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화 정직, 신뢰 그리고 존중.
권선호가 제안한 방법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었지만, 이원희는 눈을 빛냈다. 밝은 표정의 이원희와 굳은 박주혁의 표정이 확연히 대치됐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
“어떠세요. 그렇게 하면 다른 번역회사의 품질도 확인하면서 지사장님이 원하시는 번역도 얻게 되는 겁니다.”
이원희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주억거렸고 박주혁은 굳은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샘플 번역.
본격적인 번역 의뢰에 앞서, 번역의 품질을 확인하기 위한 사전 과정 중 하나이다.
보통 샘플 번역은 동일한 부분을 번역하여 비교해야 품질 확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일부 몰상식한 고객이 비용 절감을 목표로 회사별로 다른 페이지를 샘플 번역 의뢰하는 경우가 있었다. 샘플 번역을 모아 짜깁기하여 사용하고 실제 번역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업계에 공공연히 퍼지게 되면서 샘플 번역은 한 장 이내로 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파인랭스도 권선호가 독립해서 나간 이후로 두 문단 이하의 샘플 번역만 진행해 주는 것으로 내규가 바뀌었다.
‘박영희가 주창했었지···. 권선호, 네가 번역업계를 흐린 미꾸라지였구나.’
방긋 웃는 이원희에게 굽신거리는 권선호의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었다. 권선호가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돌려 박주혁을 쳐다봤다. 마치 영업은 이렇게 하는 것이니 잘 보고 배워두라는 듯 말이다. 박주혁은 미간이 찡그려지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이래서는 시스템에 봄바디오가 남긴 [대만족]이라는 해피콜을 믿을 수 없겠어.’
번역에 대한 만족이라기보다는 권선호가 제공한 솔루션에 대한 만족일 수도 있다. 물론, 파인랭스의 번역 품질을 믿지만, 순도 높은 해피콜 결과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원희는 여전히 권선호의 솔루션에 만족해하며 껄껄 웃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짓이 도둑질이라고는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호의가 지속되면 권리라고 믿게 된다. 샘플 번역 짜깁기로 무료 번역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퍼지면, 번역료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생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번역 시장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이건 아닌데···.’
신나서 웃고 떠드는 이원희와 권선호에게서 살짝 떨어진 박주혁은 조용히 파인랭스 시스템에 접속했다.
“시스템 온. 검색, 철도.”
- 검색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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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일지=== 448건
프로젝트=== 889건
보고서=== 32건
회의록=== 138건
...
..
.
‘리스트가 아니라 매출액이 필요한데···.’
박주혁은 철도 분야의 매출 규모를 파악해 이원희에게 딜을 해볼 생각이었다.
“검색, 철도 매출”
- 기능이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역시.’
믿을 수 있는 데이터를 가지고 접근하려 했지만, 아직 기능이 비활성화 상태였다.
하지만, 박주혁도 파인랭스에서 매번 놀고먹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정신을 차린 시기가 너무 늦었을 뿐. 그가 직접 경험하고 부딪혔던 일도 있었다.
‘철도 분야는 건수는 적었지만, 매번 규모가 컸지. 시도해볼 만해. 봄바디오를 파인랭스의 충성고객으로 잡아둘 수 있다면 나쁜 투자는 아니다.’
박주혁은 한발 물러서 있던 위치에서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물리적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이원희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이원희님.”
권선호가 매번 지사장이라고 불려왔었기에 막상 이름이 호명되니 이원희가 당황하여 박주혁을 쳐다봤다. 그의 미간이 살짝 좁아지며 불쾌하다는 늬앙스를 내비쳤다.
권선호가 분위기를 눈치채고 재빨리 박주혁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
“사장님. 지사장님이 되실 분입니다.”
“아직 아니죠.”
박주혁의 말에 이원희가 헛기침을 했다.
“으흠!”
이로써 권선호에게 쏠렸던 관심을 완전히 가져왔다. 사람의 관심을 가져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돌아선 관심을 가져오는 확실한 방법은 옅은 불쾌감을 주는 것이다.
여태까지 좋았던 감정과 분위기를 한 번에 흔드는 방법이라 위험성이 매우 높지만, 이목을 끌고 오는 데는 이만한 방법은 없었다. 지금처럼 권선호가 이원희의 마음을 사로잡은 상황말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를 타파할 솔루션이 박주혁에게는 있었다.
“직함이 없으니 이원희님으로 불러드려야 맞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사장님으로 불러드릴까요?”
박주혁의 말에 이원희가 살짝 당황하며 미간을 좁혔다. 틀린 말이 없으니 뭐라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기분은 언짢다.
“아니. 박 사장 말이 맞지. 아직 지사장이 확정된 것은 아니니까.”
이원희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박주혁에게 대답했고 권선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박주혁에게 다가가 황급히 속삭였다.
“···사장님. 분위기 좋았는데 왜 그러십니까?”
“권 부장.”
박주혁이 가만히 권선호를 바라보며 정색하자, 권선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박주혁을 빤히 바라봤다. 박주혁은 그런 권선호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파인랭스가 추구하는 바가 뭡니까?”
향후 지사장이 될 확률이 높은 이원희 지사장을 이름으로 호명하더니, 이제는 난데없이 파인랭스가 추구하는 바를 물어오니 권선호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게 무슨···.”
권선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박주혁이 말을 이어갔다.
“정직, 신뢰 그리고 존중입니다.”
사훈을 읊는 박주혁을 보면 권선호가 당황했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그는 재빨리 평정심을 찾고 속으로 웃었다. 원치 않게 봄바디오라는 카드를 열게 되어 언짢았는데 박주혁이 이렇게 초를 쳐주다니 고마운 일 아닌가?
이원희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박주혁을 빤히 쳐다봤다.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박 사장,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미숙하여 권 부장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습니다.”
“으음?”
이원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박주혁을 바라봤고 권선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박주혁.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박주혁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샘플 번역으로 짜깁기하여 번역본을 만드는 것은 향후 지사장님이 되실 분께 엄청난 누를 끼칠 수 있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이원희가 권선호와 순간 눈을 마주쳤지만, 곧 박주혁에게 집중했다.
“무슨 말인가?”
샘플 번역을 짜깁기하면 번역본의 품질은 엉망이 된다. 지문이 사람마다 다르듯 번역사도 문체, 스타일 그리고 용어를 다르게 사용한다. 아무리 감수하여 통일시키려 해도 바뀔 수 없는 미세한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번역사도 그렇지만, 회사별 감수팀도 추구하는 문체와 스타일 그리고 용어가 다르다. 상황이 이럴진대 샘플 번역 짜깁기를 하게 되면···. 문서의 품질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매 페이지, 새로운 글을 읽는 느낌일 것이다.
개인적인 참고자료라면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번역하려는 것은 국토부에서 작성한 예측 보고서였다. 정확도가 중요한 문서임에도 샘플 번역 짜깁기를 솔루션이라고 내놓은 권선호에게 실망감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런 행태는 번역 시장을 병들게 하는 일이었다. 박주혁의 설명을 듣던 이원희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러니까, 샘플 번역 짜깁기는 문서의 품질이 너무 안 좋고, 결과적으로 본사에서 나의 실력을 의심할 것이라는 얘기군?”
“그렇습니다. 고객에게 신뢰를 받으려면 그러한 문제가 있음을 반드시 정직하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주혁의 말을 듣던 이원희가 갑자기 목을 뒤로 꺾으며 파안대소했다.
“젊은 친구가 대단하군!”
“그저 고객께 정직하고 싶고, 존중해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야 저희도 존중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박주혁의 말에 이원희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군. 본의 아니게 번역업을 무시하는 사람이 돼버렸구먼? 내가 사과하지.”
예상치 못한 이원희의 반응에 권선호가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봄바디오를 박주혁에게 소개하게 되어 속이 쓰렸는데 이런 식으로 자신을 깎아내리기까지 하니 속이 부글거렸다.
“하지만, 지사장님. 지사를 차리기 전에는 자금 결제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사비로 처리하고 추후 정산할 수도 있지만···.”
“지사 설립이 안 되거나, 추후 문제가 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회사 일에 개인적인 돈을 쓰시다뇨. 제가 말씀드린 대로 샘플 번역으로 짜깁기하시죠.”
권선호의 말에 이원희가 고민되는지 눈을 살며시 감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박주혁이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이원희 지사장님.”
박주혁이 지사장이라고 부르자, 권선호와 이원희가 박주혁을 빤히 쳐다봤다. 사소한 호칭 하나로 상황을 쥐락펴락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박주혁이었다.
“대금 지급은 지사장님이 되시면 처리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박주혁의 발언에 권선호와 이원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사장님.”
“박 사장 진심인가? 내가 지사장이 되지 못하면 번역 대금은 못 받는 것일세.”
박주혁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투자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이죠.”
“투자? 하하하.”
이원희가 다시 한번 목을 뒤로 꺾으며 웃었다. 지금 이 상황이 매우 못마땅한 권선호만 얼굴을 굳힌 채 손을 부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권선호가 쉽사리 사용할 수 없는 권력을 박주혁이 휘두르고 있었다. 물론 사후 보고를 통해 권선호도 할 수 있었겠지만, 박주혁에게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었다.
샘플 번역 짜깁기라는 최적의 솔루션을 찾아냈다고 생각했었는데···.
박주혁이 끼어들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뽑아가려 하고 있다.
‘제기랄···. 박주혁.’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박주혁은 권선호에게는 전혀 시선을 주지 않고 이원희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파인랭스가 봄바디오의 번역 파트너가 될 수 있도록 다리를 놔주십시오. 그러면 지사 설립까지 필요한 번역 서비스를 지원해드리죠.”
“박 사장, 진심인가? 생각보다 일이 많을 수 있어.”
“지사가 설립되면 지급해 주실 것 아닙니까? 무료가 아닙니다.”
이원희는 껄껄 웃으며 박주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약조하지. 지사장이 못되더라도, 지금 한 약속은 꼭 지키겠네.”
“그래 주시기 바랍니다.”
박주혁은 이원희의 손을 맞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미팅이 훈훈하게 마무리된 후, 박주혁은 권선호에게 조용히 다가가 속삭였다.
“권 부장.”
“···.”
“권 부장. 근처에 괜찮은 식당 없나?”
하지만 권선호는 박주혁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부동자세로 앉아있었다.
봄바디오를 소개한 것도 모자라, 아예 갖다 바친 꼴이 되었으니 머리가 하얗게 타버렸으리라.
“권 부장?”
박주혁이 권선호의 어깨를 잡으며 다시 부르자, 그때서야 정신을 차렸다.
“예? 아, 죄송합니다. 못 들었습니다.”
“근처에 괜찮은 식당 있냐고요.”
“아, 예. 있습니다. 가시죠.”
권선호가 앞서 걸었고, 박주혁과 이원희가 그를 뒤따르며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박주혁은 분명 권선호에게 영업을 배우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데 정작 한 수 배운 사람은 권선호였다. 심지어 새파랗게 젊은 박주혁도 사장이라고 식당으로 안내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무척이나 씁쓸해졌다.
권선호의 타는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주혁은 이원희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이원희에게 자기 생각을 역설할 때는 거슬리지도 않더니,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유독 시스템 글자들이 눈에 띄었다. 아직 눈앞에 있는 시스템 글자들 때문에 산만했지만, 식당에 도착한 후 기회를 봐 끌 생각이었다.
권선호가 안내한 식당은 상당히 규모가 있는 일식집이었다. 박주혁도 몇 차례 와본 적 있었다. 주방장들이 우렁찬 일본어로 인사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던 곳이었다.
권선호가 문을 열어주자, 맑은 풍경소리가 들렸다.
딸랑딸랑.
그와 동시에 처음 파인랭스 시스템을 접속할 때 들었던 알림 벨이 귓가를 때렸다.
띠링!
박주혁은 순간 움찔하며 시스템 글자를 확인했다.
- 파인랭스의 성장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 수습사원 권한이 사원 권한으로 변경됩니다.
‘오···!’
박주혁이 씩 미소를 짓는 순간, 주방장들이 큰소리로 외쳤다.
“이랏샤이마세!”
박주혁은 주방장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시스템 오프.”
사원의 권한이 어떤 것일지는 잠시 후에 확인하면 될 문제였다.
지금은, 권선호의 표정을 반찬 삼아 스시를 즐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