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성취
세계를 온전히 인지하는 것은 카이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들인 끝에 온전히 그것을 인지해낸 카이가 눈을 뜨고는 코피를 닦아냈다.
한숨을 내쉰 카이가 눈을 뜨자 그의 앞에서 뇌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초의 속성 중 뇌 속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 다른 속성들과 다르게 영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무아지경에 빠진 사이에 곁을 지키고 있었나 보다.
카이가 손을 내밀자 뇌조가 그 위로 올라왔다. 카이는 뇌조의 턱을 만져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이 지났는지 인지하기 힘든 것은 아무래도 무아지경에 빠진 탓인 것 같았다. 단순히 세계의 형태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이 크게 확장된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더 높은 곳에 올라 자신의 격을 높이고, 키우기 위해서는 단순히 세계의 형태가 아니라 이 세계의 구성 요소를 모조리 인지해야 했다.
카이는 배가 고픈 것을 느끼고는 마력 감지에 걸리는 사슴 한 마리를 찾았다. 그곳으로 공간 이동해서 사슴을 잡아 온 카이가 태초의 불을 꺼내서 사슴을 구웠다.
온전히 태초의 불을 다룰 수 있게 된 카이의 손짓만으로 사슴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익었다. 카이는 향신료를 뿌리고 고기를 뜯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던 카이는 식사에 집중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카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갈 때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얼마나 긴 시간이 되었든 그 수준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뱀’이나 피스토 둘 다를 상대할 만한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일곱 가지 태초의 속성을 깨워야 하고 그걸 하나로 아우르기까지 해야 했다.
세계를 인지하는 것 자체가 그릇을 키우기 위한 것이니 앞으로 갈 일이 멀었다.
제발 그때까지 별 일이 없기를 바라며 카이는 식사를 마쳤다.
“네가 있으니 위험할 일은 없겠지.”
뇌조의 능력은 이미 확인했다. 그 능력이 어디까지 닿는지 확인했기에 카이는 뇌조를 믿고 다시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카이가 벌인 것은 인지한 세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들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 카이는 세계를 온전히 인지하게 될 터.
자신이 나고 자란 이 세계를 온전히 인지하는 것.
그것은 한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벌인 일이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인간을 뛰어넘어야 할 테니까.
억지로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는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카이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헥토르와 ‘뱀’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그 둘을 찾기 위한 것도 아니었기에 카이는 관심을 끊고, 계속 살피는 것에 집중했다.
임계점을 넘어서는 것인지 정신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정신을 잃는 건가 싶었을 때 자신의 의지에 반응하는 존재들이 느껴졌다.
하나는 퀸이고, 하나는 자신의 아이였다.
그 둘이 자신의 인지에 반응하는 것은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까마득한 거리에서 자신을 느끼고 마주 바라보는 느낌. 그 따스한 시선에 위안을 얻는다.
카이의 정신에 균열이 일어나던 것이 그 둘을 마주하면서 온전히 유지되면서 크게 확장되었다.
더는 고통 없이 세계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렇게 세계를 인지한 카이는 무한히 확장하는 자신의 정신을 느꼈다.
처음에는 세계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면 지금은 그 반대다.
무한히 확장한 자신의 정신이 얼마나 거대해지는지 인지한 세계가 두 손안에 머무는 느낌이었다.
카이는 세계를 내려다보다가 그것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퍼뜩 차렸다.
예상대로 이미 격은 더 높아져 태초의 속성을 더 깨울 수 있는 자격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를 틀어쥐고 그 너머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예감했다.
이대로 간다면 분명 자신은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그렇게 도달한 곳에서 자신은 인간이 아닐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독존을 한 덕분에 간신히 유지했을 뿐 조금만 더 나아간다면 인간의 허울조차 벗어던졌으리라.
어쩌면 신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인간인 채로 저들을 죽이는 것이지 인간을 포기하면서까지 저들을 죽이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카이는 자신의 아이와 퀸을 바라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 둘이 아니었다면 정신이 확장되기도 전에 죽었을 수도 있었다.
카이는 잠시 그렇게 정신의 고양감을 줄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카이는 이 고양감을 그냥 보낼 생각은 없었다. 카이는 이번 기회에 9성에 오르기로 작정했다.
먼저 태초의 대지 속성을 구한다.
바닥에 손을 얹고 대지의 기운을 온전히 느낀다. 그리고 단숨에 그 근원을 쫓아 들어갔다.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그 끝을 파고 들어가는 것은 카이가 전과는 다른 수준에 올랐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도달한 근원을 마주한 카이는 단숨에 대지 속성도 자신의 뜻대로 얻어낼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카이는 일곱 가지 태초의 속성을 모조리 소환했다. 그리고는 그 기운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얻은 뇌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칠채마력을 태초의 속성으로 이루게 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로 합일되는 것인데 뇌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녀석도 뒤섞이면 존재가 유지되는 걸까?
“너 그냥 나오면 안 되냐?”
일곱 가지 태초의 속성이 떠 있는 이 순간에 그사이에 유유히 벌새처럼 날갯짓하는 뇌조를 향해 물었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카이는 잠시 뇌조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잊지 마. 네가 선택한 거다.”
뇌조는 카이의 말에 오히려 소환한 태초의 속성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야망이 넘치는 녀석.
카이는 뇌조를 중심에 놓고 일곱 가지 태초의 속성을 하나로 모았다.
<----!>
뇌조의 울음이 소리로 맺어지지 못한 채 울렸지만, 카이는 묵묵히 그 울음을 들으며 집중했다. 일곱 가지 속성은 하나하나가 그 근원에 닿아 있는 것.
이 일곱 가지 속성을 하나로 합친다는 것이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칠채 마력을 손에 넣었던 카이였기에 시도할 수 있었다.
이미 해보았던 일. 그 수준이 높아져서 훨씬 어려워졌지만, 카이 또한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의 격이, 그의 그릇이 예전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그런데도 쉽지 않은 일.
카이는 억지로 행하지 않았다. 서로가 어울릴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고, 일곱 가지 태초의 속성을 모아놓고 지켜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로 합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카이의 눈에 뇌조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보였다. 단번에 일곱 가지 기운을 모조리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다른 속성들을 먹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속성들을 유지하고만 있으려니 뇌조가 다른 속성들을 먹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 기운을 모조리 흡수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뇌속성이 옅어지고 변질되어 간다.
그걸 알면서도 이제는 다른 속성을 집어삼키는 것을 멈추지 못한 뇌조.
하지만 자신의 존재 자체는 잊지 않았다. 새의 형태를 유지한 채로 일곱 가지 속성을 집어삼키는 녀석을 바라보던 카이가 양손을 뻗어 태초의 속성 일곱 가지를 하나로 뭉쳤다.
태초의 뇌속성의 근원에서 만난 뇌조조차 일곱 가지 기운을 아우르는 것은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카이가 도왔다.
난폭하던 기운의 대부분을 뇌조가 흡수하면서 조금씩 융화시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뇌조와 카이가 서로 도왔기에 가능한 일.
카이의 눈이 빛나는 순간 태초의 속성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것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힘.
그 힘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거센 경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오두막이 박살 나고, 산의 나무가 모조리 뽑혀 나갈 정도로 강력한 힘.
존재하는 것만으로 세계의 법칙을 일그러트리는 존재.
그리고 그 근원이 된 존재는 뇌조가 아니라 신조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일곱 가지 빛을 뿜어내는 새.
카이는 그 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 혼자서라면 아마도 태초의 속성 일곱 개를 하나로 합치지 못했을 것을 알았다. 뇌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
신격을 포기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둘이 함께했기에 이룰 수 있었다.
모든 일에 우연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지금의 카이는 뇌조를 만난 것도 자신이 이곳까지 이르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신조를 얻으면서 자신이 완전히 9성에 올랐음을 알았다.
정확히는 모든 것을 초월했음을 알았다.
카이가 손을 내밀자 신조가 다가와 손등에 앉았다. 생김새는 벌새처럼 자그마한 주제에 그 안에 품고 있는 힘은 도시가 아니라 대륙을 쪼갤 수 있을 정도의 힘을 품었다.
카이는 가만히 신조의 부리를 두드려주고는 말했다.
“고맙다. 네 덕분에 이 경지에 이른 것 같으니.”
뇌우 속에서 뇌조를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인연이 될 줄은 몰랐다.
카이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신조를 어깨에 올린 채 공간 이동했다.
격이 오른 것은 물론이고 신조까지 손에 넣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신령족과 영지, 교황청의 봉인지에 걸어둔 용맥에 이상이 있다면 알아챘을 터.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도 없었으니 ‘뱀’이 움직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이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칼리의 곁이었다. 그동안 배가 제법 불러온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카이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왔어요?”
카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밀어서 그녀의 배 위에 얹었다.
“고맙다.”
“뭐가요?”
카이는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퀸과 요 녀석 덕분에 위험한 상황을 넘겼어요.”
위훌루와 마야는 카이가 나타났을 때부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칼리는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의 경지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마야가 놀랐는데 마치 신령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게다가 그 어깨 위에 있는 건 뭐죠?”
위훌루와 마야가 동시에 묻자 카이는 신조를 칼리의 어깨 위로 날려 보내고는 답했다.
“이번에 큰 깨달음을 얻었어.”
그냥도 8성 대마법사였던 카이가 큰 깨달음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것을 얻었고, 그건 위훌루와 마야도 느끼고 있었다. 그냥 앞에 있는 것만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격의 차이.
둘이 긴장한 모습을 보고 카이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뱀’과 싸울 준비가 됐다.”
위훌루는 뭐라고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었다. ‘뱀’은 신지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분명 그들이 모시던 신령이었으니까.
믿고 모시던 신령을 대적할 만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믿기도 힘들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흥!”
위훌루가 코웃음을 치고 떠나자 그를 흘끔 바라본 카이가 칼리를 보고는 말을 이었다.
“온 김에 신지에 다녀올게요. 늑대의 신령이 걱정되기도 하니까.”
“같이 가줄까요?”
카이는 고개를 내젓고는 홀로 신지로 내려갔다. 그렇게 신지에 도착한 카이의 앞으로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의 신령은 카이를 내려다보며 기가 막혀 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카이는 자신의 뒤를 바라보았다. 피스토가 등장하면서 혈해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처럼 카이의 뒤로는 익숙한 풍경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이는 신지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세계가 열린 것을 깨닫고는 미소를 지은 채 닫아 버렸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아, 이거?”
카이는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은 신조를 보았다. 벌새처럼 작지만, 그 품고 있는 힘과 격은 늑대의 신령에 비견되는 존재였다.
그리고 카이 또한 그만한 힘과 격을 가졌다.
“이제 ‘뱀’을 죽일 준비가 됐지.”
늑대는 카이의 대답에 고개를 내저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은 늑대는 카이를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뱀’ 때문에 네가 그만한 힘을 손에 넣은 것이지만, 반대로 네가 그만한 힘을 얻었기에 ‘뱀’도 힘을 얻게 될 거다. 인과가 비틀릴 정도의 힘이야.>
카이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이만한 힘을 가졌으니 ‘뱀’도 강해질 거라는 건가?”
<그래. 인과가 비틀릴 정도의 힘이다. 인간이 그만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 믿기 힘들 정도로.>
카이는 늑대의 걱정에 잠깐 고민하다가 답했다.
“인과가 비틀렸다고 해도 상관없어. 인과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난 당연히 인을 택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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