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파편
아나벨 성녀는 신성 교국의 보고로 걸음을 옮겼다. 다섯 개의 보고를 지나 가장 지하에 도착한 아나벨 성녀는 그곳에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문의 앞에는 굵직한 사슬이 감겨 있었다. 물리적으로도 열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만들어 놓은 봉인지. 이곳이 열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문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신성 교국에서도 특별히 키운 이들. 이들은 오직 하늘신 시엘을 받들며 봉인지를 지키고 유지하는데 평생을 바치는 이들이다.
아나벨 성녀는 그곳의 수장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네가 왔구나.”
전대 성녀 델라니는 이미 환갑을 넘었음에도 피부에 주름 하나 지지 않았다.
“예.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받았어요.”
성녀가 그 지위에서 물러나면 죽어서 물려주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이곳으로 와서 일생의 마지막을 봉인지를 지키는데 보낸다.
어지간한 일이었다면 아나벨 성녀에게까지 전해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불렀다는 것은 그만큼 어제 일어난 이변이 특별했다는 것.
“어제 봉인이 깨질 뻔했다.”
“피스토의 봉인 말씀이신가요?”
“그래. 봉인지를 지키는 봉인 신관 중 일곱이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전문적으로 봉인식만 배운 이들인 봉인 신관은 고급 인력이다. 그런데 그런 봉인 신관 일곱이 충격만으로 죽었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봉인이 깨질 수도 있었다는 얘기였다.
“봉인식을 보강해야 하기에 네 도움을 받으려고 불렀다.”
“이유가 있을까요?”
“피스토의 파편 중 제국에 있는 것과 아직 발견하지 못한 파편. 둘 중 하나에 뭔가 이변이 생긴 것이겠지. 그게 이곳까지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
아나벨은 카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일단 봉인을 해결하고 나서 그를 만나봐야겠다고 여겼다.
“그럼 시작하죠.”
델라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서며 신성력을 꺼냈다. 그녀가 일으키는 신성력을 보며 아나벨은 새삼 감탄했다.
성녀를 물려줬다는 것은 하늘신 시엘의 은총을 아나벨에게 넘겼다는 이야기.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7성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고, 신성력도 크게 줄지 않았다.
델라니가 수인을 맺으며 봉인술식이 그녀의 앞에 나타나자 아나벨도 신성력을 일으켰다.
그녀도 봉인술식을 짜고, 뒤에 대기 중이던 서른두 명의 봉인 신관들이 함께 봉인술식을 펼쳤다.
봉인지를 막은 거대한 사슬 위로 봉인술식이 새겨지며 푸른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막대한 신성력을 받아들이며 푸르게 빛나는 사슬은 물리력을 넘어 신성력까지 깃들어 있는 것.
피스토의 파편이 반응을 일으키며 깎아냈던 봉인술식이 다시 보충되었다.
델라니는 봉인술식이 완성되고 나자 긴 숨을 토해내고는 시선을 돌려 아나벨을 보았다.
“외부에서 일어난 문제는 네가 알아봐다오.”
“예. 그럼 또 오겠습니다.”
“됐다. 어차피 성녀를 물려주고 나면 평생을 지내야 할 곳. 이곳은 내게 맡기고 물러나거라.”
아나벨은 델라니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델라니는 그런 아나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아름답게 빛나고 성스러움을 대표하는 성녀라는 직업이 얼마나 험난한지 빤히 알기에 그녀가 조금이라도 천천히 이 봉인지에 오기를 바랐다.
그러자면 자신이 오래 버텨야 했다.
신지에서 돌아온 카이에게 달려온 칼리가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카이는 그런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그래요? 그보다 어떻게 들어갔다 온 거예요?”
카이는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길이 보이더라고요.”
칼리는 카이의 품에 안긴 채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여겼다. 그런 카이를 바라보던 마야가 불쑥 물었다.
“신지에 다녀오는 길입니까?”
칼리는 당연한 말을 하는 마야를 빤히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눈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볼 일이 있었거든.”
“인간의 몸으로 어떻게 신지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거죠?”
마야의 눈이 위험할 정도로 반짝이는 것을 보고 카이가 담담히 말했다.
“운이 좋았지.”
피스토의 파편을 통해서 다른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피스토가 말했던 대로 늑대는 그를 잡아먹었다.
놈이 먼저 수작을 부리기는 했지만, 그 말이 그대로 이어진 것을 보니 살짝 걱정됐다.
“혹시 저도 신지로 갈 수 있겠습니까?”
마야의 물음에 카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불가능해. 독존하지 못하는 이는 그곳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마야는 그 말에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독존하지 못하는 이가 신지에 든다면 아마 그 영역에 휘말려 자신을 잃을 터였다.
진짜 신지는 칼리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으니까.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진짜 신지에 다녀오셨나 봅니다.”
“진짜 신지요?”
칼리의 시선이 카이를 향하자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령이 현현해 있는 그들만의 세계. 신지를 말하는 거예요.”
“진짜로 신령님을 뵈었다고요?”
카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리의 눈이 몽롱하게 변했다. 지금까지 신령들이 신령족에게 뜻을 전할 때만 몸을 빌려줬던 칼리에게 그 얘기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신령족이 신령을 모시고 살고, 대족장이 신령의 대변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신령이 신령족에게 뜻을 전하는 경우는 없었다.
‘뱀’이 보옥을 훔쳐 도망치는 바람에 직접 늑대를 받아들인 적이 있던 칼리에게 직접 그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모시던 신령과 카이가 동격이라는 이야기였으니까.
자신의 짝이 신령과 동격이라는 말에 그녀의 가슴에는 뿌듯함이 가득 차올랐다.
카이는 칼리를 꼭 안아주고는 말했다.
“몇 가지 알아볼 것이 있어 다녀올게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괜찮아요.”
카이는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공간 이동으로 떠났다.
칼리는 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마야를 돌아보았다.
“나 짝을 잘 고른 것 같지?”
“대족장이 언약식을 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지 않습니까?”
칼리는 그 말에 미소를 짓고는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영지로 돌아온 카이는 피스토의 파편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그 힘을 잃어버린 피스토의 파편에는 그 잔재만이 남아있었는데 카이는 그거면 족했다.
카이의 능력이라면 이 잔재만을 가지고도 마지막 파편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카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걸 해내려면 카이 본신의 마력으로도 부족했다. 게다가 마법진의 도움도 받아야 했다.
대규모 탐색 마법. 어쩌면 대륙 전역을 훑어야 할지도 모르니 들어갈 마력은 용맥의 힘을 끌어다 쓴다.
카이는 홀로 영주 성 위에 떠올랐다. 그곳에서 카이의 마력이 실이 되어 허공에 입체적으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피스토의 파편에 남은 잔재를 쫓아 또 다른 것들을 찾기 위한 대륙 단위의 탐색 마법.
조합 마법진과 결합 마법진이 차례로 사용되어 카이의 주위에 형태를 이룬다.
카이는 태초의 순수 마력을 뽑아내어 마법진을 활성화 시켰다. 탐색 마법 자체는 성급이 높지 않았지만, 그 규모가 대륙 전역이라면 이미 그건 8성을 뛰어넘는 마법이나 다름없었다.
카이가 일으킨 마력이 마법진을 가동하고 용맥의 마력으로 마법진을 유지한다.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탐색 마법.
카이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동심원의 크기가 점점 커져 나갔다. 오직 피스토의 파편을 찾기 위한 마법.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피스토의 파편에 대한 정보만 받아들인다고 해도 뻗어 나가는 범위가 아득하게 넓었다. 카이는 그 모든 정보를 받아들였다.
처음 시도한 일이었는데 이것은 카이에게도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독존하면서 어떤 외부의 영향에도 휩쓸리지 않게 되었던 카이가 피스토의 파편을 찾고자 만들어낸 마법은 그의 정신을 확장시켜 주었다.
피스토가 보였던 핏물의 바다. 신지의 그 녹색의 땅.
그곳은 그들의 영역이었다.
독존하게 된 카이는 그 영역 내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지만, 아직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던 것.
그 부분에 대해서 염두에 두었지만, 지금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고 여긴 카이는 피스토의 파편을 구해서 확인해 볼 생각만 했는데 탐색 마법진을 펼치며 대륙의 정경을 모두 눈에 담아내고 있었다.
피스토의 파편을 찾는 것이지만, 대륙의 형태가 고스란히 머릿속에 각인되어 갔다.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들을 느낀다.
그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기연. 카이의 마음속에 대륙이, 세계가 그려졌다. 그걸 인지하는 것만으로 큰 도약을 이루는 중이었다.
그렇게 뻗어 나간 탐색 마법이 대륙을 넘어 바다로, 그 너머로 가던 중에 사라졌다.
“응?”
카이의 탐색 마법은 용맥의 마력을 몽땅 끌어다 쓸 정도로 큰 규모였는데 바닥을 탐색하던 중에 흩어져 사라졌다.
마치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흩어져 버리는 탐색 마법에 카이는 그곳으로 공간 이동했다. 바다 위의 하늘에 뜬 채로 카이는 마력을 뻗어 보았다.
그 마력은 눈앞에서 흩어진다.
카이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보았다. 카이의 손이 어느 선을 넘은 순간 강렬한 압력을 느꼈다.
독존하지 못했다면 육체가 붕괴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뭐지?”
마치 여기까지가 세계의 끝이라는 것처럼. 이곳을 넘어서면 아무리 독존하는 카이라고 해도 간신히 몸을 유지하는 것이 전부라는 느낌.
카이조차 지금은 감히 그곳을 넘어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전설과는 조금 다르군.”
과거 세계의 끝, 바다의 끝을 여행한 해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세계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낭떠러지라고 했었다. 그곳으로 들어간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라는 말도 전해졌다.
솔직히 낭떠러지는 없었다. 단지 그곳을 넘어서는 순간 독존하지 못한 이들은 존재 자체가 흩어질 뿐이다.
카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정해놓은 세계의 끝이고, 선인지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카이도 이곳을 넘을 자신이 없을 뿐이었다. 독존하니 버틸 수는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일지 알 수 없었다. 이 선을 넘었을 때 얼마나 넓은 곳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모하게 들어설 수 없을 뿐이었다.
언제고 ‘뱀’을 처리하고 난다면 미지를 탐구하기 위해서 이곳에 들를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피스토의 흔적을 찾았으니 그곳으로 다가갈 따름이다.
카이가 공간 이동으로 향한 곳은 대륙 동부. 제국을 가로지르는 함벨 산맥의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피스토의 파편을 읽은 카이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짙은 혈향만이 남아있었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피스토의 파편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지금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사라진 것처럼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모습에 인상을 굳힌 카이의 시선이 마을 중심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그 위에 피를 뒤집어쓴 채 앉아있는 사내가 있었다. 2미터에 달하는 거구.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는 자로 처음 보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투신?”
카이의 물음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시체의 산에서 카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뭔가가 이곳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기대했다. 누군가 찾아오기를.”
헥토르가 시체의 산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온다. 그의 발밑에서 시체가 으깨지는 모습을 보고 카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싸움을 즐기는 자라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무력한 이들을 학살하는 쓰레기인 줄은 몰랐군.”
“이거 말인가?”
헥토르는 바닥에 내려서서는 담담히 말했다.
“피스토를 숭배하는 자들이더군. 다른 신을 모시는 자들을 상대로 손에 사정을 둘 필요는 없지.”
헥토르가 마력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보다는 바헬을 죽였다는 그 솜씨. 한번 보고 싶군.”
헥토르의 몸이 사라지고, 카이가 만든 빙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순간이었다.
쩌엉!
카이의 빙옥이 산산이 조각나는 것을 보면 확실히 헥토르는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강자였다.
8성에 이른 투사.
카이는 깨져나간 빙옥 너머에서 희열에 찬 미소를 짓고 있는 헥토르를 향해 마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뱀’의 수족인 너를 여기서 잘라내 주마.”
그때 헥토르가 인상을 구긴 채 말했다.
“아쉽군.”
“뭐?”
“아쉽지만 다음에 보자고.”
카이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태초의 얼음 결정을 꺼냈다.
“누구 마음대로?”
카이가 일으킨 얼음 폭풍이 헥토르를 덮쳐갔다. 헥토르는 그런 카이의 얼음 폭풍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콰자자작!
얼음 폭풍을 흩어내는 강력한 일권. 카이도 그 일권의 영향을 벗어나기 위해 실드를 비켜내며 몸을 피해야 할 정도였다.
다른 8성의 강자들을 만나보았지만, 이만큼 강한 자는 처음이었다. 단순한 무력이 검성이나 위훌루보다도 윗줄인 것 같았다.
퀸이 대적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강력하면서도 단단한 마력의 소유자.
카이가 태초의 속성들을 연달아 꺼내는 사이에 헥토르의 몸을 반투명한 ‘뱀’이 휘감더니 동시에 사라졌다. 눈앞에서 공간 이동을 펼치는 모습.
게다가 그 발동에서 느껴지는 흔적을 읽은 카이는 인상을 굳혔다.
“이건 바헬의 방식인데?”
대마법사들이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고 해도 각기 다른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조금 전 보여준 흔적은 분명 바헬이 공간 이동을 할 때 보여주던 흔적이었다.
바헬은 ‘뱀’에게 넘어가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지만, 그의 능력은 고스란히 ‘뱀’에게 넘어가 있었다.
“애초에 바헬을 되살린 것도 그 힘을 온전히 가져가기 위해서였나?”
피스토의 파편을 찾아서 왔는데 이미 ‘뱀’과 헥토르가 왔었다는 것은 저들이 이미 피스토의 파편을 얻었다는 뜻. 보옥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나 그 파편을 얻는 것만으로 ‘뱀’이 현세에 미치는 힘이 더 강해진다고 했었다.
“교국으로 가봐야겠군.”
돌싱 후 대마법사-봉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