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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4화 (4/136)
  • 004화 네 카드를 보여라.

    햇빛보육원.

    박주혁이 아버지와 종종 봉사활동을 갔던 곳이었다.

    갖가지 먹을 것과 철 지난 옷들을 잔뜩 사들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보육원을 3개월 주기로 방문했다.

    황금 같은 주말에 꼭 이런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지만, 박주혁은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미간을 좁히는 박주혁을 보며 박찬희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주혁아, 항상 사회에 환원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것들이 쌓여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거란다.”

    “예.”

    사춘기에 접어든 박주혁에게는 그저 듣기 싫은 잔소리였기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버지를 도와주지 않아도 됐지만, 박주혁은 구시렁거리면서도 매번 따라나섰다.

    봉사활동 후 마음 한구석에 차오르는 따뜻한 온기와 뿌듯함을 그도 알기 때문이었다.

    [햇빛보육원의 후원인이자, 저의 후견인이신 박찬희 사장님께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박영희의 이력서 중 자기소개에 쓰여있던 첫 문장이었다.

    박주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럴 수가.”

    아버지께서 햇빛보육원 출신 아이들의 후견인을 자처했던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크게 돌아왔었다니···.

    아버지가 파인랭스에 입사하라고 후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찾아오고 또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면 왜 받아주지 않았겠나?

    아버지가 박영희의 입사를 허가할 때의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모든 일은 결국 사람의 손을 거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공장이 자동화가 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사람이 자동화 기계를 만들고, SW를 개발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 그것이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말씀하셨던 걸까?

    박주혁은 잠시 허공을 쳐다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잠시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박주혁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던 자세를 풀며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들어오세요.”

    권선호가 문을 열고 들어와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권 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오후에 외근이 있습니다. 혹시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절 찾으실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외근? 업체 미팅인가 보군.’

    “그렇군요. 어디로 가시나요?”

    “서울 하얏트 호텔입니다.”

    호텔이라는 말에 박주혁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의 기억 속에 호텔에서 미팅을 진행한 기억은 없었기 때문이다.

    “호텔이요?”

    박주혁이 목소리를 살짝 높이며 되묻자, 권선호의 눈가가 살짝 꿈틀거렸지만, 금세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와 나긋나긋 말했다.

    “아직, 한국 지사도 설립하지 않은 해외 기업입니다. 한국 진출 여부를 타진 중이죠.”

    “그래요? 그렇다면 파인랭스의 도움이 필요하겠군요.”

    한 톤 올라간 박주혁의 목소리에 권선호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박주혁은 그런 권선호의 찰나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뭘 숨기는 겁니까?’

    권선호는 재빨리 평정심을 유지하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예, 한국 지사 설립을 위해 시장조사를 조금 도와주고 있습니다.”

    “좋은 방법입니다. 사전에 그렇게 손을 뻗어놓으면 파인랭스와 강력하게 연결되겠지요.”

    “맞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권선호는 꾸벅 인사하며 사장실을 나가려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박주혁도 자리에서 일어나 상의를 챙기며 말했다.

    “권 부장님. 저도 같이 가시죠. 미래의 고객이 될 수도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아직 사장님이 나서실 때가 아닙니다.”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사실 권 부장님께 영업을 배우고 싶네요.”

    문고리를 잡은 권선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나긋나긋 말했다.

    “그러시다면 영업다운 일을 할 때 함께 가시죠.”

    “오늘 미팅도 영업의 일환 아닌가요?”

    “영업이라기보다는 아첨에 가깝죠. 사장님께서 배우실 일이 못 됩니다.”

    “밑바닥부터 배우라고 아버지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걱정하지 마십시오.”

    박주혁의 단호한 말에 권선호의 입술이 얇게 펴졌다.

    그는 사장실 문을 열며 박주혁이 앞서 나가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전형적인 영업맨의 자세였다.

    박주혁이 사장실을 나가자, 권선호가 순간 눈을 부릅뜨며 박주혁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권선호의 사나운 눈빛은 재빨리 평소대로 돌아왔기 때문에 이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박주혁이 회의실을 지나 탕비실 앞으로 향하는데 커피 한잔을 들고나오던 박영희가 박주혁과 마주쳤다.

    박영희가 순간 멈칫했고, 컵 속에 커피가 위태롭게 넘실거렸다.

    “앗! 깜짝이야. 어? 사장님, 어디 가세요?”

    “예, 권 부장과 함께 외근 갑니다.”

    박주혁의 말에 박영희의 시선이 무표정한 얼굴로 뒤따라 나오는 권선호에게 향했다.

    권선호를 바라보는 박영희의 눈빛은 자못 날카로웠다.

    그런 박영희를 향해 권선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앞 좀 잘 보고 다니세요.”

    “그러지요.”

    권선호와 박영희 사이에 불꽃이 튀었지만, 잘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일상적인 대화였다.

    감정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메마른 대화 말이다.

    박주혁과 권선호는 지하 주차장에서 서 있는 소나타2에 몸을 실었다.

    박주혁은 조수석에 앉아 대시보드를 어루만졌다.

    ‘아버지 차도 소나타2였었지. 뉴그랜져 사자고 그렇게 얘기했었는데···.’

    95년도로 돌아오고 난 후 아버지와의 추억이 더욱 생생하게 기억나는 박주혁이었다.

    권선호가 운전하는 소나타2는 힘겹게 지하 주차장을 언덕을 올라갔고 곧 강변대로에 들어섰다.

    빛을 반사하는 한강은 매번 볼 때마다 아름답다.

    한강을 바라보며 박주혁은 넌지시 권선호에게 물었다.

    “오늘 만나는 업체명이 뭡니까?”

    “들어보신 적 없을 겁니다. 봄바디오라고 캐나다 기업입니다.”

    봄바디오라는 말에 박주혁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다시 한강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처음 들어보네요.”

    ‘봄바디오라니···. 권선호의 눈빛이 흔들린 이유가 있었어.’

    봄바디오.

    정확한 명칭은 봄바디오트랜스포테이숀.

    캐나다 기업으로 항공기, 제트기, 철도, 버스 등을 제조하는 중공업 회사다.

    포춘 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에도 올라간 그야말로 탄탄한 회사였다.

    故 박찬희 사장이 봄바디오가 한국에 지사를 낸다는 소식을 듣고 공을 엄청나게 들였었지만, 결국 결과를 못 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끝내 파인랭스는 봄바디오의 번역 파트너가 되지 못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 이유가 짐작이 갔다.

    ‘이제야 너란 인간을 좀 알 것 같다. 뱀 같은 자식.’

    권선호는 입을 다문 박주혁에게 오늘 만날 사람에 대해 브리핑을 했다.

    “오늘 만나 뵐 분은 이원희씨 입니다. 봄바디오가 한국에 지사를 낸다면 지사장으로 임명될 가능성이 크죠.”

    “그렇군요.”

    박주혁은 오늘 운이 좋게 권선호가 가지고 있던 카드 하나를 확인했다.

    봄바디오트랜스포테이숀.

    한국의 SOC(Social Overhead Capital_사회간접자본)사업의 성장성을 보고 자신들의 철도 운송 시스템을 팔기 위해 2000년도에 지사를 설립한다.

    지사가 설립되는 것은 2000년이지만, 번역은 지사 설립을 위한 조사단계에서부터 발생하는 법이다.

    ‘권선호. 봄바디오 카드를 내놓게 되어 속이 쓰리겠어.’

    박주혁은 여전히 한강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스템 온.”

    파인랭스 시스템이 눈앞에 펼쳐졌고 박주혁은 다음 명령어를 속삭이듯 말했다.

    “검색, 봄바디오”

    들릴 듯 말듯 속삭였는데 권선호가 박주혁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지 불쑥 박주혁에게 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박주혁은 순간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답했다.

    “회사 이름 외우고 있었습니다. 봄바디오라고 하셨죠?”

    “예, 맞습니다.”

    박주혁은 어느덧 시스템 사용법에 익숙해졌고 제법 능숙하게 다뤘다.

    - 검색 완료.

    - 한 건이 검색되었습니다.

    매출 날짜: 1995년 4월 30일

    고객명: 봄바디오트랜스포테이숀

    프로젝트명: 샘플 번역

    해피콜: 대만족

    감수자: 박영희

    번역사: 심형직

    박주혁은 검색 내용을 보고 이마를 지그시 잡았다.

    감수팀 박영희 팀장과 베테랑 번역사 심형직의 조합이었다.

    품질에 이슈가 있다면 필시, 담당자가 영어를 좀 한다는 사람일 것이다.

    ‘샘플 번역이 대만족인데 우리와 이뤄지지 않았다는 건···. 명백하네.’

    박주혁은 시스템 오프를 나지막이 말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차는 곧 서울 남산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 도착했다.

    봄바디오 한국 지사가 아직 설립되지 않은 만큼 이원희는 하얏트 호텔의 객실을 사무실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호텔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권선호가 손을 번쩍 들며 이원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는데 유독 큰 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권선호는 이원희에게 달려가 양손으로 악수하며 밝게 말했다.

    “아이고, 지사장님. 조금 늦었습니다.”

    “그 사람 참, 아직 지사장 아니래도!”

    “지사가 설립되면 바로 올라가실 텐데 뭘 그렇게 빼십니까?”

    박주혁은 두 사람의 친밀감 있는 대화에 헛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아버지가 공들인 업체를 날로 먹으려고 많은 공을 들였군.’

    권선호는 이원희와 인사를 나눈 후 박주혁을 소개했다.

    “지사장님, 인사하시죠. 파인랭스의 뒤를 이은 박주혁 사장입니다.”

    “어! 그럼 박찬희 사장의 아들?”

    이원희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내밀었다.

    박주혁은 허리를 살짝 숙이며 이원희의 손을 맞잡았다.

    “안녕하십니까? 박주혁이라고 합니다.”

    “이야. 반갑네! 반가워. 로비에서 이럴 게 아니라 올라가서 얘기 나눕시다.”

    이원희는 박주혁과 권선호를 데리고 하얏트 호텔 2층에 마련된 비지니스 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분주한 로비와 달리 비지니스 센터는 한적했다.

    이원희는 자리에 앉자마자 박주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그렇게 되셔서 많이 놀랐겠어. 참 열정적인 사람이었는데.”

    “감사합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이런···. 기운 내라고.”

    이원희는 진심 안타까운 얼굴로 박주혁의 손등을 지긋이 맞잡았다.

    마치 어린 조카를 대하는 것 같았다.

    ‘심성은 착한 사람이군.’

    권선호가 그런 이원희와 박주혁을 못마땅한 듯 힐끔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지사장님, 그래서 이번에 준비해야 할 자료가···?”

    “아! 그래.”

    이원희는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종이 뭉치를 하나 꺼내 박주혁과 권선호 쪽으로 밀었다.

    『사업지 및 주변의 교통수요 예측 보고』

    국토부에서 만든 보고서였다.

    박주혁은 보고서를 넘겨 목차를 빠르게 훑어봤다.

    ‘용인, 민간, 경전철?’

    키워드만 뽑아낸 박주혁의 눈이 빛났다.

    2005년 착공이 들어가는 용인 경전철의 사업 예측 보고서였다.

    용인 경전철 자체는 안 좋은 사례로 남은 대표적인 민간 SOC사업이지만, 사업이 진행되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니까 이걸 꿀꺽하시겠다는 거였군요? 권선호씨.’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박주혁이 권선호 쪽을 슬쩍 노려봤다.

    권선호는 박주혁의 그런 눈빛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이원희에게 물었다.

    “이걸 전부 번역해야 하는 겁니까?”

    “그럼 좋은데···. 힘들까?”

    글씨 크기와 페이지 폭을 봤을 때 최소 30페이지 분량이었다.

    하지만 파인랭스 시스템에 기록되어 있는 봄바디오 샘플 번역은 단 2장.

    그렇다면 권선호는 이 번역을 어떻게 진행한 것인가?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권선호와 이원희의 대화에 집중했다.

    “샘플 번역으로는 양이 많습니다.”

    권선호의 틀에 박힌 대답에 박주혁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원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긴, 그렇지?”

    아쉬워하는 이원희의 표정을 보며 권선호가 눈을 빛냈다.

    “하지만, 지사장님. 방법은 있죠.”

    입맛을 다시던 이원희가 눈을 반짝이며 권선호를 쳐다봤고, 박주혁은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네 카드를 보여라, 권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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