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화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출근 첫날부터 뭔 술을 이렇게 먹었어?”
“죄송합니다.”
박주혁은 최효정 여사의 잔소리로 아침을 열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서 자연스럽게 미간을 찡그리게 됐지만, 어머니가 이렇게 옆에 살아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침대를 정리하고 일어난 박주혁은 북엇국을 끓이는 최효정에게 다가가 뒤에서 가만히 끌어안았다.
“우리 아들 술이 덜 깼구나? 다 큰 녀석이 징그럽게.”
핀잔 섞인 목소리였지만, 가만히 끌어안는 아들의 품이 싫지는 않았다.
최효정은 가만히 박주혁의 팔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말했다.
“어서 씻고 준비하거라.”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최효정을 향해 그간 못했던 말을 툭 뱉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한때는 아버지를 따라가신 어머니를 원망했었다.
왜 이 험한 세상에 혼자 두고 갔냐고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모든 원망은 부모님께 잘하지 못한 본인에 대한 자책이었다.
더 안아드릴걸, 사랑한다고 말할걸, 함께 시간을 더 보낼걸···.
후회한들 이미 늦어 버린 일이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분들이란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소주를 들이켜며 얼마나 울었던가?
하지만, 눈앞에서 어머니가 북엇국을 끓이고 계셨다.
아버지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신 분이 아버지라고 박주혁은 생각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칼을 털며 화장실을 나오니, 최효정이 아침상을 차려놓았다.
맛있는 북엇국 냄새가 위를 자극했다.
박주혁은 젖은 수건을 목에 두르며 식탁에 앉았다.
“어머, 얘가? 젖은 수건으로 그럼 감기에 걸려. 이리 내.”
최효정은 박주혁의 목에 걸린 젖은 수건을 빼앗아 세탁실로 향했다.
박주혁은 순간 민망해져 얼굴을 붉혔다.
가족들을 미국으로 보내고 홀로 지내며 생긴 습관 중 하나였다.
젖은 수건을 목에 두르고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하던···.
‘이런, 나쁜 습관이 나오지 않게 조심해야겠는걸?’
최효정이 세탁실에 나오며 아직 숟가락을 들지 않은 박주혁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국 식는다. 어서 먹고 출근해야지.”
“어머니도 같이 드셔야죠.”
“출근하는 사람이 먼저지. 어서 들어.”
“같이 안 드시면 저 안 먹습니다?”
최효정은 피식 웃더니 박주혁의 맞은편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그제야 박주혁은 북엇국을 떠서 입에 넣어봤다.
청양고추의 알싸한 매운맛이 혀를 강렬하게 자극한 후 뜨겁고 감칠맛이 나는 국물이 혀를 코팅하듯 감쌌다.
식도를 타고 내려간 북엇국은 위를 부드럽게 감싸며 체온을 올렸다.
“크아. 너무 맛있다!”
허겁지겁 국물을 마시는데 최효정이 불쑥 박주혁을 향해 물었다.
“그렇게 맛있어?”
식도를 태울 것 같은 뜨거움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박주혁이 황급히 대답했다.
“크으으. 국물이 끝내줍니다!”
최효정은 박주혁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박주혁도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따라 웃었다.
늘 꿈꿔오던 어머니와의 아침 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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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입니다.”
박주혁은 사무실로 들어서며 큰소리로 인사했다.
출입구 바로 앞에 있는 영업팀 직원들이 박주혁을 보더니 목례를 했는데 그들의 표정이 무척 무거워 보였다.
권선호에게 한마디 들었으리라.
‘직원들에게 스트레스를 푸는 나쁜 버릇이 있군?’
어제도 이원희와 저녁을 먹는 내내 표정이 굳어있어서 스시가 다디달았었다.
안주가 좋으니 소주도 어찌나 잘 넘어가던지···.
넋을 잃은 권선호의 표정을 다시 한번 보기 위해 박주혁이 시선을 돌렸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
박주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마다 회사 생활에 루틴이 있는 법이다.
누구는 출근하자마자 커피와 함께 담배를 피우고, 또 누군가는 출근해서 큰 것을 본다.
돈 받으며 싸는 똥이 그렇게 뿌듯하다고··· 하던데?
박주혁의 루틴도 커피와 담배였지만, 이번 생은 좀 다른 루틴을 갖기로 했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서 사장실에 들어온 박주혁은 신문을 하나 들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커피 한 모금을 후루룩 마신 박주혁이 신문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초고속 인터넷망과 이동통신 2G망을 구축할 시기군.’
신문을 다 읽은 박주혁이 커피잔을 내려놓고 속삭이듯 말했다.
“시스템 온.”
- 파인랭스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 검색 조건을 말하면, 파인랭스 DB에서 불러올 수 있습니다.
- 현재 박주혁님은 사원 단계로 검색과 열람을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 사원 고유 권한으로 검색항목에 매출과 견적이 추가됩니다.
‘좋아. 그렇지 않아도 시장성 파악 때문에 매출액을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 거기다 견적서까지 볼 수 있다면···. 파인랭스가 놓쳤던 프로젝트도 파악할 수 있겠어.’
박주혁은 추가된 검색항목에 미소를 지으며 어제 확인하지 못한 철도 분야 매출의 검색을 시도했다.
“검색, 철도 매출.”
- 검색 완료.
- 철도는 건설, 토목 카테고리의 하위분류입니다.
철도 관련 프로젝트 건수: 897건
철도 관련 프로젝트 매출액: 5,070,000,000원
박주혁은 눈앞에 떠오른 정보들을 보며 흡족한 표정를 지었다.
“역시 맞았어. 천 건도 안 되는 프로젝트로 50억의 매출. 거기에 봄바디오가 추가될 테니 투자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군. 시스템 오프.”
박주혁은 밝은 표정으로 수화기를 들고 내선 번호를 눌렀다.
곧 수화기 너머로 권선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인랭스 권선호입니다.”
“아, 권 부장. 번역부와 감수팀 팀장들과 함께 사장실로 들어오세요.”
“예, 알겠습니다.”
잠시 뒤 사장실 문을 열고 권선호와 팀장들이 들어와 회의 탁자에 모두 앉았다.
박주혁은 팀장들을 훑어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권선호는 무표정했으며 번역부 팀장들은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입술이 쭉 나와 있었다.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는 사람은 박영희가 유일했다.
팀장들의 분위기를 알 것 같았던 박주혁이 쓴웃음을 삼키며 입을 뗐다.
“봄바디오트랜스포테이숀과 미팅 결과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박주혁은 말을 마치고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팀장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쳤다.
권선호의 영혼 없는 표정이 일품이었다.
“한국 지사 설립을 검토 중인 회사인데, 파인랭스가 선제적으로 번역 업무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박주혁은 말을 마치고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보고서를 꺼내 번역부 팀장 앞에 내려놨다.
번역부 팀장이 머리를 맞대고 서류를 한장 한장 넘겨보더니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박주혁은 잠시 팀장들에게 시간을 주고는 이어 말했다.
“봐서 알겠지만, 철도 관련 문서입니다.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상당한 문서가 나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번역부 팀장님들의 지대한 역할을 기대합니다.”
박주혁의 말이 끝나자 번역부 최수정 팀장이 고개를 번쩍 들며 다급히 말했다.
“사, 사장님. 마감은 언제까지입니까?”
“ASAP.”
ASAP(As Soon As Possible)로 최대한 빨리 번역해야 한다는 말을 전하자 하얗게 질려가던 얼굴들이 창백해졌다.
최수정이 다시 다급히 손을 번쩍 들었다.
박주혁은 최수정을 쳐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뭐죠?”
“지금 마감해야 할 프로젝트가···.”
최수정이 어떤 말을 할지 뻔히 보였기에 박주혁은 말을 자르며 정색했다.
“최 팀장.”
“...”
“못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죠?”
최수정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살짝 떨궜다.
그러자 평소 소심하던 번역 2부 구경숙 팀장이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장님. 지금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몇 개인지 아십니까? 자그마치 6개입니다! 더 이상의 프로젝트 추가는 번역부를 혹사하는 것입니다.”
하소연하듯 울먹이며 소리쳤지만, 박주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되레 번역부 팀장들에게 호통치듯 소리쳤다.
“구 팀장! 겨우 프로젝트 6개 진행하면서 지금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박주혁의 호통에 구경숙은 억울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사장님. 지금도 매일같이 야근합니다.”
박주혁이 권선호에게 시선을 돌리며 조금 큰 목소리로 물었다.
“번역부 현재 인원이 몇입니까?”
“1부 9명, 2부 8명 총 17명입니다.”
박주혁은 뒤편에 있는 작은 화이트보드에 숫자 17을 쓰고는 팀장들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번역사 1인이 하루에 번역할 수 있는 양이 평균 10페이지. 그럼 번역부에서 하루 170페이지, 최소로 잡아도 150페이지의 번역이 나와야 합니다. 맞습니까?”
박주혁의 날카로운 질문에 권선호가 눈썹을 꿈틀거렸고, 번역부 팀장들은 눈을 살며시 내리깔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수치상으로는···. 그렇습니다.”
“현재 러닝되는 프로젝트 6건 총 페이지가 얼마나 됩니까?”
최수정과 구경숙이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권선호를 애타게 쳐다봤다.
권선호는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한숨을 짧게 뱉고는 박주혁에게 보고했다.
“현재 큰 프로젝트 6건이 총 580페이지 정도 됩니다.”
권선호의 말을 들으며, 박주혁이 칠판에 숫자들을 적기 시작했다.
“600페이지라고 잡고, 4일이면 번역이 완료되어야 정상이군요. 프로젝트 마감은 언제입니까?”
“...”
박주혁은 여전히 화이트보드를 바라보며 팀장들의 답을 기다렸지만, 번역부 팀장들은 고개를 떨구고 입을 닫아버렸다.
답변이 없자, 박주혁은 고개를 돌려 앉아있는 팀장들을 바라봤다.
번역부 팀장들은 포식자 앞에서 발발 떨고 있는 피식자처럼 굴었다.
“마감일도 모르면서 일하십니까?”
박주혁이 살짝 짜증을 섞으며 목소리를 높이자, 그들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영업팀은 일정 공유 안 하는 겁니까?”
“정확한 일정은 확인해 봐야 합니다. 급한 프로젝트가 있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권선호가 차분히 박주혁의 질문에 답했지만, 박주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박영희가 재빨리 수첩을 뒤적이더니 또랑또랑 말했다.
“극성정보통신이 의뢰한 매뉴얼이 200페이지 4월 26일, RFP 80페이지 4월 27일, RFQ 48페이지 4월 30일···.”
박영희가 분량과 일정을 읊자 박주혁은 그제야 화이트보드로 고개를 돌리고 차례차례 써나갔다.
봄바디오 프로젝트 수주를 축하하며 모두 함께 힘내보자고 소집한 자리가 어느새 번역부를 질타하는 자리로 변하고 있었다.
박주혁이 수치를 나열해 놓고 보니 번역부에서 야근을 해가며 일할 분량이 결코 아니었다.
심지어 납품이 얼마 남지 않은 극성정보통신의 매뉴얼 같은 경우는 번역이 완료되어 감수팀에 넘어갔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직 번역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말에 박주혁은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전산화를 서둘러야 한다. 너무 비효율적이야.’
박주혁은 짧게 심호흡을 한 후 정색하며 번역부를 불렀다.
“번역부.”
“예···.”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최수정과 구경숙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감수팀이 매번 늦어지는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매번 촉박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박영희와 감수팀은 자신의 소임을 다해왔다.
단 한 번도 번역부에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말이다.
‘박영희가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나?’
번역부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라 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박주혁은 회의 테이블에 양손을 올리며 상체를 지탱한 채 말했다.
“새로운 고객을 유치했습니다. 모두 성심을 다해 업무에 임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번역부는 약속된 기일 안에 번역을 완료하는 것도 실력임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번역이 늦어지면 모든 프로세스가 늦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팀에서 번역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해줬으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도록 하세요.”
박주혁은 다시 뒤돌아 화이트보드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 탕!
번역부 팀장들이 심적으로 얼마나 위축되어 있었는지 화이트보드를 내리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영업팀과 번역부가 이 정보를 모를 리 없었겠죠. 다만, 정보들이 직관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 발생한 것이라 믿겠습니다.”
박주혁은 다시 한번 화이트보드를 내리쳤다.
“오늘 전산화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절실히 느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은 조직이 만들어 낸 비효율성이며, 이에 대한 책임은 회사에 있습니다. 전산화를 통해 비효율성을 걷어내고 오롯이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박주혁은 내친김에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전산화에 대한 쐐기를 박아넣었다.
더는 다른 소리를 못 하도록 말이다.
“영업팀은 봄바디오 전담 PM을 지정하시고 번역부도 마찬가지로 전담할 인력을 구성해 놓으세요. 오후에 전담팀과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예.”
“업무들 보세요.”
축하 겸 업무 성과를 자랑하려던 자리가 결국 살벌하게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