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죽음
“하긴 피스토와 계약한 녀석치고 좋은 꼴 봤다는 이를 못 봤지. 이번 건도 마찬가지였군.”
카이의 중얼거림에 피스토가 씨익 웃었다.
<당연하죠. 연옥이란 그런 곳입니다. 한 번 어떤 식으로든 발을 들이면 그 끝은 오직 연옥뿐입니다.>
카이는 그 말에 인상을 굳혔다.
저 말은 피스토가 연옥의 주인이지만, 연옥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라는 느낌의 말투였다. 저 대단한 신격이 느껴지는 피스토 조차 그에 종속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상관없다.”
상대가 뱀을 다시 일으켰지만, 저건 온전한 뱀이 아니다. 하늘에서 추락한 순간부터 그 격조차 떨어진 존재. 늑대에게 죽어 그 시체만 일어난 지금은 더 추락한 존재는 9성의 언저리에 걸쳐져 있을 뿐이다.
8성도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 수준.
게다가 카이도 작정하고 있었다. 피스토는 자신이 상대하겠다고.
그런데 연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전력을 다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눈앞에서 날개를 펼치고 있는 피스토의 격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허리까지 핏물이 잠겨 오지만 카이 주변에는 핏물도 다가오지 못했다. 원한다면 이 핏물도 모두 날려버릴 수 있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곳에 힘을 낭비하고 있을 수 없었다.
카이는 늑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는 손을 올렸다. 늑대가 돌아보자 카이가 미소를 지었다.
“신지로 먼저 가 있어. 그곳에서 독을 해독해. 사슴이 있으니 가능하잖아.”
<혼자서는 무리다.>
“내가 왜 혼자야. 이건 인간 모두가 나선 싸움인데.”
그리 말한 카이가 늑대를 강제로 공간 이동시켰다. 늑대의 능력과 격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얼마나 망가졌는지 가능했다.
저항하지 못한 늑대를 보낸 카이의 시선이 저 앞에 있는 피스토를 향했다.
피스토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세계를 위해 나를 버렸던 그녀에게 눈으로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이 가장 아픈 순간일 거야.>
피스토는 그리 말하며 카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세계가 연옥에게 잡아 먹히는 중입니다. 이건 시간 싸움이에요.>
그 말에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래 끌 마음은 없었다.
“알아. 그러니 제대로 붙자.”
카이가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핏빛 뱀이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핏물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것은 피로 만들어진 시체들. 지금까지 연옥으로 들어간 수많은 존재.
그렇게 달려드는 수많은 이들의 앞에서 카이가 나설 것도 없었다. 기사단부터 시작해서 이곳에 남아있던 모든 이들이 앞으로 치달렸다.
그들이 시체들과 싸우는 동안 뱀이 움직이자 위훌루, 맥클렌에 이어 테오르와 마야까지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쏟아내는 공격이 뱀에게 통했다.
연옥에서 나온 뱀은 확실히 그 격이 떨어져서 그런지 8성급 강자들과 치열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만만한 녀석은 아니었다.
피스토는 앞으로 나서지 않은 채 뱀과 시체만 일으킨 채 여유 있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카이는 그 모습을 보고 마력 사슬을 날려 보냈다.
피스토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마력 사슬에 웃음을 터트리고는 가볍게 날개를 펄럭였다. 그 날갯짓을 따라 움직인 것은 핏빛 칼날.
연옥의 힘을 끌어다 쓰는 피스토는 카이가 펼친 태초의 순수 마력을 이용한 마력 사슬도 간단히 잘라냈다. 그 힘의 연원을 파악한 카이가 입을 열었다.
“연옥의 힘을 쓰는 건가?”
<연옥도 지금 제 뜻을 따라주는지 협조 잘 해주네요.>
피스토는 그리 말하더니 손뼉을 쳤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7성 이상의 강자들과 그들이 부리는 기사단. 그들에게 단순히 수로 덤벼드는 것은 무용하다고 할만했지만, 그것도 일정 수준일 때의 이야기였다.
죽여도 죽여도 핏물 속에서 일어나는 시체는 끊이지 않고 그 세를 불려갔다. 그 압도적인 물량 앞에서 하나둘 목숨이 끊어지고 있었다.
카이는 뱀과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을 보고는 마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거리를 벌리고 있는 지금 카이의 마법 폭격이 시작됐다.
태초의 속성 일곱 개를 이용해 쏟아내는 마법이 매섭게 날아드는 데도 핏빛 날개를 이용해 모두 받아내는 피스토는 여유 있어 보였다.
피스토는 그렇게 마법을 막아내면서도 카이만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자신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카이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이 참 재밌지 않습니까?>
피스토는 그런 카이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 보았다. 둘 사이에는 계속해서 마법의 폭격이 쏟아지고 있는 데도 그는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저도 그랬던 적이 있었죠. 누구보다 더 믿었고, 지켜주고, 아꼈던 존재가. 그러나 제 등에 칼을 꽂아 넣었던 존재가.>
피스토의 눈에 깃든 것은 광기였다. 피스토가 손짓하자 카이는 자신의 주위로 일어서는 존재들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뱀이었다.
모두 세 마리나 되는 뱀.
카이가 솔직히 놀라서 돌아보자 그런 그를 향해 피스토가 미소 지은 채 말했다.
<연옥에 든 존재의 힘을 연옥의 힘을 빌려 투사하는 겁니다. 재미난 재주 아닙니까?>
피스토의 말에 카이는 코웃음을 쳤다.
“고작 이 정도로?”
실제 뱀이라면 카이도 작정하고 힘을 투사해야 한다. 신조까지 이용해서.
그러나 저것들은 그저 격이 떨어진 뱀의 복사품들. 그런 존재 앞에서 카이는 태초의 속성들을 하나로 합쳤다. 이곳에 머물면서 단순히 황도에 대한 지배력만 높이고 있던 건 아니었다.
카이의 손에서 태초의 속성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과거에는 태초의 속성 일곱 개를 하나로 모으는 것만 해도 사활을 걸었어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단번에 어우러진 태초의 속성들이 일곱 빛깔 신조의 색으로 변했다.
신조가 아니어도 칠채마력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긴 카이가 만들어낸 칠채마력이 사방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투콰콰콰쾅!
일곱 빛깔 동심원이 퍼져 나가면서 주위를 휩쓸었다. 일어선 세 마리 뱀은 물론이고 그 뒤에서 일어난 수많은 시체도 휩쓸려 나갔다.
칠채마력의 폭풍에 휘말린 이들이 모조리 싹 쓸려나갔다.
피스토는 그 모습에 살짝 미간을 굳혔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당신은 내 상식을 뛰어넘는 분이군요.>
신조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칠채마력을 다룰 수 있다. 물론 가장 강력하게 이 힘을 쓰려면 신조를 이용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신조에게 기대지 않아도 칠채마력을 이용한 마법을 쓸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연옥의 힘을 부술 수 있었다.
그러나 피스토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다시 핏물에서 시체들이 일어섰다.
<연옥의 힘은 무한합니다.>
“그래 보이네.”
이런 식으로 서로 힘을 소모한다면 카이에게 이로울 것이 없었다.
그런 카이의 앞으로 아나벨 성녀가 나섰다.
“제가 도울게요.”
아나벨이 그들의 앞으로 나서서 양손을 모으자 그 모습을 본 피스토가 웃음을 터트렸다.
<시엘의 종이군요. 그녀의 남은 힘을 끌어모은 아이. 가련한 아이.>
피스토는 그리 말하고 양팔을 펼쳤다. 그의 뒤로 솟구치는 뱀들을 보며 카이가 아나벨을 막으려고 할 때 그녀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녀의 손이 향한 곳은 피스토.
그녀의 손끝에서 교황청 위에서 보았던 거대한 검이 나타났다. 시엘의 신성력을 극한으로 모아서 쏘아내는 심판의 검.
그 위력은 이미 보아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정도로 당할 만큼 만만한 놈은 아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심판의 검은 피스토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너무나 적랄하게 꽂힌 심판의 검에 카이마저 당황할 정도였다.
피스토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심판의 검을 내려다보며 울컥 핏물을 토했다.
그 모습에 카이와 아나벨이 모두 당황할 정도.
이렇게 거하게 등장한 녀석이 이리도 쉽게 무너지려는 건가?
그런데 피스토는 가슴에 검을 꽂은 채 정말로 뒤로 넘어갔다. 혈해 위로 대자로 뻗어버리며 찬란하게 튀어 오르는 핏방울들.
아나벨은 그 모습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자신이 품고 있던 모든 신성력을 바닥까지 끌어 내서 쏘아낸 심판의 검이었으니까. 그 일격이 통했다는 것에 아나벨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나벨이 카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성공한 건가요?”
그러나 카이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아무런 답도 해줄 수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으니까.
“···아?”
갑자기 전해져 오는 격통에 아나벨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휘청이는 걸 보고 다가간 카이가 그녀를 부축했다.
“이게 어떻게 된···?”
카이가 그녀를 부축한 채 고개를 들자 혈해 속에서 슬그머니 피스토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는 씨익 미소를 지은 채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그의 가슴에는 여전히 심판의 검이 꽂혀 있었다. 그런 심판의 검 손잡이를 잡은 피스토가 카이를 바라보며 천천히 검을 자신의 가슴으로 밀어 넣었다.
“끄흑!”
아나벨이 비명을 지르며 휘청이고 그녀의 가슴에서 피가 용솟음친다. 카이가 황급히 칠채 마력으로 만든 창을 날렸지만, 피스토는 그걸 훌쩍 날아서 피하고는 검을 마지막까지 쭉 밀어 넣었다.
“꺄아아악!”
아나벨의 몸이 크게 들썩이더니 고개가 옆으로 스러졌다. 카이가 어떻게 할 틈도 없었다.
아나벨이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을 보고 고개를 드니 피스토가 진한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시엘을 직접 만날 줄 알고 준비한 거였습니다. 그녀가 펼치는 검을 되돌려줄 생각으로 준비한 거였는데 엉뚱하게 걸려들었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싱글벙글 웃고 있는 모습이 오싹하게 느껴졌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제가 한 거 아닙니다.>
스스로 끝까지 밀어 넣은 주제에 저런 말을 지껄이는 모습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피스토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으며 중얼거렸다.
<시엘이 마지막 남긴 종이 자신 때문에 죽은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는군요.>
피스토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에 카이는 아나벨을 자신의 뒤에 눕혔다. 그리고 아나벨의 눈을 쓸어 감겨 주었다.
시엘이라면 피스토와 상극이라 큰 문제는 생기지 않으리라 여겼다. 설마 시엘의 신성력에 대비해 놓았을 줄은 몰랐다.
자신과 인연이 있던 아나벨이 이리 허망하게 죽을 줄이야.
시엘이 세계에 뿌려놓은 모든 신성력이 사라졌다. 그녀의 죽음으로 시엘이 더는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카이는 천천히 일어나 아직도 보석을 흡수하고 있는 퀸을 내려다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혈해에서 일어난 수많은 시체와 뱀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장. 그리고 그런 곳들을 배경 삼아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피스토.
그자를 바라보던 카이의 머리 위에서 신조가 날아올랐다. 카이가 말하지 않아도 그와 생각을 공유하는 신조가 일곱가지 빛을 찬란하게 뿜어내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조의 몸이 점점 커져 그 날개가 카이를 뒤덮을 정도가 되자 피스토도 전율을 느끼던 것을 멈추고는 손을 옆으로 뻗었다.
취리릭.
바닥의 핏물이 치솟아 피스토의 손에 잡혔다. 흉흉한 가시가 가득한 채찍을 만들어낸 피스토가 카이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예언을 봤죠?>
“그래. 시엘이 했던 예언을 들었다.”
<그런데 그 끝은 보지 못했을 겁니다.>
어떻게 아나 싶어 바라보니 피스토가 진한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그 끝은 저도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럼 이제 주인공이 무대에 오를 시간입니다.>
이 세계의 운명을 건 싸움을 하자는 말에 카이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에 모아놓은 칠채마력을 길게 늘였다. 그의 양손바닥 사이에서 늘어지는 칠채마력이 흉흉한 빛을 뿜어냈다.
“그래. 네가 죽을 시간이다.”
돌싱 후 대마법사-연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