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도전
델라니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민하다가 답했다.
“하늘신 시엘의 대적자로 알려진 피스토는 계약을 통해 상대의 영혼을 취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하늘신 시엘과의 싸움에서 패해 연옥에 떨어졌다고 해요.”
“연옥?”
“또 다른 이름은 혈해라고 하죠.”
카이는 그 말을 듣고는 인상을 굳혔다. 핏물의 바다. 피스토의 영역을 떠올린 카이는 그게 연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피스토의 능력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신화의 영역이라 자세한 건 알지 못해요. 피스토를 소환하기 위해 그 파편을 이용한 자들이 사용한 능력은 상대의 영혼을 오염시키는 능력을 사용했었죠. 시엘의 가호가 없이 만났던 이들은 그들과 대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였어요. 아무리 많은 이들이 동원되어도 결국 그들의 편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피스토의 종이 되어 우리를 공격했죠.”
카이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피스토를 추종하는 자들은 모두 토벌했다고 들었습니다.”
“예.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는 그랬죠. 그렇게 파편을 모았고요.”
카이는 잠시 주저하다가 답했다.
“사실 제국이 보유 중이던 파편을 제가 받았습니다.”
델라니와 아나벨의 눈이 커졌다. 그 물건을 인계받고 싶었지만, 제국이 내놓지를 않고 있었다. 자신들이 충분히 봉인할 수 있다고도 했는데 그건 신성 교국보다 제국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던 선대 황제의 뜻 때문이었다.
그런 물건을 받았다는 것에 놀라는 그들에게 카이가 피스토의 파편을 꺼내 보였다.
그걸 본 델라니가 눈짓하자 아나벨이 그걸 들어서 살펴보더니 답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제국에게 사기 당한 것 같아요.”
카이는 그녀가 그리 느끼는 것을 이해했다.
“피스토의 잔재가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렇기는 한데 이런 저주 받은 물건들은 몇 개 있어요. 생긴 것은 전해지는 피스토의 파편을 닮았지만, 이 안에 피스토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아요.”
카이는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신령족의 봉인술이 뛰어나 그곳에 봉인하고자 피스토의 파편을 가지고 갔었습니다. 신령족이 모시는 신지에 봉인하려고 했을 때 피스토가 현현했고, 신지를 잠식하려다가 신령에게 머리를 물어 뜯겨 죽었습니다.”
“에?”
아나벨은 성녀가 된 이후 처음으로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피스토가 현현하고 죽었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피스토의 파편이 작아서인지 제힘을 모두 발현하지 못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걱정하는 건 피스토가 자신이 늑대에게 먹힐 것이라고 내게 미리 말했었다는 거죠.”
“피스토와 대화를 나눴다고요?”
카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델라니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8성 대마법사가 하는 농담치고는 질 나쁜 농담이군요.”
아나벨도 고개를 끄덕였다.
“피스토가 현현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저희가 알았을 거예요.”
카이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놈은 현현한 적이 없었으니까.
자신이 파편 안으로 들어가 놈을 만났고, 다음에는 신지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 세계에 현현한 적은 없었다.
“늑대에게 먹힌 날에 이곳 봉인지에 문제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델라니와 아나벨은 그 말에 인상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봉인지에 문제가 생긴 일은 근래에 없었다.
아나벨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혹시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나요?”
카이가 봉인지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고 있었던 것도 의아했지만, 그가 오늘 찾아온 이유도 생각해 봐야할 문제였다.
카이는 그녀의 물음에 순순히 답했다.
“피스토의 파편을 얻었기에 남은 하나도 탐색 마법으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갔을 때 ‘뱀’을 만났죠.”
아나벨 성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말은 ‘뱀’이 피스토의 파편을 먹었다는 건가요?”
“예. 그리고 어제도 봉인지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때 문제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카이의 대답을 들은 델라니와 아나벨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에게 있어 피스토는 시엘의 대적자로 교단 최흉의 적이다. 그를 추종하는 것만으로 말살해야 하는 그런 존재.
그런 피스토를 ‘뱀’이 먹었다고 하니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모르겠다.
“그럼 피스토가 ‘뱀’의 영혼을 빼앗을지도 모르겠군요.”
카이는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그만한 피스토의 격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늑대도 뱀도 그 격은 아득히 높아요.”
델라니와 아나벨이 생각하는 피스토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었다. 오직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시엘 뿐이라고 여겼으니까.
“결과가 어찌 되었든 피스토의 다른 파편들이 봉인지를 반파할 만큼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피스토가 힘을 그냥 순순히 빼앗겼다고만 볼 수는 없는 상황이에요.”
델라니의 말에 아나벨도 고개를 끄덕였다.
“성전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성전?”
“피스토를 집어삼킨 ‘뱀’이 피스토에게 몸을 빼앗기든 아니든 우리의 주적으로 선포해야 하니까요.”
카이는 그 말에 잠시 주저하다가 답했다.
“사실 ‘뱀’은 투신 헥토르와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피스토의 파편을 노리고 이곳에 올 것에 대비해 이곳 상황을 알아둬야 했어요. 다행히 제가 봉인 마법진을 펼쳤기에 이곳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알고 대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나벨이 도움을 청할 줄은 몰랐지만, 덕분에 ‘뱀’과 헥토르가 이곳을 노릴 때 알 수 있게 조치할 수 있었다.
그런데 피스토가 영혼을 오염시키는 방식으로 싸운다고 하니 골치 아프게 됐다. 늑대의 신령이 피스토에게 당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걸 예견한 것을 보면 뭔가 수작을 부릴 수도 있을 테니까.
‘뱀’이 피스토를 집어삼키는 것은 걱정이 없었다. 어차피 죽여야 할 놈들이니까.
카이는 델라니와 아나벨이 성전을 선포할 것 같은 분위기이기에 솔직히 말했다.
“그리고 8성인 투신 헥토르와 ‘뱀’이 함께 하니 무리한 희생은 없었으면 합니다.”
신성 교국이 성전을 선포하면 곤란하다. 투신 헥트로와 ‘뱀’을 잡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신성 교국이 벌였던 성전은 수많은 이들을 죽였다. 죄 있는 자 하나를 잡기 위해서 백 명을 죽여야 한다면 서슴없이 저질렀던 것이 성전이다.
그러니 성전은 막는다.
성전을 선포하면 신성 교국은 눈이 돌아가고, 하늘신 시엘을 믿는 이들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놈들을 노릴 테지만, 노린다고 찾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뱀’이 공간 이동을 손에 넣은 지금은 더욱 그렇다. 제대로 된 연락 체계도 없이 놈들을 만났다가는 무수한 피만 흘릴 뿐이다. 게다가 ‘뱀’의 독 중에는 사람을 독인으로 만드는 끔찍한 것도 있다.
문그록을 이용해서 만들었던 담배를 잊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피스토에게 ‘뱀’의 목적을 들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걸 들을 기회는 영영 사라졌다.
피스토의 파편이 다섯 개 남았지만, 모두 봉인되어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갈 마음은 없으니 피스토의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델라니도 아나벨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성전은 성급하게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피스토가 현현한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아. 교황 성하와 대주교와 상의해 보렴.”
“알겠어요.”
델라니의 시선이 카이를 향했다.
“피스토에 관련된 것 외에 또 궁금한 것이 있나요? 봉인을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에는 부족한데요. 오히려 중요한 정보를 받기만 했고요.”
“아닙니다. 그보다 혹시 세상의 끝을 아십니까?”
델라니는 생각도 못 했던 질문을 받은 것에 당혹스러워하다가 답했다.
“바다에 끝에 낭떠러지가 있다는 전설 말인가요?”
“예. 혹시 교국에서는 그에 대한 정보가 있습니까?”
델라니는 그 말에 생각해 보다가 답했다.
“세상의 끝을 보겠다고 떠난 신관들은 많았지만, 돌아온 이들은 없었어요.”
카이도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독존하는 자신도 형체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것을 떠올리면 그 선을 넘어서면 존재 자체가 흩어질 터였다.
교국에는 뭔가 그에 대한 정보가 있을까 싶었지만,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하늘신 시엘은 그 세계의 선과는 연관이 없는 것 같았다.
솔직히 그만큼이나 먼 곳이라면 배를 타고 두 달을 그 방향으로만 이동해야 만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니 항로에도 들어가지 않을 터였다.
무모한 모험가들이 그곳으로 향할 테고, 그들의 연락은 끊겼을 테니.
세계의 끝을 보았다고 지금 당장 카이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카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뱀’을 상대하는 일이니.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은 잠시 접어둘 생각이었다.
“피스토에 관련된 자료를 얻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고작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가능해요. 아나벨. 피스토와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서 전해주렴.”
“그럴게요.”
델라니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온 카이는 아나벨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와 차를 마시며 기다리는 동안 피스토에 관련된 자료들이 방에 쌓이기 시작했다.
“자료는 이 정도고, 원하신다면 피스토에 관련된 저주받은 물건들도 구해드릴 수 있어요.”
“봉인된 물건까지 꺼낼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피스토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만 파악하면 되니까요.”
카이가 공간 확장 가방에 자료들을 다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피스토가 현현하면 그때는 저도 나설 테니까 연락 주세요.”
“고마워요. 오늘 도움 주신 것도 감사하고요.”
“아닙니다. ‘뱀’에게 피스토의 파편을 빼앗긴 것이 미안할 따름이죠.”
“어차피 저희도 못 찾았던 건데요. 그건 어디 있었나요?”
“제국의 함벨 산맥에 숨어 있었어요. 그들 전부를 투신 헥토르가 모두 죽이긴 했지만요.”
아나벨은 그 말에 살짝 인상을 굳혔다.
“하긴 그라면 그러고도 남았겠네요.”
투신 헥토르는 전쟁의 신을 섬기는 자다. 전쟁의 신을 대변하는 검과 같은 존재.
피스토를 추종하는 자들을 상대로 손에 사정을 둘 자가 아니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카이가 그 말을 끝으로 공간 이동으로 떠나자 그가 머물렀던 자리를 바라보던 아나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교황과 대주교에게 연락을 넣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전의 선포는 미룬다고 하더라도 오늘 들은 이야기는 자신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굵직한 일들이었다.
피스토의 자료를 가지고 영지로 돌아온 카이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카메룬. 여기는 무슨 일입니까?”
방랑 마법사단장 카메룬은 덴다르트, 메르샤와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중에 카이가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문그록의 일을 조사하면서 이곳으로 오는 길이었는데 벌써 문그록은 처리했다는 말을 들었네.”
“그렇게 됐죠.”
카메룬은 덴다르트에게 문그록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들었기에 상황은 이해했지만,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카이는 카메룬을 바라보다가 가방을 열며 말했다.
“잘됐네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때에 카이가 가방에서 피스토와 관련된 자료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산처럼 쌓이는 자료들을 보며 덴다르트와 카메룬의 시선이 카이를 향했다.
“자료 분석하고 약점을 찾는 것은 역시 마법사들이 해야 할 일이죠.”
덴다르트와 메르샤, 카메룬이 모두 자료를 바라보자 카이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피스토에 관련된 모든 자료입니다. 교국에 들러서 가지고 왔어요.”
모두 관심을 보이자 카이가 말을 이었다.
“피스토가 신지에서 늑대에게 먹혔을 때도, ‘뱀’에게 먹혔을 때도 교국의 봉인지의 봉인이 들썩였다고 하는 걸 보면 그냥 먹힌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카이는 인상을 굳힌 채 말을 이었다.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을 찾아보도록 하죠.”
덴다르트가 고개를 끄덕일 때 카메룬도 답했다.
“본산에도 연락을 취해서 알아보지. 피스토에 관련된 자료가 있을 걸세.”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메르샤가 카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했다.
“뭐야? 너는?”
“다녀올 곳이 있어.”
“어디? 같이 가.”
지금까지 태초의 속성을 깨우면서 자만했었다. 또 하나의 태초의 속성을 깨우고, 제대로 수련에 임할 생각이었다.
그저 천천히 주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9성에 도전한다.
돌싱 후 대마법사-뇌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