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3화 (3/136)

003화 혁신이네요.

95년도 파인랭스에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팀이 있었다.

파인랭스의 시스템 개발을 책임질 SW개발팀.

박주혁의 곁에서 끝까지 남아 파인랭스를 지켰던 2인 중 한 명이 개발팀에 있었다.

‘심영찬, 그를 빨리 데려와야겠어.’

심영찬은 파인랭스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박주혁과 몇 날 며칠을 함께 머리를 싸맸던 친구다.

완성된 파인랭스의 시스템을 유지보수하며 늘 입버릇처럼 파인랭스 시스템은 자기 자식이라고 말했었다.

끝까지 의리를 지켜주었던 그에게 박주혁은 보상해주고 싶었다.

‘이번엔 내가 널 끝까지 책임지마.’

박주혁은 심영찬을 떠올리며 박영희에게 힘주어 말했다.

“파인랭스의 모든 업무를 전산화시켜야 합니다.”

카리스마 있는 그의 목소리에 박영희가 살짝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혁신이네요.”

박영희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권선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그는 박주혁이 주창하는 전산화라는 것이 ERP를 뜻한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90년대 들어 컴퓨터가 발달하며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전산화 열풍이 세계적으로 불었다.

우리나라는 가장 빠르게 IT 기술을 채택한다는 삼송시스템이 95년에서야 SEP 사의 ERP를 도입했었다.

그것도 삼송의 기희곤 회장이 강력히 추진하여 진행된 것이지, ERP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분위기였다.

권선호는 박주혁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전산화라니요? 지금 우리 규모에 전산화가 필요하다고 보시는 겁니까?”

권선호는 삼송도 이제 도입한 것을 일개 번역회사가 도입하겠다는 것이냐며 박주혁을 몰아붙였다.

도전적인 권선호의 눈빛에 회의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박주혁은 권선호의 차가운 시선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넌지시 물었다.

“그렇습니다. 전산화로 우리는 확고한 업계 선두가 될 수 있습니다. 영업팀은 현재 프로젝트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죠?”

“고객 분야별로 엑셀에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객별 용어집과 스타일가이드도 마찬가지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사장님, 현재 우리의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시고 미래를 설계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훈수를 두는 것 같은 권선호의 말에 박주혁이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파인랭스의 기밀을 털어 나갈 사람이 회사 걱정을 한다는 것이 무척 가소로웠다.

전산화 시기가 빠르다는 것은 박주혁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산화를 앞당기려는 이유는 ‘보안 강화’ 때문이었다.

현재 영업팀 개개인의 컴퓨터에는 담당 고객 자료가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누구든 원하면 자료를 반출할 수 있어 권선호가 쉽게 빼가지 않았나?

4년을 앞당겨 전산화를 추진하는 것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하지 않으려는 박주혁의 복안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산화는 품질의 일관성 유지와 생산성도 향상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박주혁은 그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용어집과 스타일가이드는 故 박찬희 사장이 고안해 낸 품질 향상 방법의 일환이었다.

고객이 원하는 용어와 문체, 문장 스타일을 집대성하여 항상 균일한 품질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품질 유지를 위한 훌륭한 방법이었지만, 그것을 작성하고 관리하는 것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 매사 완벽할 수는 없다.

용어집과 스타일가이드을 잘 작성했다 하더라도 전달하는 과정에서 파일이 뒤바뀐다면 그 프로젝트는 출발선부터 틀린 것이다.

그럼 영락없이 클레임이 터진다.

미뤄 짐작하겠지만, 품질을 유지하는 노력보다 클레임을 처리하는 비용이 더 큰 법이다.

“용어집, 스타일가이드 외 기타 파인랭스의 모든 업무는 전산화시켜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사장님. 전산화에 들어가는 비용은 천문학적입니다. S대도 ERP 도입에 300억 원을 투자했다고 합니다. 삼송이야 자본력이 워낙 좋으니 문제가 안 된다 쳐도, 저희 같은 소기업에서 전산화는 다소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권선호가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조목조목 역설하자, 박영희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입을 열었다.

“불가능하지는 않죠.”

“박영희 팀장, 잘 모르시나 본데, 말씀드렸듯이 전산화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부분은 전문가들이 판단할 일이지 감수팀에서 얘기할 사항은 아닌 것 같습니다.”

권선호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박영희를 몰아세웠고, 그 광경에 다른 팀의 팀장들도 입을 꿈틀거렸다.

박영희 팀장을 무시해도 되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었지만, 다들 박영희를 은연중에 분위기가 있는 듯했다.

그 중심에는 권선호가 있는 것이 분명했고···.

박주혁은 입술을 굳게 닫으며 권선호를 잠시 노려봤고, 박영희는 권선호의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기며 태평한 표정으로 말했다.

“권 부장님이야말로 잘 모르시나 봅니다. 제가 프로그래밍 대회에서 상도 탔었거든요.”

“뭐라고···요?”

권선호의 눈 밑이 꿈틀거렸다.

박영희 팀장.

그녀는 언어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었다.

영어와 국문뿐 아니라 프로그래밍도 결국은 하나의 언어라면서···.

감수자로서는 조금 독특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었다.

‘권 부장은 박영희에 대해 전혀 모르는군.’

권선호는 박영희는 아예 영입할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었던 게 분명하다.

확실한 故 박찬희 사장의 편이라고 판단했을 테니···.

‘그나저나 아버지는 박영희를 어떻게 알게 되었던 거지?’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지만, 어땠든 판은 짜졌다.

박주혁은 권선호를 쳐다보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박영희 팀장이 프로그래밍 쪽에 경력이 있다는 것을 모르셨나 봅니다.”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아는데, 굳이 감수팀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네요.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전산화는 무리입니다.”

권선호가 박영희를 살짝 노려봤다.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아는데 왜 감수팀에 있냐는 말로 권선호는 감수팀 전체를 평가절하했다.

번역부 팀장들은 여전히 권선호의 입장을 옹호하며 업무의 가중이 우려된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키웠다.

“사장님. 지금도 업무에 로드가 걸리는데, 개발까지 하게 되면 번역에 차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지금처럼 해도 문제가 없는데 굳이···.”

팀장들의 언성이 높아지자, 박주혁이 손을 들고는 딱 잘라 말했다.

“전산화에 번역부가 할 일은 없습니다. 업무에 영향이 갈 것이라는 오해는 접어 두십시오.”

박주혁의 말에 번역부의 두 팀장 중 하나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답답하다는 듯 양손을 벌리며 항변했다.

“예? 아니 사장님. 저도 전산화가 뭔지는 알고 있습니다. 최소 개발자에게 업무 흐름을 설명해야 하고 기타 협조할 사항도 많지 않습니까?”

“번역 1부 팀장님.”

“사장님, 이건 정말···.”

“최 팀장.”

박주혁의 정색에 번역 1부 최수정 팀장은 강아지가 깨갱하듯 몸을 움츠렸다.

“제가 이해가 안 되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

“용어집과 스타일가이드가 정확하게 전달되면 번역에 도움이 되는 일인데 왜 반대하시는 겁니까?”

번역부의 두 팀장이 일순간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너무 맞는 말이라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권선호의 의견에 힘을 보태주려던 두 팀장은 눈이 방향을 잃고 요동쳤다.

우물거리며 변명하는 최 팀장을 가만히 쳐다보던 박주혁은 이내 시선을 돌려 팀장 전원을 향해 말했다.

“어렵고 힘든 길이기에 혁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파인랭스가 업계 선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선두를 유지하려면 남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것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권선호는 박주혁의 말에 입을 앙다물었다.

업무의 효율을 높이고 품질 유지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겠다는 박주혁의 말에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전산화를 막아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전산화가 되면 회사의 정보가 통제될 확률이 있기 때문이다.

“사장님의 원대한 포부는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현실 가능성이 없습니다. 현재 파인랭스에는 개발부서도 없고, 외주를 줄 수 있는 상황은 더더욱 아닙니다.”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권선호의 말을 경청하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권 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서 개발부서를 만들 생각입니다.”

“···사장님. 지금 파인랭스는 번역사를 추가로 고용해도 모자라는 상황입니다. 이런 와중에 개발부서를 새로 만든다는 건···.”

“미래를 위한 투자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죠. 그리고 저는 SEP 사의 ERP를 도입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번역회사에 필요한 기능만 개발한다면 SEP를 도입할 필요 없이 독자적인 구축이 가능할 겁니다.”

박주혁의 말에 박영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맞습니다. 굳이 비싼 SEP 사의 ERP를 도입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장님 말씀처럼 우리 회사의 독자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면 됩니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권선호의 한쪽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럼 누가 개발을 주도하고, 개발은 누가 하게 됩니까?”

“제가 직접 주도할 생각입니다. 박영희 팀장은 회의가 끝난 후 사장실로 들어오시고, 다른 분들은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현업에 집중하면 됩니다. 이상입니다.”

박주혁의 통보에 권선호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항변했다.

“사장님. 지금은 내실을 다져야 할 때입니다. 우선 회사부터 파악하시고···.”

“권 부장.”

몸을 일으켜 나가려던 박주혁은 고개를 돌려 권선호를 향해 말했다.

“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내가 정합니다. 제가 선장이고 권 부장은 항해사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무의식중에 권선호에 대한 증오가 끓어오른 듯, 한 마리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는 박주혁이었다.

권선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까지 확인한 박주혁은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박영희가 종종걸음으로 뒤따라 나갔다.

문이 닫히고 팀장들만 남은 회의실.

남아있던 팀장 중 하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런데 부장님. 전산화를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요? 박주혁의 말을 들어보니 틀린 말은 없어 보이던데요.”

권선호의 미간이 잠깐 꿈틀했다가, 다시 펴졌다.

‘정보를 통제하겠다는 얘기인데, 그것도 모르냐? 멍청한 놈들···.’

권선호는 고개를 저으며 묵묵부답이었고, 나머지 팀장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회사를 차리려는 사람과 조건에 맞춰 이직하려는 사람의 생각은 천지 차이인 법.

권선호는 뇌를 빼놓고 다니는 듯한 팀장들의 얼굴을 보니, 짜증을 치솟았다.

“가서 일이나 하세요.”

“왜 짜증을 내고 그러십니까···.”

권선호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팀장들은 이내 수첩을 들고 썰물 빠지듯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텅빈 회의실에 홀로 앉은 권선호.

-뿌득!

그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박주혁, 호랑이처럼 보이고 싶겠지만··· 넌 아직 어린 고양이 새끼일 뿐이다.”

#

사장실에 아직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박주혁은 의자에 몸을 묻으며 미소를 지었다.

‘후련하네.’

짧은 승리감에 도취해있을 때 누군가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 똑, 똑

“들어오세요.”

박영희가 안경을 올리며 사장실로 들어왔다.

박주혁은 자리를 권하며 박영희의 맞은편에 앉았다.

“박 팀장님. 프로그래밍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 어떻게 아셨어요? 아, 아버님이 말씀하시던가요?”

“뭐, 그렇죠.”

박주혁의 말에 박영희가 깔깔거리며 웃더니 수첩을 펼쳐 박주혁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죠?”

수첩을 내려본 박주혁은 흠칫 놀랐다.

잠겨있던 아버지 서랍에서 본 파인랭스의 시스템 구조도와 흡사한 그림이 박영희의 수첩에 그려져 있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사장님과 짬짬이 얘기했던 것들입니다. 작은 사장님도 본 적이 있으신가 보네요? 감수 볼 시간도 빡빡해서 뭐 진행한 것은 없지만···.”

‘작은 사장님? 표현이 재미있네.’

박주혁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는데 박영희의 숨소리가 갑자기 격해졌고 곧 어깨를 들썩였다.

잠시 박영희에게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준 박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 이것을 보고 전산화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어찌 보면 아버지의 꿈···.”

박주혁의 말에 박영희가 다시 한번 울컥하는 모습을 비치더니 힘주어 말했다.

“우리 사장님 다 컸네요? 옳으신 방향입니다. 저는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인력이 필요합니다. 프로그래밍을 잘하면서 믿음직한 선수들을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음···.”

박영희가 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놈이 있긴 한데,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네요.”

“어떤 상황 말씀입니까?”

“취직을 했을 수도 있고···. 일단 연락해보겠습니다.”

“수고 좀 해주십시오.”

“예. 사장님.”

박영희는 두꺼운 뿔테안경을 고쳐 쓰고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박주혁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아버지는 대체 어떻게 박영희를 아신 걸까?’

궁금증을 참을 수 없던 박주혁은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시스템 온. 검색, 박영희”

- 검색 중···.

- 검색 완료. 총 32,745건이 검색되었습니다.

‘뭐가 이렇게 많아?’

검색된 파일들을 스크롤 하다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영희가 감수자로 참여한 프로젝트가 너무 많았다.

넘쳐나는 데이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박주혁은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

“검색, 박영희 이력서”

- 검색 중···.

- 검색 완료.

박영희의 이력서를 확인한 박주혁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엇!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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