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보옥
카이는 아나벨 성녀를 찾아 그녀의 곁으로 공간 이동했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그녀와 얘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이동한 카이는 아나벨 성녀가 끌어안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델라니.
전대 성녀였던 그녀가 아나벨의 품에 안겨 있었다. 카이는 시선을 돌리다가 그 옆에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여인도 볼 수 있었다.
마베르니.
시엘의 눈이었던 그녀. 미래를 보던 예언자인 그녀도 델라니의 곁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미 숨이 끊어졌음을.
다만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는 것을 보니 그 마지막은 그녀가 원했던 대로였나 보다.
카이의 시선이 아나벨을 향했다.
“왜 제게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건 성전이라고 하셨어요.”
아나벨 성녀가 누구의 말을 전해주는 것인지 단번에 알아들은 카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델라니를 내려다보았다.
“어쩌다 그리되었습니까?”
“심판의 검을 부르기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카이는 심판의 검이 수많은 목숨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심판의 검을 발동한 자 또한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주문을 발동한 전대 성녀 델라니는 자신의 목숨 또한 희생했다.
비뚤어진 믿음이었으나 그 믿음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졌다.
그것으로 다른 이들의 죽음을 갚을 수는 없지만, 아무리 카이라고 해도 죽은 이를 되살려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강령을 이용하면 가능할지는 몰라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계획은 실패했고, 이번 일로 이 대지에 마르스의 저주가 내려졌다.
더는 성녀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그 예언.
카이의 시선이 아나벨을 향했다. 정말 그 예언이 사실이라면 아나벨은 최후의 성녀가 될 터였다.
마르스의 저주는 단순한 저주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성혈을 쏟아내 시엘의 은총이 가득했던 땅의 은총을 거둬갔다. 그리고 피스토를 해방시켰지.
카이는 아나벨을 내려다보다가 마르스의 저주에 대해 알려주었다.
“전쟁의 신 마르스의 화신이 쏟아낸 것은 성혈이었고, 그 성혈을 통한 저주로 시엘의 성녀는 더는 나오지 않을 거라 하였습니다.”
아나벨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에 멍하니 카이를 바라보았다.
“성녀님이 마지막 시엘의 성녀님이라는 얘기입니다.”
“그게 무슨···?”
성녀는 대륙에서 굉장히 높은 대우를 받는 교국의 얼굴이지만, 대를 이어서 물려받는 직위였기에 그만큼 큰 인정을 받지는 못 했다.
마법사든 육체 강화자든 7성에 오르기까지 막대한 재능과 재물, 노력까지 들어가는 것과 반대로 한 대에 꼭 한 명씩 나오는 성녀는 시엘의 선택으로 이뤄지는 것이었으니.
그러나 마지막 성녀라면 그 이름의 무게가 달라진다. 단순히 성녀로 불리던 그녀의 이름이 역사에 한 줄 남게 생겼다.
카이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을 이었다.
“피스토의 일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예언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일 뿐이니까요.”
“죄송합니다. 봉인지를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교국의 회복에 집중하십시오.”
그리 말을 마친 카이가 공간 이동으로 사라지자 그곳을 지켜보던 아나벨은 망연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는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성녀의 기도에 언제나 답하던 시엘은 아무런 답도 보내지 않았다.
카이가 향한 곳은 신지였다.
칼리에게 들르지 않고 곧장 신지로 이동한 카이를 보고 늑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전쟁에 미친 놈이 나타났나?>
“맞아. 제대로 미친 놈이더군.”
카이의 대꾸에 늑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말을 듣기에 충분할 정도로 마르스는 전쟁에 미친 놈이었으니까.
지금은 밀려나 잊힌 존재가 되었을지 몰라도 그 성정은 늑대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지?>
“시엘의 땅에 제 피를 쏟아내고 저주를 내리고 죽었지.”
<그렇다면 시엘의 뜻은 더는 세계에 닿지 않겠군.>
“다시는 성녀가 태어날 수 없을 거라 던데 그게 그런 뜻이었나?”
<그래. 그런 뜻이다. 놈의 복수는 성공했군.>
카이는 그 말에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헥토르라는 존재 자체가 불가해의 존재이기는 했다. 그는 카이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성장을 보였고, 마르스를 품었다.
그 모든 것이 마르스의 뜻이었다는 걸까?
수많은 이에게 신성력을 나눠주는 시엘과 다르게 오직 하나에게만 그 재능을 몰아줘서 자신의 화신으로 삼은 것은 아닌가 싶었다.
잠시 헥토르에 대해 회고하던 카이는 곧 마음을 다잡고는 입을 열었다.
“그보다 돌려줄 물건이 있다.”
<뭐지?>
카이는 품에서 보옥을 꺼내 들었다. 그걸 본 늑대의 눈이 커졌다.
<보옥을 어디서 찾은 거냐?>
카이는 순순히 답해 주었다.
“마르스의 몸에서 나왔어.”
늑대는 그 말에 전후사정을 이해했다.
<그래. 마르스가 현현하기 위해서는 보옥의 힘이 필요했겠지. ‘뱀’이 그걸 가지고 신지를 벗어난 것부터가 모두 이렇게 되기 위해서였던 건가?>
카이는 그 말에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리고 너는 나를 택했지.”
당시에는 한참이나 부족했던 카이를 택한 늑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카이는 늑대의 두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보옥을 되찾아 왔으니 너도 달을 삼킬 만큼 강해지는 건가?”
<무슨 소리냐? 보옥을 되찾았으니 나도 분명 도움이 될 테지만 달을 삼키라니? 저 태양과 달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거냐?>
“어떤 의미인데?”
일식에 뱀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알고 있었기에 묻자 늑대는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설명해주었다.
<세계를 이루는 근원 중 하나이다. 너의 신조와 같지.>
“뭐?”
<이 세계에 허락된 단 하나. 둘이 존재할 수 없는 것. 나눌 수도 없는 것이다. 그 존재 자체가 세계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이지.>
어떤 느낌인지 대충 이해했지만, 자신의 신조는 만들어낸 것이다. 그 의문을 읽었는지 늑대가 답해 주었다.
<그렇기에 네가 대단한 것이지. 너는 세계에 새로운 구성 요소를 끼워 넣은 것이니까. 그렇기에 자격이 있는 것이다.>
“자격?”
마르스도 같은 말을 했었다.
늑대는 그런 카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세계는 조금씩 발전해 갔다. 지금까지 나타났다가 스러져간 신들의 발자취가 이 세계의 역사가 되었고, 누군가가 지면 누군가가 떠오르는 것이 이치. 그 인과는 너로 인해 비틀렸으나 네가 떠올랐기에 누군가는 질 것이다.>
카이는 늑대가 말하는 범주가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격.
마르스가 말했던 자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보옥을 모두 되찾았으니 나도 준비하겠다. 어찌 되었든 너에게 부탁한 것을 들어주어 고맙구나.>
늑대는 ‘뱀’이 벌인 일 때문에 카이를 선택해 도움을 요청했고, 카이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늑대는 그 은혜를 갚을 생각이다.
“그럼 일식 때는 부탁하지.”
그 말을 끝으로 카이는 공간 이동으로 떠나갔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카이가 떠나니 신지에 가득했던 기운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홀로 신지에 깃든 기운만큼이나 거대한 기운을 품은 자.
스스로 격을 갖추고, 이제는 세계에 이름을 남긴 자.
그와 함께 할 시간을 생각하며 늑대는 천천히 앞발 사이로 머리를 묻었다. 신지를 지켜주던 보옥들이 서로 공명하며 그 힘을 늑대에게 전해주기 시작했다.
교국의 몰락은 대륙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7성급 강자들이 일시에 사라져 버려 혼란이 몰아쳐 왔던 대륙은 교황청에서 수많은 신관과 성기사들이 죽어 나가고, 축복받았던 땅이 더럽혀졌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긴장했다.
무엇보다 대륙을 두려움에 떨게 한 것은 시엘의 신성력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시엘의 신성력은 오직 성녀에게만 남았고, 나머지는 신성력을 잃었다.
교황부터 말단 신관까지 머물렀던 시엘의 신성력이 모두 사라졌다. 그것은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이었고, 곧 대륙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남은 성녀가 될 거라는 말은 마르스의 저주대로 이뤄졌다.
카이는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아나벨 성녀를 바라보았다.
그 날 이후 처음 보는 그녀였다. 페코의 도움을 받아 비공정을 타고 온 아나벨 성녀는 성기사들과 함께 왔는데 그녀를 본 카이의 표정은 묘하게 변했다.
시엘의 신성력이 사라졌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황도에 나와 있던 이들도 모두 신성력이 사라졌으니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으리라.
지금 보니 성기사들도 모든 신성력을 잃었다. 고된 훈련을 했지만, 저들은 마력 대신 신성력에 기댔던 이들. 그런 만큼 그들의 성급은 형편없이 하락했다.
신성력에 길들어진 그들의 몸은 마력도 다루지 못했다.
그래도 평생을 검을 다뤘고 그 사명감만큼은 나무랄 곳 없었지만, 몰락한 시엘 교단을 보는 것 같았다.
카이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아나벨을 향했다. 그녀는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교국이 왜 신성력이 사라졌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르스의 저주로 시엘이 더는 성녀를 가지지 못하게 됐다. 게다가 시엘이 지금까지 축복을 내렸던 땅을 어지럽혀 더는 신성력을 내리지 못하게 했다.
그랬더니 시엘의 생각이 바뀌었나 보다. 시엘은 오히려 대륙에 내렸던 신성력을 모두 거둬 아나벨에게 주었다.
덕분에 아나벨은 지금 8성에 올라있었다.
최초의 8성급 성녀라는 것은 대단했으나 그만큼 서글픈 일이었다. 대륙의 모든 신성력을 한 사람에게 몰아넣어서 이룬 것이었던 만큼 저것이 시엘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마지막 성녀에 최초로 8성에 이른 성녀라는 거대한 무게가 아나벨의 어깨 위로 내려앉은 것도 알았다.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니고 억지로 짊어지게 된 일.
“괜찮으십니까?”
아나벨은 카이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막중한 사명을 얻었지만, 언제든 시엘님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칠 각오는 되어 있었어요.”
카이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일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아픔을 딛고 일어섰다.
그녀도 일식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아나벨이 물러가자 카이는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8성급 성녀.
생각지도 않았던 가능성이 손에 들어왔다.
듣자하니 시엘이 더는 기도에 화답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품고 있는 신성력은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뜬 우로보로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모든 소화를 마쳤고, 우로보로스는 전과는 비할 수 없이 커졌다. 공간을 지배할 수 있었기에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긴 채 몸집을 불릴 수 있었다.
본신의 힘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모든 영육을 즉시 소화가 가능한 정도가 되었다.
길이 3km까지 길어진 우로보로스는 곧 세계를 감지해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 세계에 가장 강력하게 잔향을 남겨 놓은 것은 저 하늘의 신 시엘이었는데 그녀의 잔향이 거의 사라졌다. 마르스의 성혈과 섞여 혼탁해진 세계는 우로보로스가 원하던 세계였다.
이제 곧 일식이 다가오면 세계의 구성 요소 중 하나가 잠깐이지만 사라지고 그때는 본신의 힘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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