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흙발
카이는 찾아온 페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는 무슨 일이야?”
<전해줄 말이 있다. 비밀로 해달라고 했지만, 그건 메르샤에게 부탁한 거고 나는 전해줘야 할 것 같아서.>
페코는 의지를 가진 바람의 정령. 그것도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수준인 페코였다. 메르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행동할 수 있는 존재.
홀로 자신을 찾아왔을 때부터 관심이 갔다.
<마베르니의 상태가 좋지 않아. 그런 그녀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자신의 마지막을 교국에서 맞이하고 싶다고 전했지. 예언은 이미 고해를 통해 잊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 그런데 마지막이라니? 곧 돌아가신다고?”
<맞아.>
예언하면서 점점 몸이 축나는 것을 알았지만, 벌써 끝이 다가오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런 와중에 자신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하고 교국으로 갔다는 것은 마지막을 그곳에서 정리하고 싶다는 얘기.
그걸 알았기에 카이도 굳이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아무리 델라니에게 금제를 당하고 교국의 부품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시엘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
그녀의 마지막을 존중해 줄 생각이었기에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그분의 뜻이라면 따라야지.”
페코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람에 녹아서 사라졌다. 페코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카이는 잠시 교국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를 구한 것은 구한 것이지만,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할 마음은 없었다.
카이의 비호 아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교국에서도 허튼짓은 하지 않을 터. 그녀의 뜻을 존중한 카이는 다시 눈을 감고 황도의 지배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교황청의 심처에는 교황과 대주교, 성녀 아나벨이 모여있었다.
교황 아론 라이드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전 성녀가 무슨 일로 이렇게 모이자고 한 건지 아시오?”
아나벨 성녀가 그 물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봉인지에 문제가 생겼다면 저에게 연락하셨을 텐데 그런 말씀은 없으셨어요.”
베르너 대주교는 팔짱을 낀 채 답했다.
“어제 비공정이 한 대 도착했었는데 그때 온 손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비공정이 곧장 봉인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나온 무녀가 데리고 간 통에 누군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소?”
아론 라이드가 수염을 쓰다듬는 사이에 회의실 문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델라니가 살작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소. 대체 무슨 일이오?”
델라니는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고, 그녀의 뒤를 따라 마베르니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본 아론 라이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베르니?”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마베르니가 양손을 가슴에 모으고 살짝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건네자 아론 라이드가 얼른 달려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예언을 그만두고 수녀원에 들어가 지낸다는 말을 들었소. 종말의 예언을 본 것만 해도 그대는 교국의 역사에 남을 것이오.”
모든 예언에는 예언가의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된 예언.
마베르니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일단 앉으세요. 또 다른 예언에 대한 얘기를 할 생각이니까요.”
그 말에 모두가 자리에 앉자 마베르니가 입을 열었다.
“예언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예언?”
아론 라이드가 빠르게 베르너 대주교와 아나벨 성녀를 바라보았지만, 둘은 전혀 모르는 기색이었다. 델라니는 뭔가 아는 것 같았지만,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마베르니의 예언을 그녀가 말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으로 보였기에 아론 라이드도 시선을 돌려 마베르니를 바라보았다.
“투신이 오고 있어요.”
“투신 헥토르 말이오? 그가 이곳에 무슨 일로 온단 말이오?”
이곳은 단순한 교황청이 아니다. 교국의 설립 이후 꾸준히 시엘의 가호가 닿아 있는 땅.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상대가 아무리 8성의 투사라고 해도 쉬이 허튼짓을 벌이지는 못한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벌써 와서 난장을 피웠을 터.
그러다 보니 서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다. 투신이 8성에 오르고 나서는 그에 대한 암살 시도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투신이 이곳에 온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도 마베르니가 직접 찾아와 예언을 전해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은 아론 라이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 교국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것이오?”
“교국이 무너지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교황청을 지키기 힘들 거예요.”
아론 라이드는 마베르니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예언이 잘못되었다고 웃어넘길 것이었다면 델라니가 그녀를 이곳까지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일.
아론 라이드의 시선이 아나벨 성녀를 향했다.
“그렇다면 9성에 이른 신조의 대마도사에게 부탁해서 그를 막는 것이 어떻겠소? 그라면 능히 그자를 막을 수 있을 터인데.”
그 말에는 델라니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왜 그렇소?”
델라니는 아론 라이드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성녀에서 내려와 봉인지를 지키는 그녀는 교단 외부에서야 그 영향력이 사라졌다고 하나 아직 그녀와 함께 교국을 이끌었던 이들은 그녀를 기억하고 힘을 보태줄 터였다.
그러니 귀를 기울여줄 의향은 있었다.
“상대가 투신이기 때문이죠. 그는 전쟁의 신 마르스의 대변인으로서 이곳에 오는데 다른 이의 힘을 빌려 그를 막겠다고요?”
아론 라이드는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았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눈에 깃든 서슬 퍼런 기세를 읽고 입을 다물었다.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해결할 방법이 있는데도 그 방법 대신 교도들의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한다는 이야기.
그러나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델라니는 전쟁의 신 마르스 교단을 이단으로 선정, 성전을 치렀던 장본인이었으니까.
이단과의 싸움에 다른 이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여길 터였다. 다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교국이 입어야 했다.
아론 라이드의 시선이 베르너 대주교를 향했다. 그 눈빛의 뜻을 읽은 베르너가 입을 열었다.
“이단을 상대하는데 다른 이의 도움을 받는 것은 안 될 말입니다. 그러니 신조의 대마도사를 본 교국이 품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조의 대마도사가 시엘 교를 믿는다면 다 해결될 일이다.
“투신이 직접 이곳에 온다는 건 그때 끝맺지 못했던 성전이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시엘을 받아들이지도 않은 신조의 대마도사에게 일을 맡길 수는 없어요.”
델라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시엘의 은총이 내린 땅. 성지에서의 싸움에서 다른 이의 조력이 필요하다면 후대에서 우리를 비웃을 겁니다.”
델라니의 기세에 모두 입을 다물었지만, 아나벨 성녀는 달랐다.
“하지만 너무 많은 피가 흐를 거예요.”
오랜 시간 시엘의 은총이 내린 이 땅에서 싸운다면 승리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8성의 투사라면 얼마나 많은 피를 뿌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델라니는 그 말에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흘려야 한다면 흘려야지. 가장 먼저 내 피를 흘릴 거다.”
아나벨 성녀도 더는 말을 꺼내지 못할 정도로 서늘한 말투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당장 성전 체재로 돌입하고 무녀들을 소집해주세요.”
그 말에 아론 라이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뭘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델라니는 담담히 대답했다.
“감히 성지에 더러운 흙발을 내딛으려는 저 이단자에게 철퇴를 내릴 생각이죠.”
투신 헥토르는 저 멀리 보이는 교황청을 바라보았다. 교국 내에서도 최심지.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신성 교국의 전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저곳에 오랜 시간 내려져 축적된 시엘의 신성력도 문제였다.
저곳에서 싸운다면 저들은 더 강력한 힘을 낼 것은 물론이고, 시엘이 직접 개입할지도 모를 일.
그렇기에 이곳에 왔다.
전쟁의 신 교단을 이단으로 지정하고 성전을 벌여 그들 모두를 죽였던 자들.
그 오만한 자들에게 철퇴를 내릴 때가 되었다. 그걸 위해 이 오랜 시간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헥토르는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려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는 보옥을 꺼내 삼켰다.
헥토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천천히 돌아가면서 짜릿함을 느꼈다.
머리가 열리는 것 같은 느낌.
헥토르의 눈이 흰자위만 남았을 때 하늘의 구름이 흩어지며 한줄기 빛이 그에게 떨어져 내렸다.
우르르릉.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지가 울리며 헥토르의 몸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흰자위만 남아있던 눈에서 광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눈에서 빛을 뿜어내며 허공에 떠오른 헥토르가 교황청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론 라이드는 저 멀리 다가오는 존재를 보았다. 교황청의 외부를 지키던 신성 보호 마법진은 전시 체계라 평상시보다 다섯 배는 되는 두께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이 속절없이 부서졌다.
저 멀리 허공에 떠서 다가오는 존재.
투신 헥토르가 찾아올 거라는 예언은 들었지만, 저건 투신이 아니다.
아론 라이드는 교황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오랜 시간 신성력을 접해왔기에 안다. 저건 신성력을 품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신을 품었다.
신의 강림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교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그런 시도가 없었을까?
그러나 그 모든 시도가 폐기 되었던 것은 인간의 부름 정도로 신이 움직이지도 않지만, 신의 강림을 몸에 담을 수 없다. 신의 그릇이 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만한 경지에 오른 자가 스스로 몸을 신에게 맡긴다는 것이 믿기지 않기도 했고.
“정말 신조의 대마도사의 도움 없이도 될까?”
헥토르는 그저 다가올 뿐이다. 그런데 신성 마법진이 박살 나고 그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한 공격들이 모두 무위로 돌아간다.
다만 헥토르가 다가오면서 건물이 무너지고, 바닥이 으깨진다. 그 앞을 막는 교병들도 핏물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대적할 수 없는 존재가 다가올수록 죽어 나가는 이들이 많았다.
“저 죽음마저 희생 주문으로 사용한다는 얘기지?”
“예.”
8성급 강자인 투신 헥토르를 상대하기 위해 교병들마저 희생 주문의 재료로 사용해서 대적하려는 델라니의 계획을 막지 못했다.
8성이란 그런 존재였다.
이단으로 몰아넣었던 투신 헥토르가 교황청을 쳐들어오는 상황. 성지를 지키기 위해서 과감한 결단을 내린 델라니였지만, 과연 그들이 준비한 희생 주문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희생 주문은 신성 마법의 위력을 가장 강력하게 끌어올릴 수 있는 동력이었다. 신심으로 가득한 이들의 죽음으로 대규모 마법이 준비되는 중이었다.
아론 라이드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투신 헥토르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머리 위로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화창한 하늘을 가리는 먹구름.
아론 라이드가 주먹을 꼭 쥐었다.
교황청에 머무는 이들 중 전투에 특화된 이들을 제외하고 모두 다른 곳으로 보냈다고 해도 벌써 천이 넘는 이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는 점점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이게 맞는 일인가 싶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희생자가 늘어날수록 교황청의 중심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빛이 강해지고 있었다.
그동안 시엘의 축복을 받아 쌓였던 신성력과 희생 주문의 의념을 담아 성녀가 담아 발현할 수 있는 가장 막강한 마법.
성서에서 과거 피스토를 징벌했던 심판의 검을 흉내 낸 최강의 마법으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마법이었다. 그만큼 교황청이 위협받은 적이 없기도 했었지만, 그 위력 만큼은 확실하다고 알려졌던 마법이 완성되었다.
하늘에 떠오른 찬란한 빛의 검. 그 검의 길이만 30미터가 되는 검이 투신 헥토르의 머리 위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신성력으로 만든 빛의 검이 빛의 속도로 떨어져 내렸고, 그대로 투신 헥토르의 몸을 뚫고 박혔다.
투신 헥토르가 피하지 못한 모습에 아론 라이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피하면 어떻게 하나 고민했는데 성공적으로 마법이 적중했다.
빛의 검에서 터져 나오는 강렬한 신성력의 폭풍이 교황청 전역을 휩쓸었다. 그 거센 폭풍에 휘말려 으스러지는 건물들을 보면서도 아론 라이드의 눈은 투신 헥토르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거센 먼지 바람이 사라진 곳에서 투신 헥토르가 환한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돌싱 후 대마법사-이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