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뜻대로 안 될 겁니다.
사무실 가장 안쪽에 있는 사장실은 아침햇살이 특히 잘 들어오는 곳이었다.
밝은 빛이 기분 좋게 박주혁을 감쌌지만, 그의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 파인랭스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 검색 조건을 말하면, 파인랭스 DB에서 불러올 수 있습니다.
- 현재 박주혁님은 수습사원 등급으로 검색과 열람을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난데없이 등장한 파인랭스 시스템 문구 때문에 박주혁은 눈을 끔벅였다.
‘과거로 돌아와서 눈이 이상해진 것이 분명해.’
눈가가 벌게지도록 비볐지만, 눈앞에 있는 글씨는 여전했다.
‘이게 대체···.’
박주혁은 다시 한번 눈을 비비며, 눈앞에 떠 있는 글자들을 바라봤다.
- 단계는 파인랭스의 성장도에 따라 성장하게 되며 더 많은 기능이 오픈됩니다.
“...”
박주혁은 간략한 파인랭스 시스템의 설명문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손으로 눈앞을 휘저어 봤지만, 글씨가 디스플레이 되는 공간은 흔들림이 없었다.
혹시나 해 박주혁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스크롤 했다.
“어? 움직인다.”
화면이 움직이며 추가 정보들이 나타났다.
박주혁은 눈 앞에 펼쳐진 정보들을 따라 읽었다.
“시스템 오프.”
설명대로 외치자 전원이 꺼지듯 펼쳐져 있던 글자들이 허공의 한점으로 사라졌다.
박주혁은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의 집무실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절대 사라질 것 같지 않던 글씨들이 한순간 사라져 더는 시야를 방해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눈을 끔벅이던 박주혁은 다시 말했다.
“시스템 온.”
박주혁의 말끝에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화면이 그대로 펼쳐졌다.
그 외 두 가지 다른 기능도 살펴보았다.
도움말을 의미하는 매뉴얼 기능과 키워드, 날짜, 고객명, 담당자 등 원하는 검색 조건에 맞춰 찾을 수 있는 검색 기능이었다.
“신기한 일이네.”
박주혁은 턱을 쓰다듬으며, 95년도의 회사 상황에 대해 검색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검색, 95년 4월.”
모래시계가 하나 나타나 천천히 돌았고 검색 중이라는 글씨가 나타났다.
마치 시스템이 머릿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 검색 완료.
- 검색 결과가 많아 카테고리로 묶음 처리됩니다.
업무일지=== 48건
프로젝트=== 335건
기안서=== 32건
보고서=== 11건
회의록=== 6건
...
..
.
박주혁은 수없이 이어지는 검색 결과에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새삼 시스템의 기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파인랭스의 95년 4월 정보를 모두 긁어 오다니···.
박주혁은 불현듯 시스템으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 잠깐. 시스템으로 미래의 프로젝트도 검색할 수 있다는 소리잖아?’
파인랭스가 진행한 프로젝트에 한해서지만, 증권회사들보다 더 정확한 팩트를 손에 쥘 수 있다.
상장하려는 회사들이 IPO 자료를 의뢰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내부자거래가 아닌 이상 박주혁이 정보를 가장 먼저 알 수 있다는 소리였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걸렸다.
‘이게 로또네.’
박주혁은 잠시 즐거운 상상을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파인랭스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분명 시스템 설명에 파인랭스가 성장함에 따라 시스템의 기능도 더 열 수 있다고 했었다.
박주혁은 다시 눈앞에 떠 있는 검색 결과를 보며 손가락으로 업무일지를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화면이 바뀌며 업무일지가 좌르륵 나열됐다.
박주혁은 망설이지 않고 권선호 부장의 업무일지를 터치했다.
‘특별한 것은 없군.’
하기야 대놓고 업무일지에 자료들을 훔치고 있다고 써놓을 리 없지 않은가?
심드렁한 눈으로 자료를 훑던 박주혁의 눈이 한 지점에 멈췄다.
한 가지,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아버지가 응급실로 실려 간 시기에 팀별 회의가 유독 많이 진행됐다.
특이한 점은 회의내용은 없고, 팀별로 회의를 진행했다는 제목만 남겨놓았다는 것이다.
간략하게라도 회의내용이 요약되어 있기 마련인데, 유독 이 시기에는 제목만 남아있었다.
‘번역부 미팅’, ‘경영지원팀 미팅’, ‘개발팀 미팅’ 이런 식이다.
“뭐지?”
회의가 유독 많은 날짜를 확인 후 뒤로 돌아와 회의록을 클릭했다.
역시나 해당하는 날짜에 회의록도 존재하지 않았다.
“회의록이 없는 회의라···. 권선호는 벌써 움직인 것 같군. 시스템 오프.”
박주혁은 시스템을 끄고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
[제목: 오전 11시 팀장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
팀장들에게 메일을 발송한 박주혁은 의자에 몸을 맡기며 낮게 중얼거렸다.
“남은 한 시간 동안은 회사 업무를 파악해야 한다. 시스템 온.”
모든 직원의 업무일지를 살펴볼 생각이었지만, 분량이 생각보다 많았다.
‘음. 이래선 한도 끝도 없겠어.’
박주혁은 우선 부서별 팀장과 사원의 업무일지만 확인하기로 했다.
머리와 꼬리를 확인하면 몸통은 얼추 그려지기 마련이다.
팀장급의 업무일지로 부서의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한 후 사원이 작성한 업무일지로 세세한 부분을 채워 넣으면 흐름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권선호의 꾐에 넘어간 팀장들은 전부 파인랭스를 퇴사했었다.
하지만, 권선호가 얼마나 일을 진행했는지 모르는 상황이니, 사원 중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인재들을 미리 파악해 두는 것이 필요했다.
번역은 엉덩이의 힘이다.
끈기로 하는 것이지 얕은수를 부리는 업종이 아니다.
돈을 따라 움직이는 철새는 파인랭스에 필요 없다.
박주혁은 한참을 허공에 손가락질하며 업무일지를 살펴봤다.
‘전반적인 사항은 확인됐다.’
박주혁은 팀장과 사원의 업무일지를 훑어본 후 회의록까지 섭렵한 후에야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10시 58분.
10분 정도 본 것 같은데 벌써 1시간이 후딱 지나있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것 같았는데 젊은 몸이라 그런지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박주혁은 이것저것 메모해둔 수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실을 열자마자 리드미컬하게 들리는 직원들의 키보드 소리가 박주혁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토독. 토도도독.
박주혁은 키보드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장실과 바로 앞에 있는 경영지원팀과 개발팀보다는 사무실 중앙에 등을 맞대고 있는 번역 1, 2부와 감수팀에서 키보드 소리가 더 리드미컬했다.
‘듣기 좋네.’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려는데 출입문 쪽에 있는 영업팀에서 권선호가 일어났다.
박주혁은 자신도 모르게 벽에 걸려있는 시계로 눈길이 갔다.
10시 59분.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권선호는 박주혁을 발견하고 능글맞게 웃으며 회의실 문을 열고 박주혁을 기다렸다.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
정확한 시간에 맞춰 회의실 앞에서 박주혁을 대신해 문을 열어준다.
얼핏 보면 예의 바른 직장인의 모습이었지만, 이건 박주혁에 대한 도전이었다.
‘대놓고 나와 동급이라고 얘기하고 있군.’
박주혁은 중앙 창가 쪽에 있는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회의실에는 권선호 부장과 함께 퇴사한 사람들이 한쪽 면을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번역 1부, 번역 2부, 경영지원팀···.
이 자리에 서서 다시 보니 정말 핵심 중의 핵심은 전부 쓸어 갔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하지만, 뜻대로 안 될 겁니다. 권 부장.’
11시가 조금 지나자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두꺼운 뿔테안경을 쓴 채 머리를 긁적이며 들어오는 감수팀의 박영희 팀장.
육아 문제로 퇴사하기 전까지 파인랭스의 품질을 담당했던 고마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매사 조금씩 늦는다.
그래서 결혼도 늦었던 건가?
박영희 팀장은 PM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감수팀의 터줏대감이었다.
매번 납품 시간에 늦어 동동거리는 PM에게 박영희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기다리라고 해. 문서를 의뢰한 순간부터 갑과 을이 바뀌는 거야. PM들도 너무 굽신거리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는 대는 품질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인정신이랄까?
박영희 팀장이 감수를 봤다 하면 클레임은 없었으니 실력은 확실했다.
불현듯 권선호가 회사를 차려 나갔다는 소리에 박영희가 입을 떡 벌렸던 것이 떠올랐다.
뚝심 있는 그녀의 성격 때문에 권선호가 박영희에게만은 이전 제안을 하지 않았으리라.
듬직한 우군이 회의실로 들어오자, 이글거리던 박주혁의 분노가 차츰 가라앉았고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모두 착석하자, 박주혁은 팀장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아침에 인사했지만, 파인랭스와 여러분을 책임질 박주혁입니다.”
박영희를 제외하곤 박주혁의 말에 반응은 놀랍도록 싸늘했다.
권선호가 분위기를 살피더니 뒤늦게 손뼉을 치며 팀장들에게 눈치를 줬다.
그의 눈치에 맞춰 억지로 손뼉 치는 직원들.
짜고 치는 것이 눈에 선했다.
박주혁을 치켜세우는 척하면서 정작 권선호, 자신을 높이는 상황 연출이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치졸한 자식.’
박주혁은 목을 가다듬고 팀장들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오늘은 여러분의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들어보고자 합니다.”
보통 첫날 회의를 하게 되면 보통은 잘 부탁한다거나 앞으로 열심히 해보자며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박주혁은 첫날부터 밑도 끝도 없이 의견을 들어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팀장들은 눈을 끔벅이며 박주혁을 바라봤다.
‘리더는 이렇게 예상을 깨야 하는 법이죠. 권 부장.’
분위기를 장악하려던 권선호는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모든 이목은 박주혁에게 집중됐다.
분위기를 휘어잡은 박주혁을 쳐다보며 권선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심기가 불편한 듯 보였지만, 박주혁에게 이목이 쏠린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여러분의 업무일지와 회의록을 살펴봤습니다.”
“오, 역시. 빠르게 업무를 파악하려면 그 방법이 최고입니다.”
기회다 싶으면 권선호는 불쑥불쑥 끼어들었다.
박주혁을 칭찬하면서 자신을 박주혁과 동일선상에 올려놓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회의실은 총만 없을 뿐이지 불꽃 튀는 전쟁터였다.
권선호의 의도를 알고 있는 박주혁은 쓴웃음을 삼키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현재 업무 프로세스로는 우위에 설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순간 회의실 분위기가 술렁였다.
95년은 파인랭스가 번역물량을 독차지하고 있다며 경쟁사들의 원성이 자자하던 시기였다.
박주혁의 말에 공감할 팀장은 없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권선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사장님께서 아직 파인랭스의 지위를 아직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현재 파인랭스는 시장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권선호의 말에 팀장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파인랭스의 황금기를 어찌 모르겠나?
박주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장의 선두자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죠.”
“?”
권선호가 미간을 좁히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번역회사는 고객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축이다.
고객과 관계가 형성되면 이후 프로세스는 번역, 감수, 편집 후 납품이라는 단순한 구조의 사업이다.
하지만, 박주혁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권선호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권선호가 회사를 차려 나간 후 거래가 단절되었던 고객들이 다시 파인랭스를 찾아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이 한결같이 얘기하는 것은 바로 ‘번역의 품질’이었다.
‘품질’은 기계번역이 등장하면서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인간의 감성과 창의성은 기계번역이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권선호. 당신도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아서 성장이 멈췄었던 거잖아?’
박주혁은 권선호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리고 팀장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혁신. 시장의 선두는 항상 혁신해야 합니다.”
박주혁이 힘주어 말했지만, 팀장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권선호가 나서지 않아도 번역 1, 2부 팀장들이 불평을 토로했다.
“예? 혁신이라니요. 지금 프로젝트 하나하나 마감하기도 바쁜데···.”
“너무 모르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팀장들의 반응을 본 권선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리더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진취적인 사람은 항상 있다.
감수팀 박영희 팀장은 두꺼운 뿔테안경 너머 눈을 빛내며 말했다.
“사장님,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박영희의 반응을 예상했던 박주혁은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