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한계
할바인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인상을 굳혔다.
“생존자 얘기는 어떻게 알았어?”
메르샤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정령에게 들었지.”
“웃기는 소리. 정령술사들이 이미 모두 확인했지만, 정령이 남아있지 않았어.”
메르샤는 태연하게 거짓말했다.
“감히 신령의 대마법사인 나와 비교할 만큼의 정령술사가 있다는 거야?”
할바인은 메르샤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카이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할바인의 시선이 카이를 향했다. 무결의 대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8성에 이른 괴물들이 얼마나 위험한 자들인지도 안다. 미치광이 바헬이 해왔던 짓을 생각하면 비위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경지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게다가 저 머리 위에 있는 일곱 빛의 색을 뿜어내는 새는 뭔가?
정령도 아니다.
할바인은 고민을 접고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멜라임은 폐쇄적인 왕국이라 카이의 뜻을 따라 ‘뱀’을 추적하는 왕국들과 교류가 없었다. 그걸 알고 ‘뱀’이 이곳에서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제라도 알려야 했다.
카이가 차분하게 ‘뱀’에 대해 설명하자 그걸 다 들은 할바인이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뱀의 그림자를 보았다고 했지. 그 크기나 형태가 말도 안 되기에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만큼 거대한 뱀이 나타났다면 도시의 건물은 멀쩡하고 사람만 사라진 것을 믿기 힘들었으니까.”
할바인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먼 곳까지 와서 헛소리할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고 신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믿을 수도 없고.”
메르샤가 그런 할바인의 태도에 고개를 내젓고는 말했다.
“이봐. 안 믿어도 상관없지만, 가장 폐쇄적인 왕국인 멜라임에서만 사람이 죽어 나간다는 게 뭘 뜻하는 것 같아?”
“···무슨 뜻이야?”
“‘뱀’이 이곳에서 왕국민들을 처먹으면서 힘을 키우고 있을 거라는 얘기지. 손을 쓰지 않으면 왕국민 모두가 ‘뱀’의 뱃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어.”
할바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일단 만나게 해줄 수는 있지. 가자.”
할바인을 따라서 걸어간 곳은 레인저들이 머무는 곳이었는데 그곳에서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레인저들이 경례하자 할바인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들을 지나쳤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한 소녀가 무릎을 안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르샤가 할바인을 돌아보자 그가 설명했다.
“처음 발견했을 때 기절해 있었고, 깨어나기 무섭게 비명처럼 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 뒤로 말도 하지 않고,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있어.”
소녀는 사람이 들어왔음에도 쳐다도 보지 않고 있었다. 그때 퀸이 성큼성큼 걸어가 소녀의 시야를 가리고 섰다. 소녀는 창밖을 가리는 퀸을 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퀸은 그런 소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체온이 없는 퀸의 차가운 손길에 소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너 혹시 ‘뱀’을 봤어?”
“응?”
퀸이 양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이만큼 큰 ‘뱀’ 말이야.”
“언니도 봤어?”
퀸은 언제 뽑았는 지도 모르게 검을 뽑아들고는 답했다.
“응. 벤 적도 있어.”
“정말?”
“그럼. 그때 벤 비늘도 가지고 있는 걸? 보여줄까?”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퀸이 눈짓했다. 카이는 그 눈짓에 가방에서 뱀의 비늘을 꺼내서 보여주자 소녀의 눈이 커졌다. 소녀가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맞아! 뱀의 비늘이 저만큼이나 컸어. 진짜 벤 거야? 진짜 죽일 수 있어?”
소녀의 눈에 강렬한 생기가 맺힌다. 죽어있던 눈빛에 맺힌 강렬한 생기. 그것은 복수심에 타오르는 것임을 깨달은 퀸이 미소를 지었다.
“맞아. 그래서 말인데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줄 수 있어?”
소녀는 그 말에 이를 뿌득 갈았다.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정말 뱀이 나타났어. 벽을 뚫고 쩍 벌린 입으로 사람들을 집어삼키는데 벽이 무너지지도 않았어. 그렇게 사람들이 모두 잡아 먹혔어.”
퀸이 그런 소녀의 손을 꼭 잡아주며 물었다.
“그런데 넌 어떻게 살아남았어?”
소녀는 그 말에 금세 울먹거렸다.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퀸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기다렸다. 퀸의 기다림이 통한 것인지 숨을 고른 소녀가 답했다.
“피를 받는 오물통에 들어갔어. 덕분에 살아남을 수는 있었고.”
발하인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단이 그곳에 도착해서 발견할 때는 거의 피가 굳어 있었지. 대롱을 물고 있지 않았다면 죽었을 걸세.”
“그 말은 피에 파묻혀 있으면 못 찾는다는 건가?”
카이가 중얼거릴 때 메르샤가 손가락을 튕겼다.
“혈해와 같은 환경이라서 못 본 걸까?”
“그건 너무 피스토만 생각한 것 아냐? 지금 사람을 잡아먹고 있는 것은 ‘뱀’이라고.”
“그렇기는 하지.”
둘이 중얼거리는 것을 들을 때 퀸이 물엇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을 입속에 넣고 벽을 지나갈 수 있어? 그게 가능하기는 해?”
“일단 반쯤 영체 상대로 돌입하면 가능할 수도 있어. 그리고 놈의 뱃속이 같은 세계라고 할 수도 없고.”
삼키면 바로 혈해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인간의 영육을 받아먹고 ‘뱀’의 힘을 키워주고 있을지도 모를 일. ‘뱀’이 남긴 잔향을 생각했을 때 이대로 사람을 잡아먹으면 보옥이 없이도 현계에 온전히 강림할 수 있을 터였다.
“‘뱀’이 나타났다는 것은 사실이고, 이 아이의 말도 거짓말이 아닌 것 같네. 마을의 사람들이 사라진 시기를 확인하고 ‘뱀’이 사람을 잡아먹는 간격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해.”
메르샤의 시선이 할바인을 향하자 그가 한숨과 함께 답했다.
“어디든 습격을 받으면 모든 사람을 잡아먹기에 그 간격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어. 이번에도 도시 사람이 모두 잡아먹힌 것보다는 시장이 왕족이었기에 바로 알 수 있었을 뿐이야.”
카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도시에 사람들이 얼마나 됐죠?”
“이천 명 내외였을 것이오.”
그만한 인원을 소화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지 알아보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또 다른 도시를 습격하는 시간을 확인해 봐야 했다.
“도시를 습격하기 전에는 마을 단위를 노렸다는 것은 사람들을 소화하는 양이 늘어난 거라고 밖에 안 여겨지는데.”
“그렇지. 한 번에 이천 명을 소화할 정도라면 왕도를 노릴 날도 머지 않았어.”
할바인은 메르샤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군. 8성급 대마법사도 마법으로 성을 하나 파괴할 수 있다고는 했지만, 이건 그 안에 있는 인간들을 모조리 잡아먹는 괴물이 실존한다니.”
메르샤가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보다 큰 문제는 ‘뱀’이 투신과 함께 한다는 점이야. 여기 신조의 대마도사가 도움을 줄 때 받아.”
“신조의 대마도사? 무결의 대마법사가 아니었나?”
메르샤가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인간 최초로 9성에 오른 괴물, 아니지. 9성에 오른 대마도사야.”
“누구 마음대로 9성을 논하는 거냐?”
메르샤가 가볍게 혀를 차며 답했다.
“그 힘의 편린을 읽지도 못한다니 너 그동안 놀았냐?”
할바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솔직히 제대로 된 수련을 못 하고 있다는 것도 맞았다. 멜라임에서 7성에 오른 것은 그뿐이었고, 제자들을 육성하고 있지만 6성에 올라온 이 하나 없었으니까.
자신의 뒤를 이어 레인저들을 통솔할 이가 없다 보니 자신의 수련은 언제나 뒤로 미뤄뒀다.
그리고 그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솔직히 메르샤도 전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그녀와 함께 있는 저 바람의 정령만 해도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할바인의 시선이 카이에게 머물렀다. 카이의 머리 위에 있는 저 작은 새. 신비로운 힘을 품은 저 존재가 신조라고 부르는 존재인가 보다.
그런데 대마도사라고 부르고 9성에 올랐다고 하는 존재는 지금까지 없었던 존재였다.
8성에 이른 자들조차 그 수가 한 줌도 되지 않는 대륙의 역사에 9성에 오른 자는 없었다. 8성에 이른 자들이 한 시대에 하나 나오기도 힘들어 서로 간의 능력을 견줄 이가 없으니 9성에 올랐다고 말한 이도 없었다.
그런데 당당하게 9성이라 말하는 저 인간의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까?
그저 유달리 강한 8성의 대마법사가 아닐까?
할바인이 보내는 의심의 눈초리에 카이는 픽 웃었다. 자신이 9성에 올랐다는 것은 같은 8성에 오른 이들만이 알 수 있다.
카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입으로 9성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그러나 ‘뱀’의 존재와 그에 대적할 9성이라는 존재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었다.
‘뱀’은 공론화해서 대적해야 하는 존재.
그렇다면 카이 자신의 존재도 공론화해야 했다.
“보여드리죠.”
카이는 그리 말하고는 걸음을 옮겨 창가로 다가가서는 훌쩍 날아올랐다.
왕궁의 상공으로 올라가는 카이의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올라가면서 카이는 자신의 격을 해방했다. 지금까지 다른 이들에게는 숨겨왔던 힘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 세계가 얼마만큼 자신을 인정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신조가 점점 거대해지더니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고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다. 그 모든 것을 이곳에 있는 이들이 느낀다.
하늘을 나는 새들도 느려지고 바람의 흐름도 느려진다.
세계가, 세상이 모두 카이를 중심으로 느려지며 모든 것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모든 이들이 동시에 사고의 가속을 느끼면서 그 찰나의 순간에 카이가 뿜어낸 격을 고스란히 인지했다.
신이 실제로 강림한다면 이런 느낌인 걸까?
보고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풀리는 느낌이다.
8성 대마법사가 시공에 간섭할 수 있으며 자신을 증명한다면 지금 카이는 시공을 제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 8성에 이르기 전에는 느낄 수 없는 시공에 간섭하는 것을 그곳에 있는 모든 이가 체험하게 했다.
세계의 모든 것이 그의 손안에 쥐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할바인은 그 모든 것을 인지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힘을 풀어내니 그의 손끝에 자신의 명줄이 쥐어져 있었음을 알았다.
모든 이들이 숨죽일 때 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세계가 자신을 받아들이고 경배하고 있었지만, 한계점에 도달했음을 알았다.
더 힘을 끌어 올린다면 이 공간이 찢어져 버릴 것을 감지했다. 공간을 찢어 그 너머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여기서 멈춰야 할 때였다.
카이의 의지를 인지한 신조가 몸의 크기를 줄였다. 하늘 끝까지 덮을 듯 거대해졌던 신조가 다시 줄어들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카이는 신조를 어깨에 얹은 채로 다시 돌아왔다.
할바인은 카이를 두려움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메르샤는 그런 할바인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이제 믿겠냐?”
“믿을 수밖에 없군.”
할바인이 중얼거리는 모습에 메르샤는 괜히 자신이 뿌듯했다. 어렴풋이만 느끼고 있었던 카이의 힘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새삼 줄을 잘 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국이고 뭐고, 저만한 존재의 편에 줄을 서야 8성으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겠나?
카이가 내려오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답했다.
“일단 이걸로 ‘뱀’도 경거망동하지 못할 겁니다.”
단순히 힘의 한계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뱀’에게도 알려줄 생각이었다. 세계 어디에 있든 조금 전 카이의 힘은 여실히 느꼈을 터.
그러니 ‘뱀’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돌싱 후 대마법사-이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