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마베르니
마베르니는 카이를 바라보다가 그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신조를 보았다. 신조가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바라보자 마베르니의 눈이 점점 커졌다.
“다, 당신!”
마베르니가 손을 뻗어 신조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신조! 어떻게 신이 내린 기적이!”
카이는 마베르니가 당황해 소리치는 것을 보고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잠시만 진정하세요.”
마베르니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휘휘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핀 마베르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죠?”
카이는 예언서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알아보니 40년 정도 되었다고 하더군요.”
마베르니는 그 말에 예언서를 넘겨 보다가 눈물을 왈칵 쏟았다.
“결국, 그녀의 말대로 예언서가 적혔네요.”
카이는 눈물을 쏟는 그녀의 손등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잠시 그렇게 마음을 추스른 그녀가 고개를 들어 카이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델라니의 금제를 푼 거죠?”
카이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런 카이의 머리 위에 있는 신조를 바라보던 마베르니가 손을 뻗었다. 신조는 그런 마베르니의 손등으로 올라갔다.
이 지조 없는 녀석은 아무나 손등에 올라가는 건가 싶어 바라보는데 신조를 손등에 올린 마베르니는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당신은 누구죠?”
“카이. 무결···. 아니, 신조의 대마도사라고 하죠.”
대마법사가 아닌 대마도사라는 말을 처음으로 입에 올렸지만, 대륙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카이의 대답을 들은 마베르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카이가 물었다.
“예언의 내용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정말 시엘이 강림해 심판의 검으로 피스토를 심판한 겁니까?”
마베르니는 신조에게 이마를 가져다 댄 채로 눈을 감고는 입을 열었다.
“시엘은 강림하지 않았어요. 피스토가 세계를 혈해로 뒤덮을 때 나타난 것은 신조였죠. 혈해를 가르고 나타난 신조의 날개가 세계를 뒤덮는 모습이 마지막이었어요.”
“끝을 보지는 못했군요.”
마베르니가 눈을 뜨고는 신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격을 고스란히 느꼈기에 그것이 시엘이 자신을 대신해 내린 것이라고 여겼어요. 그랬더니 시엘이 강림하고 심판의 검으로 심판했다고 바꿔서 남겨 뒀네요.”
“델라니의 금제는 허락하신 건가요?”
마베르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예언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죠. 그게 교국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신조가 시엘의 것이라고 여겼다면 당시 성녀였던 델라니의 말을 따랐을 수도 있었다. 아마도 세뇌에 가까운 짓을 했겠지.
봉인지를 지키며 여생을 보내야 하는 델라니의 교국을 위한 마음은 광신에 가깝다. 그러니 다른 이에게 이런 금제를 벌이면서도 아무런 가책도 못 느낀 것이겠지.
그러나 그것이 교국을 이끌어 온 방식이었고, 그것을 탓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늑대와 뱀에 대한 예언은 확실한 겁니까?”
“맞아요. 그리고 피스토도 결국 부활하죠.”
카이는 그 말을 듣고는 멜라니가 뱀에 대해 들었을 때 피스토가 부활할 수도 있는 이 예언을 떠올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신조를 보지 못해서 확신하지 못했던 걸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조를 알아냈으니 이제 그 예언이 자신과 연관이 있다고 여길 터. 자신에게 수작을 부릴 수도 있겠다.
카이의 경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나서지 않더라도 반드시 자신들의 예언대로 진행하고자 할 수도 있었다. 카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베르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당신이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시 손을 쓸 수도 있습니다.”
마베르니는 그 말에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죠.”
“그럼 저랑 함께 가시죠. 여생은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마베르니는 고개를 내저었다.
“교국을 적으로 돌리게 될 거예요.”
“제 신조를 보고 느끼신 것 있으시죠? 아마 마지막 날을 덮기 위해서라도 교국은 저를 적으로 둘 겁니다.”
“···그건 그렇겠네요.”
“그러니 저랑 함께 가시죠. 아무리 교국이라고 해도 제 영지를 노리지는 못할 겁니다.”
카이와 신조의 격을 보니 뭔가 문제가 생길 일은 없어 보였다. 마베르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제를 당하고 40년. 그 동안 놀라울 정도로 신성력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하늘신 시엘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택한 길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
“그럼 부탁할게요.”
카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영지에서 뵙죠.”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던 그녀가 공간 이동으로 사라졌다. 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놀라 달려오는 수녀원장이 보였다. 아나벨 성녀도 그녀와 함께 따라왔다.
수녀원장이 마베르니가 있던 자리를 보다가 카이를 쏘아봤다.
“이게 무슨 짓이죠?”
카이는 담담히 답했다.
“알고 보니 마베르니님이 제 먼 친척이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여생을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무슨 소립니까? 그분은 본 교국의 예언가로서 큰 공적을 남기신 분입니다. 여생은 저희가 책임져야 합니다.”
카이는 수녀원장의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델라니 성녀와 같은 세대의 인물. 어째서 그녀가 저리 당황하는지 알 수 있었다.
카이의 시선이 아나벨 성녀를 향하자 그녀가 중재했다.
“교국의 은인이세요. 무례를 범하지 마세요.”
수녀원장은 아나벨 성녀의 말에 입을 다뭉렀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상대가 8성에 이른 대마법사라는 것은 알 수 있었으니까.
“···보고는 해야 해요.”
“그렇게 하세요. 제가 보고 하겠지만, 이쪽에서도 보고해야죠. 저 분은 무결의 대마법사 카이님이세요.”
“그렇게 하죠.”
카이는 수녀원장을 흘끔 보고는 아나벨 성녀와 함께 그녀의 방으로 공간 이동했다.
카이는 아나벨 성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괜히 그녀에게 말해 봐야 좋은 꼴 보기 힘들 터였다. 델라니 성녀는 아나벨 성녀에게 있어 스승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
다행이라면 아나벨 성녀는 델라니 성녀만큼 꽉 막히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문제는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마베르니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기억이 돌아온다면 예언에 대해 자세히 묻고 싶어서 모시는 것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않아요.”
“그럼 또 들르겠습니다.”
아나벨 성녀는 카이가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다음에는 바로 오세요. 성기사들만 고생하는 것 같아서요.”
카이는 그 말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죠.”
말을 마친 카이가 공간 이동으로 떠나자 아나벨 성녀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카이가 마베르니를 데리고 간 것도, 수녀원장의 이상한 행동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뭔가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었다.
카이가 영지로 돌아왔을 때 마베르니는 메르샤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둘이 아는 사이는 아니였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어서 그런지 잘 어울리고 있었다.
새삼 느낀다. 메르샤의 나이를.
“왔어?”
메르샤가 손을 흔들더니 카이에게 다가와 앉으라고 권했다. 카이가 다가와 앉자 메르샤가 웃으며 말했다.
“예언 내용에 대해 들었어. 그러니까 늑대와 뱀은 확실한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일단 늑대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했으니 신경 써봐야지.”
카이를 바라보던 마베르니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다시 미래를 보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네요.”
카이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마베르니를 바라보자 오히려 그녀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걸 바라고 이리로 데리고 온 것 아닌가요?”
카이는 그녀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깨달았다. 카이는 천천히 고개를 내젓고는 답했다.
“금제까지 당한 채로 40년을 가뒀기에 여생을 편히 보내시라고 모신 것일 뿐입니다. 그저 편히 쉬세요.”
마베르니가 메르샤를 돌아보니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베르니. 네 신성력을 보면 40년간 꾸준히 늘어서 대충 6성에 이른 것 같지만, 그 정도로는 도움이 되기 힘들 거야. 게다가 그 나이에 함부로 미래를 보다가는 죽는 수가 있어.”
마베르니도 안다. 젊었을 적에도 미래를 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으니 노쇠한 몸으로 미래를 보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삶에 미련은 없었다. 자신을 알아보고 도움을 준 이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뿐.
그러나 그조차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저 쉬라는 말이 위안이 됐다.
메르샤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비우며 말을 이었다.
“저 말은 믿어도 돼. 9성에 오른 최초의 인간이니까. 아니 인간이기는 한 건가?”
“다 듣고 있거든?”
카이가 쏘아붙이자 입을 다문 메르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베르니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가족처럼 편안한 분위기.
“정말 여기 머물러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테오.”
카이가 부르자 어디선가 테오가 나타났다.
“편히 모시도록 해.”
테오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손짓하자 인형이 하나 다가왔다.
전속으로 인형을 배정하는 모습에 메르샤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나한테도 전속 인형은 안 붙여줬잖아!”
카이가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령이 있는데 인형이 왜 필요해?”
“나도 대접받고 싶다고.”
카이가 빤히 바라보자 메르샤는 볼만 부풀리고 말았다. 그 모습에 마베르니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예언가로 교국 내 교황청에서만 머물렀던 그녀는 실제로 메르샤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녀에 대한 소식은 들었다. 그녀가 어렸을 적부터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신령의 대마법사가 아직도 삼십 대의 미모를 가지고 있는 것도 놀라운데 저렇게 귀여운 척을 하는 것을 보면 더 놀라웠다.
비록 마력을 익히고 다룬 적은 없어도 용맥의 힘이 담긴 사슬은 보는 것만으로 압도당한다. 고작 인간이 다룰 수 없는 이적이나 마찬가지인 힘.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던 그 힘을 떠올리며 가볍게 몸을 떤 델라니의 뒤로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여인이 다가와 부복했다.
델라니가 고개를 돌려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신조가 나타났습니다.”
델라니의 표정이 싹 굳었다.
“어디서?”
“마베르니를 데리고 갔습니다.”
델라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베르니는 교국 내에서 성녀보다 더 희귀한 예언자다. 성녀는 대를 이어 물려받지만, 예언자는 있을 때보다 없을 때가 훨씬 더 많으니까.
그런 예언자의 도움으로 교국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던 중 역대 최고의 예언가라고 불리던 마베르니가 종말을 예언했을 때 델라니는 믿을 수 없었다.
세계의 종말.
그 순간에 시엘이 아닌 존재가 피스토를 막았다는 것은 교국에게 있어 절망적인 예언이었다. 그 예언을 묻기 위해 마베르니를 설득해 금제했다.
신성 금제는 마베르니의 허락이 없으면 불가능했던 것.
그렇게 금제하고 그녀를 40년간 보살펴 묻어 놓았던 일이 밝혀졌다.
그것도 신조의 등장과 함께.
“신조가 누구냐?”
“무결의 대마법사. 카이입니다.”
델라니는 그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피스토를 봉인한 사슬을 보았다. 신성 봉인 술식과 다른 이적.
그 이적을 일으킨 자가 예언에 나오는 신조의 주인이라니?
그리고 그자가 마베르니를 구해간 것이 단순히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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