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흔적
대륙 동부의 작은 왕국 멜라임.
험준한 산맥에 들어 앉아있고, 척박한 산을 영지로 삼는 곳. 무엇보다 그들의 저항 정신은 끈질겨서 끝내 제국의 영토에 편입시키지 못했던 곳.
누구보다 폐쇄적이었던 왕국이었기에 그곳의 변고는 가장 늦게 알려졌다.
“멜라임에 변고가 생겼다고?”
“예.”
“어떤 변고를 말하는 거죠?”
그림자가 보고서를 건넸다. 보고서를 받아든 클란드라가 그 내용을 확인하고는 눈썹을 모았다.
“처음에는 작은 마을의 연락이 끊기다가 도시 하나가 하룻밤 사이에 모든 이들이 사라진 사고가 있었습니다. 멜라임의 레인저가 조사를 나갔고, 생존자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거대한 ‘뱀’이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그런데 생존자가 고작 일곱 살짜리 아이. 그것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라면 이 보고를 믿는 이가 없었겠군.”
“예. 다만 멜라임에 있는 정령술사들도 그곳에는 정령조차 남아있지 않아 진상을 조사할 수 없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뱀’이 나타났을 수도 있겠군.”
클란드라의 말에 그림자는 답하지 않았다.
클란드라는 손짓해서 그림자를 물리고는 곧장 테오르를 찾아갔다. 테오르는 요즘 연구실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테오르는 자신의 비전 마법을 손보고 있었다. 8성에 그를 올리게 해준 비전 마법을 뛰어넘는 마법을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수련에 들어간 그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태사!”
클란드라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테오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숨을 푹 내쉰 그가 클란드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야단법석이냐?”
“흔적을 찾은 것 같아요. 무결의 대마법사를 만나러 가야겠어요.”
“오! 그래?”
테오르도 카이를 보고 싶었다. 비전 마법을 연구 중인데 뭔가 막혀서 녀석을 만나면 뭔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의 비전 마법의 영감을 얻겠다고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는데 핑곗거리가 있다면 달랐다.
“그럼 갈까?”
테오르가 얼른 손을 내밀어 클란드라의 손을 쥔 순간 그 둘이 공간을 뛰어넘었다.
테오르와 클란드라가 도착한 곳은 카이 백작성의 정문 앞이었다.
“응? 왜 여기로 온 거지?”
영주성 안쪽으로 공간 이동하려고 했는데 도착하고 보니 정문 앞이다. 그런 테오르의 앞으로 불쑥 나타난 것은 카이였다.
“황녀님이시군요. 안으로 드시죠.”
카이가 그 둘에게 손짓하자 곧 모두가 공간 이동해서 응접실로 갔다. 그리고 그들의 기척을 느낀 이들이 응접실로 모였다.
덴다르트와 카메룬, 메르샤는 물론이고 퀸까지 한 자리에 모였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모인 그들을 보고 클란드라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었다.
“저희를 기다리고 계셨나요?”
“손님이 올 거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예?”
테오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미래라도 본 건가?”
카이는 미소로 답했고, 테오르는 꺼림칙한 시선으로 고개를 내젓다가 다시 카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는 만나자마자 공간 이동을 당해서 몰랐다.
자신이 저항도 못 하고 공간 이동했다는 것을.
게다가 지금 이렇게 보니 알 수 있었다. 카이와 그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작은 새에게서 느껴지는 힘을.
태초의 속성을 다루면서 카이가 얼마나 강한지 깨달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감도 오지 않는다. 게다가 저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일곱 가지 빛을 뿜어내는 새는 뭔가?
“정령사가 된 거냐?”
“정령 아닙니다.”
카이가 담담히 답하고는 자리를 권해서 모두가 자리에 앉을 때 어디선가 테오가 나타나 그들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척척 나오는 모습에 테오르는 정말로 긴장했다.
“너 미래도 보는 거냐?”
카이는 고개를 내저을 뿐 확답은 주지 않았다. 대신에 클란드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연락을 주시면 제가 직접 가도 되는데.”
카이는 황궁의 보호 마법진을 가볍게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 카이를 부르지 않고 직접 온 이유가 뭔가 싶어서 물으니 클란드라가 보고서 하나를 건넸다.
카이는 보고서를 받아서 읽고는 인상을 굳혔다.
“멜라임에서 벌어진 일입니까?”
“맞아요.”
“이건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네요.”
처음으로 ‘뱀’의 흔적을 찾았다.
멜라임이라면 제국의 눈도 잘 닿지 않는 폐쇄적인 곳. 대륙 동부에 있어 이쪽에서도 눈이 잘 닿지 않았다.
카이는 지도에 표기된 도시를 떠올렸다. 이미 세계를 인지한 카이에게 그곳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조사해보고 알려드리죠.”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클란드라는 카이 덕분에 공국을 받기로 했다. 그렇기에 그를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어 했다.
그때 테오르가 손을 들었다. 카이가 돌아보자 그가 빠르게 말했다.
“내게 태초의 물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게.”
카이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가르쳐준다고 될 게 아니라서요. 힌트를 주자면 물을 가까이 하세요. 가능하면 엄청난 양의 물. 물의 근원을 마주하면 더 좋을 겁니다.”
“흐음.”
고민하는 테오르를 바라보던 카이가 말했다.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지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왜?”
“보통은 퀸에게 안전을 맡겼지만, 이번에는 같이 가려고요.”
“같이 간다고?”
퀸도 놀라서 바라보기에 카이는 담담히 답했다. 자신의 경지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지만, 퀸과 함께 하고 싶었다.
자신의 정신이 무너지려 할 때 그 힘을 나눠 받아줬던 퀸.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다.
“예. 그러니 이곳을 지켜주시죠.”
테오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 다만 맨입으로는 안 되는데?”
카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이걸 보고 있으면서 영감이나 받으시죠.”
카이가 소환한 태초의 물을 보고 테오르가 눈을 반짝였다. 신조는 일곱 가지 태초의 속성이 더해진 덕분에 이렇게 따로 속성을 소환할 수 있었다.
“안 돌아와도 되네. 이것만 여기 있으면.”
카이는 그 말에 픽 웃고는 페코를 불렀다.
“나도! 나도 갈래!”
“얘기 못 들었어? 정령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하잖아.”
“멜라임은 내 고향이기도 하거든.”
안타르시아의 시장이라고만 알려졌지, 그녀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몰랐어? 멜라임은 정령 마법이 가장 발달한 곳이야. 그리고 나는 그 정점에 올랐지.”
카이는 고개를 내젓고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덴다르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곳은 걱정말고 다녀와라. 페코가 가니 메르샤도 가고 싶은 게 당연하지. 그리고 그들의 도움을 얻으면 뭔가 도움이 되겠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카이는 클란드라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황궁으로 보내드리죠.”
“고마워요.”
클란드라가 사라지자 카이가 손짓했다. 페코가 나타나 퀸과 메르샤를 감싸 안자 카이는 곧장 공간 이동했다.
카이가 도착한 곳은 을씨년스러웠다. 이미 조사단도 떠난 것인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도시.
유령도시의 망루 위에 선 카이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정령도 기억을 읽을 수 없었던 이유를 짐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는 감히 정령이 근처에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고 강대한 존재의 잔향이 남아있었다.
이건 카이에게도 익숙한 잔향이었다.
‘뱀’.
그 잔향이다.
이만한 존재가 지나간 곳이니 감히 정령이 남지 못했던 것.
페코도 그걸 느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믿기 힘들군. 이만한 힘을 세계에 아로새길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내가 느낀 것이 잘못된 거 아니죠? 정말로 이만한 존재가 남긴 흔적이죠?”
카이는 오히려 메르샤가 그걸 감지한 것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게 느껴져?”
“응.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격이야. 이건 너보다 더 강한데?”
카이는 그 말에 미소를 지을 뿐 답하지 않았다.
이 정도 격과 존재감?
카이와 신조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지 않을 뿐이지.
다만 ‘뱀’이 지금껏 세계에 이만한 흔적을 남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곳에 온전히 머물지 못했던 것은 그 존재를 세계에 투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한 존재와 격은 온전히 세계에 머물 수 없다. 그것은 세계가 허락하지 않으니까.
카이가 세계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완전한 초월을 이루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도 뇌조도 모두 이 세계에 존재하던 자들.
그렇기에 격과 힘을 아끼는 것만으로 세계와 함께 존속할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뱀’은 다르다. 이 세계가 허락한 힘 이상을 되찾고 있었다. 보옥도 없이 이렇게 빠르게 힘을 되찾는 것은 믿기 힘들었다.
뭔가 다른 방법을 손에 넣었다.
카이가 주위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피스토는 인간의 영혼을 혈해로 가져간다고 했지. 뱀은 피스토의 파편을 먹었고.”
이곳에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것은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마저 모조리 집어삼켰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이만한 흔적을 남긴 것일 터.
“피스토의 힘을 가졌다는 건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힘을 얻을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지.”
카이는 곧 눈을 감고 ‘뱀’이 남긴 흔적을 쫓았다. 그런데 이곳에서 사람들을 습격할 때 남긴 잔향은 있었지만, 공간 이동으로 사라진 것인지 다른 흔적은 없었다.
“흐음. 어디로 도망친 것인지는 못 찾겠는데?”
메르샤가 그 말에 카이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생존자가 있다고 했잖아? 만나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몰라도 만나면 뭔가 알 수 있는 것이 있겠지.”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만나자는 거야?”
메르샤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말했지? 내가 이곳 출신이라고. 왕궁으로 가자. 내가 해결할게.”
카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행을 다시 그러모아 멜라임의 왕궁으로 공간 이동했다. 적대적 침공이 아니었기에 카이는 멜라임 왕궁의 정문 입구 앞에 내려섰다.
갑작스러운 일행의 등장에 왕궁이 발칵 뒤집혔고, 삽시간에 수백 개의 활이 겨눠졌다.
레인저들의 왕국답게 기사 대신 레인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활이 겨누고 있었지만, 카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모두가 덤벼든다고 해도 이곳에 있는 이들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으니까.
그때 레인저들 사이로 회색 수염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이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장궁을 들고 나타난 사내.
멜라임 왕국의 레인저 대장 7성급 궁사 뇌궁 할바인.
그가 카이 일행을 내려다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메르샤?”
“누님이라고 안 부르냐?”
메르샤가 툭 쏘아붙이자 할바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왕국을 떠나면서 연 끊은 것 아니었소? 갑자기 나타나서 누님 행세는.”
할바인은 그리 말하면서도 손을 휘 내저었다. 레인저들이 활을 치우자 할바인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메르샤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답했다.
“왕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왔지.”
레인저들의 표정이 싹 굳을 때 할바인이 손짓했다.
“일단 안으로 드시오.”
레인저들의 안내를 받아 이동한 곳에서 할바인이 메르샤의 곁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귀빈들이 왔는데 전하가 나오지 못하시는 것은 양해 부탁하지. 이번에 사라진 도시가 전하의 동생이 통치하던 곳이어서 슬픔에 앓아 누우셨으니.”
메르샤가 코웃음을 쳤다.
“그냥 못 믿어서 못 나왔다고 해도 돼. 누구라도 8성 대마법사 앞에 함부로 나서지는 못할 테니까.”
할바인은 저들이 공간 이동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메르샤가 8성 대마법사와 함께 나타났다는 것을 아는 이상 함부로 국왕이 나설 수는 없었다.
“이해했으면 됐어. 그래. 누님이 왕국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메르샤가 하는 짓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의 경지는 분명 뛰어나다. 게다가 지금은 8성 대마법사와 함께 찾아왔다.
왜 도우려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정말로 돕는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메르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 생존자를 만나게 해 줘.”
돌싱 후 대마법사-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