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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 후 대마법사-132화 (132/150)
  • 132화 강령

    시무스가 정신을 차린 것은 코를 파고드는 주향이었다. 칼라한을 처음 얻을 때 열은 이후로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칼버그 28.

    만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대륙 최고의 명주.

    그 향을 맡은 시무스가 몸을 일으켰다. 턱을 이리저리 돌려본 그는 통증이 없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정면에서 퀸을 마주했던 그는 알고 있었다. 퀸이 자신을 어떻게 쓰러트렸는지.

    그녀는 시간을 뚫고 다가와 다른 시간 속에서 주먹을 날렸다. 믿을 수 없게도 퀸은 8성에 이른 기사였다.

    꿈에나 그리던 벽 너머의 강자.

    카이의 밑에는 뭐 이런 괴물들만 있다는 건가?

    그러다가 자신이 왜 깨어났는지 기억한 시무스가 눈을 번쩍 떴다.

    “칼버그 28?”

    이제 다섯 병밖에 남지 않은 명주 중의 명주.

    이 주향은 잊을 수 없었다.

    “안 돼!”

    시무스가 마치 시간의 벽이라도 뚫을 것처럼 전력으로 달려 도착한 곳에서는 느긋하게 술을 즐기는 이들이 있었다. 바닥을 구르는 것이 벌써 네 병.

    마지막 한 병을 따서 술잔에 따르는 모습을 보고 시무스가 칼라한의 손에 들린 술잔을 잡아챘다.

    “칼라한.”

    칼라한은 입맛을 다시고는 시무스가 술을 단숨에 비우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 한 잔을 비운 시무스가 주륵 눈물을 흘렸다.

    “이게 마지막이군.”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칼버그 시대에 존재했던 마지막 역사가 이렇게 사라졌으니까.

    그런 시무스의 어깨에 카이가 손을 얹었다.

    “좋은 술이었다. 아마 평생 기억에 남을 거야.”

    시무스는 그 말에 눈을 반짝였다. 이 술을 가지고 온 것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물론 자신도 그 마지막을 함께 즐길 생각이었지만, 그가 자신을 기억하게 해주었다면 값어치는 한 셈이다.

    “그럼 잘 지내라고.”

    시무스는 카이가 돌아서는 것을 보고는 얼른 물었다.

    “혹시 퀸에게 가르침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카이가 생각하는 퀸은 뭔가를 가르치는 것을 못한다. 그녀에게 뭔가를 배우겠다면 그만한 각오가 필요한 일.

    카이는 시무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럼 우리는 피스토 관련 자료를 살피러 가죠.”

    또아리를 틀고 있던 우로보로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우로보로스의 시선이 닿는 곳에 헥토르가 앉아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지?>

    “한 달.”

    <예상보다는 빨랐군.>

    흡족한 미소를 지은 우로보로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크기. 헥토르가 고개를 들어 우로보로스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커질 거지?”

    지금만 해도 얼추 길이가 수백 미터를 넘어간다. 그런데 아직도 제힘을 되찾지 못한 것을 보면 얼마나 거대해질지 모르겠다.

    <온전한 힘을 되찾는다면 신령의 숲을 감쌀 정도는 되겠지.>

    헥토르도 대수림에 대해서는 알았다. 그 크기를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는 대수림을 감쌀 정도라면 얼마나 거대해지겠다는 건가?

    괴물의 영역을 넘어 신의 영역에 닿아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돼?”

    <밤이 찾아오면 알게 될 거다. 이제는 식사를 조금 더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겠군.>

    헥토르는 가만히 우로보로스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피스토의 파편을 먹고 인간의 영육을 삼키면서 점점 강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영육을 삼키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격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육을 삼키는 것이 목적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마음대로 해라.”

    천천히 해가 기울고, 밤이 되자 우로보로스의 그림자 수백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하나하나가 마을을 습격했던 크기.

    그림자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태초의 어둠을 다루는 ‘뱀’이 확실히 전과는 비할 바 없이 강한 힘을 손에 넣은 것을 확인한 헥토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피스토가 불완전 소환되었을 때 정신 오염된 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칼버그가 망했다.

    해상에서 벌어진 일이라 제때 반응하지 못했고, 그렇게 왕국의 모두가 죽었을 때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떨어져 내렸다. 당시 8성에 이르렀던 성기사 르엔이 이끄는 성기사단과 성녀를 비롯해 신성 교국의 최정예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시엘의 권능으로 이뤄진 일.

    그들이 불완전 소환된 피스토와 싸우면서 만들어낸 빈틈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한 줄기 빛. 그것은 강대한 신성력이 맺힌 시엘의 검이었다.

    심판의 검이라고 불리는 교국의 기적.

    그 일격에 불완전 소환된 피스토가 죽었고,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어째서 예언서에서 심판의 검 얘기가 나왔는지 알겠다. 그건 실제로 피스토를 심판했던 시엘의 검.

    그 압도적인 권능을 보았던 이들이 그 이야기를 전했으니 피스토의 예언이 나왔을 때 그것을 심판의 검으로 바꿔 적을 생각을 한 것이겠지.

    카이는 그 내용을 확인하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세계의 한계를 확인해 보았을 때 시엘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의 능력이 아직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그 의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피스토가 예언대로 소환된다고 해도 심판의 검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의지가 쇠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이 어디 있을까?

    대규모 공간 이동을 펼치고 심판의 검을 내리 찍었던 힘이 이제는 남아있지 않았다.

    시엘의 힘이 쇠하는 동안 오히려 피스토는 연옥에서 힘을 기르고 있었다. 아직도 뱀과 늑대가 놈과 함께 등장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예언은 이뤄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놈을 저지하는 것은 시엘이 아니라 자신.

    카이가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테오가 안으로 들어왔다.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카이가 돌아보자 테오가 보고서를 넘겨주었다. 카이는 보고서를 빠르게 넘겨 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륙 서부에서만 사라진 마을이 이 정도라고?”

    “예.”

    카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다발적으로 하룻밤 새에 사라진 마을이 서른두 개나 되었다. 아무리 각 왕국에서도 외진 곳이라고 하나 이렇게 많은 이들이 사라졌다면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람만 사라진 마을에서 사라진 이들을 얼추 추산해 보면 대략 3천 명 내외.

    대륙 서부에서만, 이랬다고 한다면 대륙 동부에서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사라졌을까?

    대륙 전체로 놓고 본다면 거의 일만에 가까운 이들이 사라졌다.

    “2천 명을 소화하는데 한 달. 게다가 동시다발적으로 사람들이 사라진 것을 보면 새로운 힘을 얻었나 본데?”

    ‘뱀’이 원래 가진 힘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가? 사람의 영육을 취하면서 자신이 가진 힘을 되찾으면서 점점 더 빨리 강해진다.

    피스토만 걱정할 때가 아니라 ‘뱀’도 걱정해야 했다.

    멜라임은 빼고 대륙 전역을 노린 것은 ‘뱀’이 현명하게 굴었다는 거다. 그렇게 허를 찌른 습격은 카이가 손을 쓰기도 전에 일만 명의 피해를 낳았다.

    대륙 전체 인구에 비하면 얼마되지 않지만, 고작 2천 명을 소화하고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뱀이 일만 명을 소화하고 나면 어떻게 될까?

    늑대를 만나 조언을 구해봐야겠다.

    “신지에 다녀오지.”

    “그리고 연락이 하나 와 있습니다.”

    “연락?”

    “에빌 마탑에서 온 연락입니다. 방법을 찾았다고 전하면 된다더군요.”

    “방법을 찾았다고?”

    카이는 그들에게 말해 놓은 것이 있었다. ‘뱀’에게 한 방 먹일 방법을 찾아내라고.

    그런데 방법을 찾았다고 하니 기대가 됐다.

    “잘됐네. 그렇지 않아도 ‘뱀’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공간 이동을 준비했다.

    “모두에게 전해둬. 에빌 마탑에 다녀온다고. 이번 일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알겠습니다.”

    카이는 그대로 공간 이동을 통해 에빌 마탑으로 향했다. 악몽의 대마법사 콜린스를 필두로 그를 따르는 흑마법사들에게 맡겨 놓았던 일.

    카이가 모습을 드러내자 콜린스와 함께 모여있던 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를 향했다.

    “연락받았다. 방법을 찾았다고?”

    콜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이를 바라보았다. 8성일 때도 그를 보았기에 콜린스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마주한 카이가 그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얼마 전에 세계에 이변이 일어났는데 혹시 당신이 한 일입니까?”

    “제법이군. 그걸 이곳에서 인지했나?”

    대륙 동부 멜라임 왕국에서 세계의 한계를 확인했던 일을 여기서 인지했다는 것을 보면 콜린스는 7성 중에서도 감이 좋은 자인 것 같았다.

    환풍의 대마법사야 당시 바람을 부르고 있었으니까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해도 콜린스는 이곳에서 흑마법을 연구 중이었으니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벽을 넘었다.”

    “넘을 벽이 남아있었던 겁니까?”

    카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말뜻을 이해한 흑마법사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9성이라는 것은 그만큼이나 충격적인 것이었으니까.

    8성이라는 경지 자체가 인간이 규정 지은 한계점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보다 방법에 대해 들어볼까?”

    콜린스는 그 물음에 엘리슨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설명을 시작했다.

    “강령술에 대해 연구하던 중에 강제로 놈을 강령시킬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뱀의 신체 일부만 있다면 그걸 토대로 놈을 강령시킬 수 있죠.”

    “강제로 그게 가능하다고?”

    “대규모 술식진을 동원해야겠지만, 가능은 해요.”

    카이는 팔짱을 낀 채 그들이 설명하기 위해 준비한 보고서를 바라보았다. 목표를 지정한 후에 강제로 강령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것은 예전의 ‘뱀’이었다면 통했을지 모를 일. 하지만 지금의 ‘뱀’은 전과는 비할 수 없이 강해졌다.

    쉬이 넘어오지 않을 터.

    하지만 그건 이들이 계획한 강령술의 마법진을 토대로 했을 때 이야기다. 출력을 높이고, 보강한다면 가능도 할 것 같았다.

    “어디에 강령시킬 계획이지?”

    “저희가 준비한 시체가 있습니다. 5성급의 육체 강화자의 시체라 이 안에 들어간다고 해도 제힘을 발휘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들이 준비한 시체를 본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뱀’을 담기에 적당한 시체다.

    카이는 그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로는 안 돼. 강령술식을 손보고 출력을 높여야겠다. 가까운 곳에 ‘뱀’을 강령시킨 후에 죽일 만한 곳이 있나?”

    “가까운 곳에 평야가 있습니다.”

    “좋아. 그럼 그리로 간다. 강령술식을 조정해 줄 테니 마법진을 그리는 것은 너희가 해라.”

    그곳에 모인 콜린스를 필두로 흑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이가 그들을 모두 데리고 공간 이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카이가 이동한 곳은 드넓은 평야. 그곳에 도착한 카이는 그들에게 바꿔야 할 강령술식을 알려줬다. 그들이 마정석 가루로 강령술식을 사용할 술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크기가 반경 3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술진이었는데 그들이 술진을 짜는 동안 카이는 용맥을 끌어왔다. 태초의 순수 마력을 통해서 용맥을 끌어온 카이가 술진에 연결해서 준비를 마치는 동안 그 흐름을 읽은 콜린스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9성에 올랐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믿기 힘들었지만, 용맥을 끌어오는 이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니 그가 9성에 올랐다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카이는 가방에서 뱀의 비늘을 꺼냈다. 거대한 비늘을 꺼낸 카이가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시체를 올려놓았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카이가 그곳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물러나라.”

    흑마법사들이 물러난 것을 확인한 카이의 손끝에서 일어난 마력이 술진 위를 치달렸다. 저들에게 알려준 수준은 저들이 할 수 있는 선에서 했던 것.

    카이가 그 위에 몇 개의 술진을 더 그려 입체적인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태초의 어둠을 다루는 뱀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정오에 카이가 강령술진을 작동시켰다.

    우우우우웅.

    용맥의 마력을 끌어와 출력을 높인 강령술진이 작동하자 뱀의 비늘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빛나기 시작한 비늘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자 하늘 위로 먹구름이 모여들고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콜린스가 뒤로 물러났다. 고작 강령술에 이만큼이나 주위 환경이 영향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이곳에 강림시키려는 ‘뱀’의 격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콜린스가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물었다.

    “저주는 잘 걸었지?”

    “물론이죠. 저 시체에 강령하기만 하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겁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 하늘에 모였던 먹구름이 소용돌이처럼 내려와 시체에 내리꽂혔다.

    우우우웅.

    시체가 들썩이더니 강령술식진이 뿜어내던 빛이 사라졌다.

    “성공한 건가?”

    모두가 숨을 죽여서 지켜보는 중에 시체가 눈을 번쩍 뜨고는 몸을 일으켰다. 무릎조차 구부리지 않고 벌떡 일어난 시체가 주위를 돌아보다가 카이와 시선을 마주쳤다.

    “어떻게 한 거냐?”

    “널 강령시킨 거지. 보고 싶었다. ‘뱀’.”

    ‘뱀’의 목숨은 이제 둘 남았다. 그중 하나를 이렇게 강제로 강령시킨 것은 큰 이득이다. 그것도 그 힘을 온전히 낼 수 없는 육체에 가뒀으니 이대로 하나를 거둔다.

    ‘뱀’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만 명의 인간을 삼켜 그 영육을 소화하는 중이라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끌려왔다. 어지간한 강령술에 당할 리가 없었지만, 눈앞에 있는 자를 보니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강령술을 펼친 술자가 자신만큼이나 격이 높은 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비하지 못하고 당한 일. 다시 당할 일은 없었다.

    아쉽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필요는 없다. 강령 된 몸에 깃들어 있던 저주 따위는 자신의 몸을 구속하지 못했다. 다만 7성에도 이르지 못한 자의 몸에 깃들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쯧.”

    가볍게 혀를 찬 우로보로스가 발을 구르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비늘이 날아와 그의 몸을 휘감았다.

    촤라라락.

    시체의 육신 위로 뱀의 비늘이 뒤덮였다.

    “이런 얕은 수작에 걸릴 줄은 몰랐군. 그래도 이렇게 만났으니 확인해 볼 것이 있다.”

    우로보로스의 눈이 뱀의 눈으로 변하고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마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 번 붙어보자.”

    돌싱 후 대마법사-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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