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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 후 대마법사-137화 (137/150)
  • 137화 헤딥

    폭풍의 기사 안드레스는 자신의 손에 낀 반지를 바라보았다. 카이가 찾아와 넘겨 주었던 소환의 반지. 종말의 날에 소환할 거라고 했던가?

    종말이라는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이 반지는 빠지지도 않았다. 7성에 이른 그가 반지 하나 빼지 못하는 상황이 우스웠는데 이거 반지를 빼려면 손가락을 잘라내야 할 것 같았다.

    태연히 자신 앞에 나타나 손을 잡고 반지를 끼워주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공을 지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제야 알았다.

    그 시간 속에서 오직 그 혼자 움직였는데 손을 쓸 겨를도 없이 반지를 껴야만 했다.

    카이가 다 끝나고 설명해주지 않았어도 할 말이 없었으리라.

    그때의 무기력함을 느낀 이후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더는 올라갈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 더는 수련에 집중하지 않았던 그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 무기렴감을 덜어낼 수는 없었다.

    반지를 만지던 안드레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의 맞은편 의자에 거구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반사적으로 검을 잡아가던 안드레스의 손이 우뚝 멈췄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천천히 손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움직임이 한없이 느리다.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이런 감각은 얼마 전에 느꼈었던 것. 눈동자만 굴려 앞을 바라보자 거구의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이 시간 속에서 홀로 움직이는 자.

    9성에 달한 카이가 보여줬던 신기를 보여주는 자는 태연하게 다가와 안드레스의 손가락을 잡아 비틀어 뽑았다.

    검을 쥐러 가던 손가락이 뜯겨 나가는 데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던 것.

    “그때는 잘도 빠져나갔었지?”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깨달은 안드레스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 괴물 새끼가 다시 움직일 줄이야!

    일부러 제국에 몸을 의탁해서 살아남았는데 태연하게 자신을 찾아왔을 줄은 몰랐다.

    헥토르는 태연하게 안드레스의 손가락을 뽑으며 미소를 지었다.

    “입이 화를 부른다고 하지 않았더냐?”

    안드레스는 그 말에 이를 뿌득 갈았다. 전쟁의 신을 비난했던 것은 교국의 대주교를 만나 술잔을 나누던 때에 나온 이야기였다. 다른 곳에서 그 이야기가 나올 일이 없었는데 어떻게 알아냈는지 추적을 시작했다.

    그 때문에 제국까지 도망쳤는데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이 광신도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손가락을 잡아 뽑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손가락 다섯 개를 모조리 잡아 뽑은 헥토르가 뒤로 물러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헥토르가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자 시간이 다시 흘렀다. 안드레스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비명을 참았다.

    “비명을 지르면 죽이려고 했는데 용케 참았네?”

    안드레스는 자신의 손가락이 잘리면서 바닥에 떨어진 소환 반지를 바라보았다. 저걸 손에 끼워줬을 때 이걸 빼고 싶으면 손가락을 자르라고 했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로 반지를 빼내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올 터였다.

    남에게 자신의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었지만, 곧 그가 올 터였다. 그래서 안드레스는 미소를 지었다.

    헥토르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쭈? 웃어?”

    안드레스는 그 물음에 씨익 웃고는 답했다.

    “네가 부른 거다?”

    헥토르는 그제야 안드레스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깨닫고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 신조의 대마도사를 기다렸나?”

    헥토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의 뒤편 공간이 일그러지다가 밀려났다. 그리고 그대로 돌진한 헥토르의 주먹이 안드레스의 머리를 박살 냈다.

    그때 밀려나던 공간이 그대로 멈추고 찢어지며 카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

    카이가 헥토르를 확인하고는 손을 뻗을 때 헥토르가 씨익 웃었다. 9성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보고 싶었던 카이였다.

    자신이 지배한 공간을 찢어내고 안으로 들어온 것만 보아도 그의 지배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공간에 서 있으니 더 여실히 느껴진다.

    그렇기에 확신한다.

    카이는 자신의 공간 이동을 막지 못한다.

    “다음에 보자고.”

    그 말을 끝으로 헥토르가 어둠의 뱀과 함께 공간 이동으로 사라졌다.

    눈앞에서 멀쩡히 사라지는 헥토르를 보며 카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제국의 황궁에서 소환 반지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았다. 손가락을 자르기라도 하기 전에는 뺄 수 없도록 조치를 해놓았다. 7성급 기사가 손가락을 포기할 리는 없었다.

    그래도 확인차 공간 이동을 했는데 밀려났다. 뱀이 결계를 쳤을 때가 생각나 강제로 잡아 찢고 공간 이동을 했더니 눈앞에서 안드레스의 머리가 박살 났다.

    그런 짓을 벌인 것이 헥토르.

    시공을 지배하는 카이였기에 만난 순간 끝을 내려고 놈이 존재하는 공간을 틀어쥐고 찌그러트렸다. 그런데 오히려 놈이 있는 공간은 찌그러트릴 수 없었다.

    그리고 놈은 유유히 빠져나갔다.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시공을 지배하기 시작했다고?”

    스치듯 만났지만, 놈이 9성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시공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건 그가 8성을 넘어 9성에 한 발 걸쳤다는 얘기였다.

    ‘뱀’과 함께 있으면서 뭐라도 배운 건가?

    ‘뱀’과 피스토만 신경 썼더니 자신을 제외하고 9성에 한 걸음 다가선 이가 또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뱀’의 편에서.

    카이는 안드레스가 떨어트린 반지를 주워들고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를 보았다.

    “곤란하게 됐네.”

    소환의 반지에 문제가 생긴 걸 알고 자신이 온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카이가 소환의 반지를 나눠 준 것은 ‘뱀’이 모르게 일을 벌인 것. 그런데 뭘 알기라도 한 것처럼 대뜸 7성급 기사 폭풍의 기사 안드레스를 잡으러 왔다.

    마치 자신을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환의 반지를 떨어트려서 시선을 잡아끌었고, 직접 자신을 시험해 보기도 했으니까.

    카이로서는 기가 막힐 따름이다.

    자신의 계획이 들킨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7성급 이상은 되어야 결전의 날에 도움이 될 거라 여겨서 소환의 반지들을 줬더니 그중 하나가 죽어버렸다. 반지의 존재를 알아챈다면 남은 7성급 강자들도 위험해진다.

    카이는 쓴웃음을 짓고는 소환의 반지를 주워들고 공간 이동으로 자리를 떠났다.

    헥토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깨달은 카이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영지였다.

    퀸이 지키고 있고, 페코도 있어 걱정하지 않았었는데 헥토르가 8성을 반쯤 뛰어넘었다면 아무리 퀸이라고 해도 걱정이 되었다.

    카이가 영지로 돌아오자 다들 한자리에 모였다.

    “황궁에서 준비하고 있겠다고 했잖아? 무슨 일로 온 거냐?”

    “헥토르 때문입니다.”

    “헥토르?”

    “예. 그가 시공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덴다르트는 그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시공에 간섭도 아니고 지배한다고? 너처럼?”

    “저보다는 아직 부족하지만, 제게 저항할 정도는 됩니다.”

    모두의 시선이 퀸을 향했다. 그 모습에 카이의 시선도 퀸을 향했다.

    “왜요?”

    퀸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이렇게?”

    황궁에서 시공을 지배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카이의 지배력은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그리고 가만히 있어도 주위를 자연스레 지배하게 되었는데 그 지배력을 과시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만약 지배력을 극도로 발휘하면 이곳에 있는 이들은 움직이지도 못할 테니까.

    그런데 퀸을 중심으로 시공에 대한 지배력이 밀려났다. 카이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지배력을 높였지만, 그녀를 중심으로 나타난 지배력은 카이의 의지에 반하고 있었다.

    헥토르에 비하면 아직 미약하지만 확실했다. 퀸은 자신의 주위에 대한 시공 지배력을 가졌다. 그건 카이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9성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시공 지배력을 가진 것은 헥토르만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야?”

    “얼마 안 됐어. 아직 보여줄 만큼은 아니라서 말 안 했는데.”

    카이는 그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헥토르의 등장은 치명적이라고 여겼다.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놈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걱정이 되어 찾아왔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퀸이 이게 가능하다면 헥토르를 막을 수 있다.

    카이는 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빠?”

    “역시 내 딸!”

    카이는 일행을 쭉 돌아보더니 말했다.

    “이사 가자!”

    “예?”

    아직 황도 지배가 끝나지 않았으니 지금 당장은 황도에서 몸을 빼내기 어렵다. 그러니 이들을 데리고 갈 곳이 있었다.

    신령족.

    대족장인 칼리는 자신의 앞에 불쑥 나타난 인파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카이는 그런 칼리의 손을 잡고는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칼리는 그런 카이의 손을 꼭 잡아주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뭘 하는지 빤히 아는데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보다 여기는 왜 온 거예요? 반가운 얼굴도 함께 왔네요.”

    퀸이 얼른 다가와 칼리의 반대편 손을 잡고 배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동생! 누나 왔어!”

    “누구 마음대로 누나야?”

    퀸은 오히려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그것도 모르냐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카이가 기막혀할 때 칼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훗. 맞아요. 아들.”

    “예?”

    “다음 대 대족장은 아들이라고요.”

    카이가 그 말에 빤히 바라볼 때 퀸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아빠 마음은 알겠어. 동생은 내가 지키라는 거지?”

    “그래. 부탁한다.”

    카이의 대답을 들은 위훌루가 인상을 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 소리야? 내가 지키고 있는데 퀸은 왜 불렀어?”

    “투신 아시죠? 저번에 붙어봤으니까.”

    “그래. 알지.”

    “그 투신이 문제입니다.”

    “그 정도는 내가 막을 수 있다.”

    카이는 그 말에 고개를 내젓고 퀸을 돌아보았다. 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공에 지배력을 풀면서 성큼 위훌루에게 다가갔다. 위훌루는 자신의 주위 시공이 굳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시간에 간섭하려고 해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

    퀸은 태연히 걸어와 검을 뽑아 위훌루의 어깨에 턱하니 걸쳤다. 위훌루의 뺨에서 주르륵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런 위훌루를 보고 미소를 지은 퀸이 지배력을 거뒀다.

    “허억.”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았다. 숨을 후 내뱉은 위훌루가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퀸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한 거지?”

    “벽을 반쯤 넘어섰다는 얘기지.”

    위훌루를 향해 미소 짓던 퀸이 검을 거두자 그가 긴 숨을 토해내며 물었다.

    “투신이 그 경지에 들었다고?”

    “그래. 투신이 그 경지에 들었어.”

    위훌루는 식은땀을 훔치고는 퀸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의 성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래도 벽을 마주할 줄 알았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라고 알려진 8성에 오르고도 수련을 게을리 한 적은 없지만, 그걸 넘어선 카이는 물론이고 그 뒤로 그 경지에 오른 퀸까지.

    정말이지 저 부녀는 매번 상식을 뛰어넘는다. 거기에 이제는 투신까지.

    “놀라울 따름이군. 이만한 경지에 드는 이가 하나도 아니고 한 시대에 몇이나 나오다니. 난 뭐했나 싶군.”

    자조 섞인 투덜거림에 카이는 칼리의 손을 꼭 쥔 채 말을 이었다.

    “퀸이 지켜주면 위험할 일은 없을 거예요.”

    퀸이 어느새 다가와 칼리의 손을 꼭 쥐었다.

    “내가 지켜줄게.”

    “그래. 잘 부탁해.”

    둘이 마주 보고 미소 지을 때 카이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을 알아서 노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만약을 위해서 퀸을 놓고 갈게요. 퀸이 있다면 위험할 일은 없을 겁니다.”

    카이는 잠시 더 시간을 보내고 떠났다. 칼리는 배에 손을 올린 채 퀸을 돌아보았다.

    “괜찮겠지?”

    퀸은 그 물음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빠를 걱정하는 거야?”

    퀸이 칼리의 배에 손을 올리며 답했다.

    “동생 얼굴 보기 전까지는 죽여도 안 죽을 사람이야.”

    돌싱 후 대마법사-또 다른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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