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7화 (7/136)
  • 007화 사회는 실력으로 승부하는 곳이죠.

    권선호와 번역부 팀장들이 굳은 표정으로 사장실을 빠져나간 후 박영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박주혁은 화이트보드에 적힌 내용을 지우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박영희는 상체를 90도로 꺾어 정중히 인사를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박주혁의 눈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뭐가 말입니까?”

    박영희는 故 박찬희 사장의 아들인 박주혁이 파인랭스를 잘 이끌 수 있을지 염려하고 있었다.

    혹 박주혁이 아직 회사를 경영할 상황이 아니라면, 본인이 어떻게든 끌고 가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던 터다.

    그런데 막상 박주혁은 너무도 늠름하게 회사 조직을 장악하고 이끌었고 심지어 아버지의 카리스마도 빼닮아 직원들을 흔들고 있었다.

    가장 걱정했던 권선호와의 알력 싸움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에 박영희는 안도했고 또 감사했다.

    돌아가신 박찬희 사장님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치는 박주혁을 바라보며 박영희는 빙긋 웃더니 들고 있던 수첩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 박주혁에게 건넸다.

    박주혁은 종이를 받으며 박영희를 쳐다봤다.

    “전산화에 참여할 수 있는 선수들의 이력서입니다. 믿을 수 있는 녀석들만 추렸습니다.”

    “아! 박 팀장님, 고맙습니다.”

    박주혁이 서둘러 이력서를 펼치며 자신의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박영희는 박주혁의 등에 대고 박영희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곤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박주혁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이력서를 재빨리 넘겼다.

    “심영찬···.”

    파인랭스 개발팀을 이끌었던 의리파 심영찬의 이력서를 찾아 종이를 넘기던 박주혁이 손이 멈췄다.

    “찾았다.”

    박주혁은 미소 지으며 심영찬의 이력서를 뽑아냈다.

    이력서에 붙어 있는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의 반명함판 사진을 보니 확실했다.

    박주혁은 이력서를 더 보지도 않고, 수화기를 들었다.

    “파인랭스 박영희 과장입니다.”

    “박 팀장. 사장실로 들어오세요.”

    회의할 때마다 늦던 박영희였지만, 유독 사장실 호출에는 칼 같았다.

    “사장님 부르셨습니까?”

    “아, 앉으세요.”

    박주혁은 심영찬의 이력서를 박영희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 친구를 뽑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벌써 다 보셨어요?”

    박영희는 눈을 크게 뜨며 박주혁을 바라보다 이력서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박주혁을 올려봤다.

    “이 친구를 채용하시겠다는 겁니까?”

    거의 티가 나지 않았지만, 박주혁은 박영희의 반응이 평소와 살짝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그러지? 심영찬과 박영희 사이에 문제가 있거나 하진 않았었는데?’

    문제가 아니라 되레 호흡이 너무 좋아 탈이라면 탈이었다.

    박주혁은 박영희를 빤히 쳐다봤다.

    박영희는 박주혁의 궁금증 어린 눈빛을 마주하자, 헛기침했다.

    필경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박주혁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박 팀장. 심영찬 지원자, 아는 사람입니까?”

    “아, 그게···.”

    박주혁의 뇌리에 불현듯 두 사람의 공통점이 떠올랐다.

    ‘햇빛보육원!’

    박영희와 심영찬은 같은 보육원 출신이었다.

    이제야 박영희가 표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묘한 감정.

    ‘이력서를 제일 앞에 놨어야지.’

    하지만 그녀의 깊은 속내를 알기에 박주혁은 그저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박주혁이 사심 없이 회사를 위한 인재를 채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리라.

    그리고 박주혁 역시 괜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 대한 배려의 일종이었다.

    애사심이 투철한 박영희가 회사에 계속 남아준다면 엄청난 힘이 될 것이다.

    파인랭스가 성장해서 여성들이 경력단절 없이 일할 수 있는 회사라면 가능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박영희가 마음을 추스르고 입을 뗐다.

    “이 친구도 개발자로서는 훌륭합니다. 저와 프로그램 대회에서 입상을 같이했었죠.”

    “역시. 박 팀장이 그렇게 말하니 믿음이 가는군요. 심영찬과 면담을 잡아야겠습니다.”

    “저, 사장님. 그런데···.”

    박영희가 말끝을 흐리자, 박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영희를 쳐다봤다.

    “심영찬이 아직 졸업 전입니다.”

    “음?”

    박주혁은 박영희가 들고 있던 이력서를 낚아채고는 이력서를 꼼꼼히 읽었다.

    ‘이런, 정말이다. 졸업하려면 1년이나 남았어.’

    박주혁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박영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졸업 예정자니까 취업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학교 수업과 병행을 해야 한다는 점이 걱정되네요.”

    이번 생에는 심영찬을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다짐했지만, 그의 젊은 시기를 파인랭스에 투자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원래대로라면 2년 뒤에 입사하는 것이 정상적인 역사의 흐름일 것이다.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했어야 했나?’

    박주혁이 얼굴을 굳히며 턱을 쓰다듬는데 박영희가 말했다.

    “우선, 한번 만나보시죠? 이력서를 줬을 때는 본인도 생각이 있는 것이니까요.”

    “흠. 그러는 것이 좋겠군요.”

    “제가 직접 얘기할까요?”

    “아니요. 제가 하죠.”

    박영희가 자리를 떠난 후, 박주혁은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 뚜르르. 뚜르르.

    오늘따라 유독 신호음 소리가 거슬렸다.

    전화벨이 한참을 울렸지만, 심영찬은 받지 않았다.

    박주혁은 다음 연락처인 페이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삐삐호출은 1번, 음성 녹음은 2번을 눌러주세요.]

    아련한 추억 속의 음성이 박주혁을 반기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랬었지.’

    박주혁은 음성 녹음을 선택했고 곧 녹음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 삐!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의 박주혁이라고 합니다. 개발팀 채용 관련하여 면접을 진행코자 하니 02-766-0582로 연락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웃음이 피식 나왔다.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페이저(Pager), 흔히 삐삐라고 불린 무선호출기다.

    삐삐가 대중적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었다.

    박주혁도 대학생 시절 삐삐로 친구들과 소식을 주고받았고, 연애도 했었다.

    다들 그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나?

    공중전화로 주고받는 애틋한 사랑의 메시지들.

    ‘사랑해가 486이던가?’

    잠시 옛 생각에 빠진 박주혁이 다시 한번 슬쩍 웃었다.

    #

    점심 식사를 마치고 봄바디오 전담팀과 회의를 마쳤음에도 심영찬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90년대에는 이렇듯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2020년의 미래 기술을 경험했던 박주혁으로서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삐삐는 확인한 걸까? 칵톡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확인이라도 됐었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때마침 사장실의 키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 띠리리리.

    박주혁은 망설이지 않고 수화기를 들었다.

    “네. 파인랭스의 박주혁 대표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심영찬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심영찬씨. 이번에 저희 개발팀에 지원하셨던데 면접을 봤으면 합니다. 시간 언제 괜찮으십니까?”

    박주혁은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갔다.

    심영찬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도 괜찮습니다.”

    “그럼 오늘 5시에 사무실로 오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위치는···.”

    “알고 있습니다. 조금 뒤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무실을 이미 알고 있다니, 아마도 박영희가 종종 불러내 점심을 사주곤 했을 것이라 추측됐다.

    같은 보육원 출신이니만큼, 꽤 아끼는 동생임이 틀림없었다.

    ‘오랜만에 보겠군.’

    박주혁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

    전생에 그 역시 심영찬을 굉장히 아꼈기 때문이다.

    심영찬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파인랭스를 글로벌 번역회사에 인수인계할 때였다.

    시스템도 인수인계해야 했기에 심영찬도 마지못해 참석했었다.

    그때 심영찬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가득했던 3 허.

    허망, 허무, 허탈.

    자신의 심리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심영찬은 박주혁을 위로했었다.

    언젠가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때도 요청하면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말하던 그의 위로가 참 고마웠었다.

    ‘그게 마지막이었지?’

    하지만, 그 후로 박주혁은 심영찬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박주혁은 스스로 굴을 파고 들어가 그 속에 꼭꼭 숨었다.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면서부터는 아예 모든 인맥을 끊어버렸다.

    그렇게 박주혁은 사회에서 잊혀갔다.

    ‘이번 생은 다르지.’

    심영찬을 만나려면 2시간이나 남았지만, 왠지 모르게 설렜다.

    박주혁은 심영찬을 기다리면서 아버지의 잠긴 서랍을 열어 파인랭스 시스템의 시초가 되었던 아버지의 구상도를 펼쳤다.

    파인랭스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기본 뼈대였지만, 부족한 점은 있었다.

    아직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없는 기능들이 있다는 것.

    ‘천천히 하나씩 살을 붙여나가면 된다. 그래도 기본적인 기능은 다 있으니까.’

    구상도를 쓱 훑어보던 박주혁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최종 구상도를 내가 시스템에 올렸었는데?’

    “시스템 온. 검색, 시스템 구상도.”

    - 검색 완료.

    - 1건의 시스템 구상도 관련 자료를 찾았지만, 보안문서로 열람이 불가합니다.

    - 보안문서를 열람하시려면 더 높은 등급이 필요합니다.

    ‘이런. 보안문서로 등록했었군. 하긴, 중요한 문서긴 하니까.’

    박주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시스템 오프’를 외쳤다.

    그의 눈이 열의로 번뜩였다.

    “파인랭스를 어서 성장시켜야겠어.”

    박주혁이 아버지가 구상한 시스템에 추가될 것, 개선 사항들을 기억을 되짚어가며 정리하고 있을 때, 누군가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 똑똑.

    박주혁은 재빨리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4시 50분.

    24살.

    자신과 동갑인 심영찬은 박영희와 다르게 매번 일찍 도착한다.

    뭐, 물론 박영희도 개인적으로 호출하면 바로 오긴 하지만···.

    “들어오세요.”

    “사장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번에 봄바디오 담당 PM으로 지정된 최지훈 대리가 문을 열었고, 심영찬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앳된 모습의 심영찬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반갑습니다. 앉으세요.”

    “예. 감사합니다.”

    “커피? 녹차?”

    “물 부탁드립니다.”

    “최 대리, 물이랑 커피 한 잔씩 좀 부탁할게요.”

    “예, 사장님.”

    박주혁은 최 대리가 가지고 온 커피를 한잔 마시며 심영찬을 바라봤다.

    긴장했는지 그의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긴장 푸세요.”

    박주혁의 말에 심영찬은 물 한 잔을 들이켜고 짧은 한숨을 내뱉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심영찬이라고 합니다.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순박하면서도 패기가 넘치는 심영찬의 모습에 박주혁은 미소가 절로 나왔다.

    몇 년 후에 만날 심영찬은 좀 달랐지만, 지금 모습도 싫지 않았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심영찬 씨. 개발 능력은 이미 검증된 것 같고. 저희가 개발할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시겠습니까?”

    “예? 아, 뭐 가족 관계나 다른 것은 안 물어보시나요?”

    뭔가 준비한 것이 많아 보였지만, 박주혁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미 다 아니까.

    “사회는 실력으로 승부하는 곳이죠. 심영찬 씨는 본인의 개발 능력을 의심하십니까?”

    “예? 아, 아닙니다. 개발은 자신 있습니다.”

    “좋군요. 저희 쪽 구상도를 들어보시고 저희와 함께할지를 고민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심영찬이 우렁차게 대답했고 박주혁은 씩 웃으며 화이트보드에 파인랭스 시스템의 기초 구상도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보드마카의 끝을 바라보는 심영찬의 눈이 점점 커지며 빛났다.

    박주혁은 그림에 열중하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심영찬의 눈에 이채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빛은 타는 듯한 열의로 가득 찼다.

    ‘이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