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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 후 대마법사-117화 (117/150)

117화 언약식

신령족.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이들. 보통 대수림에서 간간이 뛰쳐 나오는 야만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그들의 위세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도시 중앙에 만들어진 게이트와 그곳을 중심으로 쭉 뻗은 대로. 그 좌우에 도열해 있는 이들이 뿜어내는 기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

머리 위까지 집이 지어져 있는 거대한 도시.

나무로 만들어 놓은 집들인데도 경관을 해치지 않았다. 그런 집들과 대로에도 모두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도시 전체가 꽃밭으로 보일 정도였고, 은은한 향까지 머물고 있어 야만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쭉 뻗은 대로를 따라 걸어간 끝에 있는 이들을 보고 잠시 숨을 멈췄다.

손님을 맞이하러 나온 이들의 수준이 생각 이상이었다.

맥클렌과 테오르도 그 둘을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을 보니 8성에 이른 이들인가 보다.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8성에 이른 전사와 주술사를 수하로 두고 있다면 제국의 황제가 부럽지 않은 존재였다.

그만한 여인이라는 것을 깨닫자 새삼 그녀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클란드라가 함께 온 카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신부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

카이가 돌아보자 마야가 답했다.

“그건 제가 안내하죠. 따라오세요.”

그 말에 신부를 만나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테오르도 은근슬쩍 그쪽을 따라갔는데 아무래도 마야가 움직이니 클란드라가 걱정이 되었나 보다.

클란드라는 마야의 안내를 받아 간 곳에서 신령족의 전통 의복을 입고 있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색색이 물들인 천으로 감싸고 있는 여인을 본 클란드라는 솔직히 감탄했다.

피부색이 다르지만, 그녀가 미인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풍기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성녀를 떠올리게 했다.

그뿐인가?

만인을 다스리는 이들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그것은 타고난 귀족적인 분위기였는데 그런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포용하는 온화함도 느껴진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이를 대하면서 얻은 감각으로도 재단하기 힘든 여인이었다.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류의 여인.

카이의 안목이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런 여인이니 자신을 거절한 카이가 반했겠다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퀸이 다가가 여인에게 팔짱을 끼고 환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이제 엄마라고 불러도 돼?”

“아직 안 돼. 식을 올리고 나야 허락할 거야.”

목소리는 듣는 이의 귀가 쫑긋거릴 정도로 신경을 잡아끌고 있었다.

마야가 귓가에 뭐라 속삭이자 칼리의 시선이 클란드라를 향했다.

“카이의 지인이군요. 와줘서 고마워요.”

클란드라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클란드라라고 해요. 그리고 이건 제가 드리는 결혼 축하 선물이에요.”

황궁 보고를 뒤져서 가지고 온 물건이었다. 칼리가 고맙다는 뜻으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선물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커다란 보옥이었는데 그걸 내려다보는 칼리에게 클란드라가 설명했다.

“가지고 있으면 노화를 늦춰주고, 피부에 광채가 흐른다고 해요.”

“귀한 물건이겠네요.”

“카이님의 결혼 축하 선물인데 성의를 보여야죠.”

“고마워요.”

클란드라는 가만히 칼리를 바라보다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결혼을 축하해요.”

“고마워요.”

클란드라는 마음으로 승복하고 마야의 안내를 받아 식장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이동한 식장은 나무뿌리가 만든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고, 머리 위로는 하늘거리는 가지와 잎이 내려와 있었다.

마치 나무가 만들어 준 것 같은 식장을 본 테오르가 감탄했다.

“이곳 주술사들의 능력이 대단하군. 아니면 이 나무가 대단한 건가?”

테오르는 나무를 만져보고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기묘한 힘을 감지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맥동하는 기운은 테오르도 처음 보는 기운이었다.

카이에게 가르침을 받아 그 수준이 높아졌기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서 알 수 있었다. 이 나무는 테오르가 보기에도 그 격이 다른 존재였다.

신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하지만, 그 격은 알아볼 수 있는 이들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만약 여기서 난장을 피우면 이 나무가 그 상대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식장이라고 해서 왔더니 이건 요새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곧 신령족 측에서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그제야 마야가 단에 올랐다. 그녀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꺼냈다.

“오늘은 신령족의 대족장 칼리와 신령의 선택을 받은 카이가 앞으로 인생을 함께할 약속의 증인이 되어주기 위해 이렇게 모인 자리입니다. 그럼 그 둘은 이곳으로 나오세요.”

그 말이 끝나자 식장 양쪽의 나무뿌리가 움직여 문을 만들었고, 그곳으로 카이와 칼리가 걸어 나왔다. 양쪽에서 걸어오던 그 둘이 마야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그녀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마야의 눈이 뒤집히고 새하얗게 변하더니 곧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약속은 나, 늑대의 신령이 증명하고 축복하는 자리이다. 이 자리에 함께해서 증인이 되어준 그대들에게도 축복을 내리니 이들의 언약이 영원히 유지되도록 지켜봐 주기 바란다.>

마야가 양손을 펼치자 그의 양손 끝에서 푸른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 이곳에 참석한 이들에게 하나씩 날아들었다. 맥클렌이 나서서 클레바논을 막으려고 할 때 테오르가 그를 막았다.

“태사!”

테오르가 살짝 고개를 내젓자 맥클렌도 검을 뽑지 않았다. 그렇게 날아든 빛이 클레바논의 몸에도 적중했다. 클레바논은 옷을 열어 자신의 가슴에 그려진 문양을 보았다.

늑대의 문양이 그려진 것을 보고 클레바논이 돌아보니 맥클렌과 테오르도 그걸 받아들였다. 맥클렌이 그 기운을 느껴보더니 클레바논의 의문을 풀어줬다.

“마력의 흐름이 훨씬 부드러워졌습니다.”

테오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 그대로 축복이로군. 적어도 해가 될 일은 없겠어.”

그러나 성녀에게만은 통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푸른 빛이 일어나 날아오던 축복을 튕겨냈다.

마야의 시선이 그쪽을 향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시엘의 종이구나. 그녀의 축복을 듬뿍 받았다면 내 축복은 받지 않아도 되겠지.>

그리 말한 마야가 카이를 내려다보았다.

<너 또한 이미 내 축복을 받을 수준을 넘어섰구나. 저번에만 해도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카이는 자신이 독존한 이후로 누군가의 축복 따위로 강해질 수준을 넘어섰음을 알았다. 카이는 신령의 축복을 받은 칼리를 돌아보았다.

칼리만이 아니라 배 속의 아이에게까지 축복을 내린 모습에 카이가 한마디 했다.

“내 아이한테 허튼 수를 부리면 가만 안 둔다?”

대족장이 된다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이에게 손을 쓴다면 그냥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럴 마음은 없다. 너의 피와 대족장의 피를 이었으니 가만두어도 그 아이는 고금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영성을 지닌 아이가 될 거다. 그러니 마음 놓아라. 다만 이 축복을 내린 덕에 석 달은 힘을 쓰지 못하니 그동안 ‘뱀’과 정면으로 붙지는 말아라.>

언제 ‘뱀’과 조우할 줄 알고 이렇게 무식하게 일을 진행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축복은 여러모로 도움이 될 터였다.

<이것으로 약속은 이뤄졌으니 그대들의 앞날에 행복만이 가득하길 빌지.>

그 말을 끝으로 마야의 몸에서 늑대의 신령이 빠져나갔다. 마야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단상에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둘이 영원을 약속했으니 이제 축제를 시작합시다!”

대족장인 칼리의 결혼식이라 제사장인 마야가 나서서 주관하던 식은 그녀가 축제의 시작을 알리자 식장 전체의 나무뿌리가 움직여 개방되고 곧 사방에서 불길이 올랐다.

북소리가 들리고 시끄러워지기 시작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이가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칼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서야 어디 편히 쉴 수 있겠어요?”

“조금 그렇죠?”

“그럼 제 별장으로 가죠.”

“별장이요?”

“한적한 곳이니 이곳과는 다를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카이가 칼리의 손을 잡고 그대로 공간 이동했다. 이 자리의 주인공들이 사라졌지만, 그들은 오히려 더 크게 떠들고 웃었다.

클레바논을 지키고 있던 검성 맥클렌에게 다가온 위훌루가 먼저 술잔을 건넸다.

“전에 바헬과 함께 습격한 자가 투신이라고 하더니 그에 못지않은 출중한 기도를 내보이고 있군. 한 잔 받으시겠소?”

맥클렌이 살짝 고개를 내저을 때 클레바논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앞으로 나섰다.

“날 지키는 것이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태사가 지키고 있으니 회포나 푸시오. 그리고 나도 이 축제를 좀 즐겨야겠으니.”

춤을 추며 술을 마시고, 서로 부둥켜안는 신령족의 모습은 야만적이면서도 역동적이었다. 황궁에 틀어박혀 움직이지도 못하던 클레바논에게도 신비롭고 신나는 일이었다.

클레바논도 어느새 그들과 섞여 술을 마시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란드라가 고개를 휘휘 내저을 때 테오르가 그녀에게 꼬치 하나를 권하며 말했다.

“이곳 꼬치구이가 특별하구만. 하나 먹어 봐라.”

클란드라가 꼬치 하나를 받아 먹어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처음 먹어보는 고기에 과일이었다. 불맛이 느껴지는 꼬치를 먹으며 클란드라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주변의 북소리에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에 카이와 칼리가 사라졌다.

“둘은 어디로 갔을까요?”

“모르지. 대륙의 끝과 끝까지 공간 이동이 가능한 인간이니까. 아무래도 이런 시끄러운 곳보다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나 보지.”

“그런데 아이라니 무슨 뜻일까요?”

테오르가 그 말에 키득거렸다.

“아이를 가지고 급히 결혼하는 것 같던데? 아무래도 사고 친 것 같아.”

테오르는 술을 한 잔 쭉 들이켜고는 말했다.

“녀석도 사내였던 거지.”

벨트리안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별장으로 이동한 카이의 품에 안겨있던 칼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뭐죠?”

“호수에요.”

“호수라고요?”

카이는 그 물음에 오히려 되물었다.

“신령의 숲에는 호수가 없나요?”

“있다고는 들었는데 볼 일이 없었죠. 신지의 입구를 벗어날 일이 없었으니까요. 아마도 지금 내가 사라진 걸 알면 난리가 날 걸요?”

“흥. 어차피 당신이 없으면 들어가지도 못하는 신지의 입구인데 누가 뭐라고 한다는 겁니까?”

카이도 안다. 독존한 지금이라면 그곳을 지나갈 자신이 있지만, 그 전에는 자신조차도 그곳을 지나갈 수 없었음을.

‘뱀’이 직접 온다면 모르겠지만, 그곳에는 지금 대륙의 강자들이 모두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갈 정도의 시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라.

카이는 칼리를 껴안은 채 말을 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대륙을 구경시켜 줄게요. ‘뱀’이 당신을 노린 걸 보면 신지의 보옥을 노리는 것 같은데 당신이 내 곁에 있는 이상 수작을 부리지는 못할 테니까요.”

‘뱀’의 진체라면 모를까? 투신 헥토르라고 해도 카이의 상대는 아니다. 그런 카이가 지키고 있는 이상 칼리를 노릴 수도 없고, 칼리 없이는 신지에 들어갈 수도 없으니 저들이 손을 쓸 방법은 없었다.

투신 헥토르가 ‘뱀’에게 몸을 내준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8성에 오른 이가 ‘뱀’에게 몸을 내준다는 것은 그 깨달음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해서 오히려 더 약해지는 꼴이니 걱정할 바는 아니었다.

칼리는 카이의 품에 안긴 채로 호수를 바라보았다.

대족장의 지위는 사실 신령족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는 자리이다. 신지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리. 그런데 카이를 만나 처음으로 신지를 벗어났다.

처음으로 호수를 본 지금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카이는 칼리가 작게 흐느끼는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여인의 눈물을 보는 건 또 처음이라 당황했다.

“왜 그래요?”

“그냥. 좋아서요.”

칼리가 카이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들었다.

“입 맞춰줘요.”

카이는 그 말에 씨익 웃고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호수 위로 해가 저물어 가며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폐 신전의 중앙에 앉아있던 투신 헥토르의 전신에서 가공할 마력이 뿜어져 나오며 바닥에 쩍쩍 금이 가다가 신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쿠쿠쿵.

무너져 내린 신전의 중앙에 선 헥토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의 별들 가운데 전쟁의 신이 있는 별자리가 유독 환하게 빛났다.

헥토르는 그 별을 눈에 담으며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8성에 오른 뒤로 별다른 진전이 없었는데 이번에 신령족의 전사장 위훌루와의 싸움으로 큰 깨달음이 있었다. 덕분에 전쟁의 신이 축복을 내리니 전보다 확연히 달라졌다.

그런 헥토르를 보며 우로보로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화신이라도 될 생각이냐?>

“흥. 전쟁의 신이 내 몸에 깃드신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느냐?”

어째 자신을 따르는 이 중에는 저만한 녀석이 없는 것인가? 광신과도 같은 믿음에 그 성취 또한 남다른 자였다.

그것이 부러웠다.

돌싱 후 대마법사-답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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