를 위해 거금을 지출해야만 했다.

    정부가 USB 하나 덜렁 들고 와서 컴퓨터에 꽂는 순간, 잠깐이라도 사용한 SW 목록이 좌르륵 출력되는데 할 말이 없었다.

    박주혁 역시 3천만 원이라는 벌금을 지출한 기억이 있다.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공론화도 되지 않은 불법 소프트웨어 단속 공문이, 대기업도 아닌 파인랭스 같은 소기업에 왔다는 것은···.

    박주혁이 턱을 매만지고 있을 때 심영찬이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 누군가 밀고한 것 같습니다.”

    꼭 내부 고발자라고 볼 수는 없었다.

    단속이 한창 심할 때는 경쟁사에서도 무차별적으로 신고를 해서 업무를 방해하기도 했으니까.

    저작권 준수 여부 확인 요청이라는 공문을 받게 되면 대체로 당황하기 마련이다.

    많은 회사들은 라이센스 구매를 서두르거나, 컴퓨터를 포맷하는 강수를 뒀다.

    심지어는 회사 문을 걸어 잠근 채 근무하는 회사도 있을 정도였다.

    벌금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90년대 후반에 대대적인 단속이 이뤄졌을 때이고, 95년도에 굳이 이런 작은 기업에 SW 점검을 하겠다는 것은···.

    내부 고발자의 소행일 확률이 높았다.

    심증뿐이지만.

    어쨌든 대책은 세워야 했다.

    단속되어 라이센스를 구매하게 되면 귀신같이 정보를 입수한 소프트웨어 공급책들이 값을 올린다.

    박주혁은 미간을 좁힌 채 심영찬에게 지시를 내렸다.

    “영찬 씨.”

    “네, 대표님.”

    “전 직원에게 개인 PC의 ID 및 PW를 오늘 퇴근 전까지 제출하라고 하세요.”

    “예.”

    개발 업무만으로도 바쁠 심영찬에게 전산 관리까지 맡겨야 한다는 것이 찜찜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심영찬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주혁은 사장실을 빠져나가려는 심영찬을 불러세웠다.

    “불법 소프트웨어라는 말은 하지 말고 ID와 PW만 제출하라 하세요. 전산 관리를 위해서라고 공지하고.”

    “알겠습니다.”

    심영찬은 박주혁의 의미하는 바를 얼핏 눈치챘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장실을 나갔다.

    박주혁은 의자에 몸을 묻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시스템 온. 검색, 소프트웨어 라이센스.”

    - 검색 완료.

    - 소프트웨어 라이센스 문서는 보안문서로 열람이 불가합니다.

    - 보안문서를 열람하시려면 더 높은 등급이 필요합니다.

    경고 메시지를 무시하고 스크롤을 내리니 소프트웨어 라이센스라는 엑셀 파일이 목록에 나타났다.

    튼튼한 자물쇠 이미지가 확장자명 옆에 떡하니 붙어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문서의 작성 날짜였다.

    ‘99년 2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을 해봤지만, 역시나 99년도의 일이었었다.

    당시, 벌금 3천과 라이센스 구매비용 2천만 원을 막아내느라 얼마나 진땀을 흘렸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슬슬 기울기 시작했던 파인랭스에서 5천만 원이라는 거금이 덜컥 나올 리 없었다.

    박주혁은 자신의 마이너스 통장은 물론 보험 약관 대출까지 죄다 끌어모아 밀어 넣었었다.

    급전을 마련하다 보니 파인랭스를 제대로 챙길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파인랭스가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에서, 권선호는 여유롭게 고객들을 자신의 회사로 빼돌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박주혁의 등줄기를 타고 털들이 바짝 일어났다.

    ‘잠깐, 그럼 혹시?’

    박주혁은 데자뷔 같은 느낌을 받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권선호가 불법 소프트웨어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것은···.

    어쩌면 퇴사 시기를 앞당기려는 시그널이자, 회사에 혼란을 일으켜 뭔가를 준비하려는 속셈인지도 몰랐다.

    ‘정보 유출을 막으려고 전산화를 앞당겼더니,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비장의 카드라 생각했던 봄바디오도 뺏기게 생긴 마당에, 전산화로 인해 정보까지 통제되니 마음이 조급해졌으리라.

    정보가 이미 유출되었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

    박주혁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故 박찬희 사장은 ‘정직, 신뢰, 존중’이라는 모토를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 비싼 NS 창문 소프트웨어 3.1 라이센스도 매번 구매했었다.

    불법 소프트웨어가 판치는 90년 초반에도 말이다.

    ‘이번엔 자충수다. 권선호.’

    #

    권선호는 심영찬이 매우 불편했다.

    사람이 불편하다기보다는, 그의 업무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사 첫날부터 밥 먹듯 야근을 하고 있으니 몰래 정보를 빼내려는 권선호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90년 중반에는 USB 메모리라는 이동 저장장치가 없었다.

    대신 플로피 디스크와 CD가 대중적인 저장매체였는데 플로피 디스크는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이 적었고 CD는 CD-RW(Compact disk Rewritable) 기능이 있는 CD-ROM이 있어야만 저장할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CD-RW는 가격이 좀 있었고 그로 인해 지정된 PC에만 설치되어 있었다.

    각 팀장급 PC에만 설치되어 있었는데 유독 영업팀에는 읽기만 가능한 CD-ROM이 설치되어 있었다.

    물론,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도 제외되어 있었고.

    故 박찬희 사장도 영업팀의 기밀 정보 유출을 걱정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가져갈 수 있다.

    프린트하거나 자신의 이메일로 파일을 보내면 되니까.

    이메일이 가장 빠른 방법일 것 같지만, 속도가 느려 노출될 우려가 있었다.

    차라리 인쇄하는 것이 빠르고 안전했다.

    ‘박주혁, 그 되바라진 놈이 전산화를 공표하지만 않았어도···.’

    개발에 시간이 걸리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박주혁이 이렇게 일을 밀어붙일 줄 누가 알았겠나?

    권선호의 주도하에 영업팀은 심영찬에게 비협조적으로 굴었다.

    ‘미리 조금씩 빼내라고 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내부 혼란을 유도하기 위해, 관련 없는 사람을 사주해 불법 소프트웨어 신고도 했다.

    그러나 좀처럼 완벽한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다.

    ‘이 새끼들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신고가 들어갔으면 회사에 한바탕 난리가 나야 정상인데 신고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회사는 태평했다.

    권선호가 정부의 늑장 대처에 혀를 차고 있는데, 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심영찬이 보낸 전체 메일이었다.

    [전산 관리를 위한 요청 사항.]

    제목을 본 권선호의 눈빛이 번뜩였다.

    ‘드디어···.’

    메일을 확인하자마자 권선호는 옆에 앉아 있는 최 대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최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권선호는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최지훈은 재빨리 시선을 옮겨 자신의 모니터를 확인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권선호를 빤히 바라봤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녀석이라 봄바디오도 맡겼는데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최 대리.”

    “예. 부장님.”

    “이 메일 보고 드는 생각 없어?”

    “...”

    최지훈의 긴 침묵에 권선호의 미간이 잠깐 꿈틀했다가, 다시 펴졌다.

    ‘어휴, 이런 멍청이들을 데리고 뭘 해보겠다고···.’

    권선호는 목을 빼고 개발팀 쪽을 한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저 친구 주말에도 근무하는지 확인해 봐.”

    최지훈도 권선호를 따라 고개를 돌렸는데, 마침 박주혁이 문을 열고 나왔다.

    직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한 박주혁이 권선호와 최지훈에게 다가왔다.

    “영업팀.”

    “예, 사장님.”

    “퇴근 안 하세요?”

    “아, 예.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박주혁은 고개를 푹 숙이는 권선호와 영업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권선호는 최지훈을 쳐다보며 눈짓을 했고 최지훈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시계는 어느덧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권선호가 시계를 보고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서둘러 짐을 챙겨 일어났다.

    그러자 최지훈이 권선호를 올려보며 말했다.

    “들어가세요?”

    권선호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최지훈에게 조용히 말했다.

    “저 녀석 일정 확인하고 가능하면 다음 주에는 받아봤으면 좋겠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권선호는 최지훈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최지훈은 심영찬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렸지만, 오늘도 야근할 생각인지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녁 8시.

    직원들 대부분이 진작에 퇴근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참다못한 최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심영찬에게 다가갔다.

    “영찬 씨.”

    “아, 대리님.”

    “오늘도 바쁜가 봐?”

    “하하, 일이 좀 많네요. 대리님께서는 퇴근 안 하십니까?”

    “신입사원만 남겨놓고 갈 수가 있나?”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최지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심영찬에게 물었다.

    “혹시 일요일에도 출근해?”

    “일요일이요? 에이, 일주일에 한 번 쉬는 건데 그땐 쉬어야죠.”

    “그래. 하루 정도는 쉬어줘야 일주일을 버티지. 매일 같이 야근하길래 주말도 없이 일하나 싶어서 물어봤어. 적당히 일하고 들어가.”

    “네, 대리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최지훈은 활짝 웃으며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심영찬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물어보고 퇴근하는 건데.

    속으로 툴툴거렸지만, 사무실을 나서는 최지훈의 발걸음은 상당히 가벼웠다.

    최지훈은 신촌역으로 향하다 말고 근처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삐삐호출은 1번, 음성 녹음은 2번을 눌러주세요.]

    “부장님. 최지훈입니다. 이번 주 일요일에 사무실 빕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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