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축복
그레이스의 대표 디자이너였던 에르케가 만들어온 반지를 보며 카이는 헛웃음을 흘렸다.
“반지를 이렇게 두껍게 만들 줄은 몰랐네.”
“뭐 남는 게 보석이고, 남는 게 트리달리움인데요.”
헬리움을 찍어내고도 남을 만큼의 트리달리움이었다. 그런 트리달리움이라고 해도 미적 감각에 떨어졌다면 이렇게 두껍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은 에르케가 작정하고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거 이중이네?”
반지가 두꺼운 이유는 얇게 편 반지가 두 겹으로 겹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에르케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아티펙트 제작을 지켜보았기 때문인지 그녀도 감이 있었다. 카이가 성장하면서 더 높은 성급의 마법을 그려낼 수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면적이 필요하다는 것을.
카이는 반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법진을 그리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이들이 확인하고 그 내부를 살필 수 있을 가능성이 없는 프로포즈에 쓸 반지니 조합 마법진에 허수를 넣을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반지에도 8성급 보호 마법을 걸어둘 수 있다.
8성급 보호 마법을 걸어둔다는 것은 투신의 공격도 막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카이는 이 반지를 통하면 상대가 설령 결계를 쓴다고 해도 뚫을 수 있게 만들 수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닌 오직 자신에게만 위험을 전하는 정도라면 충분히 넣을 수 있었으니까.
“좋아. 이 정도는 되어야지. 고마워. 에르케.”
그녀가 만들어준 반지는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다. 트리달리움 위로 진금을 이용해 선형으로 장식한 뒤에 그 위로 듀얼 다이아를 장식했다.
그 아름다움은 그레이스의 수석 디자이너인 명장 에르케가 온 힘을 다해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작 사흘 만에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마쳤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에르케는 지금 탈진해서 쓰러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고생했다. 필요한게 있으면 뭐든 말해.”
에르케는 그 말에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대륙의 모든 보석 세공사들이 우러러 보는 것이 저라는 건 아시죠?”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녀는 모든 보석 세공사가 선망하는 명실상부 대륙 최고의 보석 세공사가 되었다. 받은 돈으로는 뭐하나 싶었더니 모레이 왕국의 레드 헤머에 커스텀 제품을 주문 제작하고는 주구장창 보석만 깎아내는 중이다.
보석도, 진귀한 금속도 넘치도록 많은 영지의 창고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기에 그녀는 심심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 쉬고 싶으면 언제든 카이에게 말해서 벨트리안 호수의 별장에 갈 수 있었다.
카이가 직접 갈 필요도 없이 공간 이동으로 날려 보내는 것이 가능했기에 그녀는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었다.
카이는 씨익 웃고는 답했다.
“알겠어. 그러면 일단 쉬어라. 지금 네게는 잠이 제일 필요해 보이니까.”
“예. 그럼 저는 이만 자러 갑니다.”
에르케가 휘청거리며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카이는 자신의 앞에 놓인 반지를 바라보았다. 신령족의 결혼이 어떤 것인지 몰라도 자신은 자신의 방식으로 프러포즈를 하면 될 일이다.
카이가 태초의 순수 마력을 소환하고는 빠르게 손을 놀렸다. 반지 안쪽으로 마법진들이 하나둘 그려지기 시작한다. 결합 마법진과 조합 마법진에 축소 마법진.
이 모든 것을 더해도 8성급 마법을 하려면 반지 정도에는 무리였는데 카이의 성장은 비약적이었다. 조합 마법진 자체가 축소되었고, 그런 마법진들이 결합하면서 이뤄지는 절묘한 조화가 반지에 8성급 보호 마법을 그려냈다.
8성급 아티펙트의 활성화. 예전이라면 최상급 마정석을 광산 수준으로 들이부어야 가능했지만, 지금은 무한한 마력을 보급받을 수 있기에 활성화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카이가 그렇게 반지를 활성화 시키고는 가만히 그걸 들여다 보았다.
칼리를 안았던 것은 사실 그 분위기에 홀린 것이 아닌가 싶었을 정도였다. 아마 그녀가 유혹한다면 거절하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듣는 순간 느꼈던 그 기쁨은 참을 수 없었다. 퀸을 자신의 아이로 소개하고 키우는 것과는 또 다르다.
퀸은 자신과 함께 ‘뱀’을 대적할 대적자로 크고 있다면 칼리의 아이는 말 그대로 아이였다. 범상치 않은 재능을 지닌 것 같기는 했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왜 그렇게 느꼈을까?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을 통해 낫는 것일까?
엘디아에게 받았던 상처가 아무는 느낌이었다. 그녀에게 복수할 때와는 달랐다. 아직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대면한 정도로 그랬다면 아이를 직접 대면했을 때는 어떤 느낌이 들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프로포즈하고 승낙을 받은 후의 이야기다.
카이는 반지를 반지 함에 넣고는 그대로 공간 이동했다.
카이가 주고 간 사슴 신령의 뿔에서 나온 피를 응축한 보석 덕분에 마비독은 대부분 해독할 수 있었다. 해독했다고 해도 전투 중에 다치거나 죽은 이들이 꽤 되었다.
단 한 번의 습격에 도시 전력이 거의 반 토막 났다. 전사장과 제사장이 무사하니 전체 전력이 크게 준 것은 아니지만, 그 밑에서 성장할 이들이 크게 죽거나 다쳤다.
타베시도 팔을 하나 잃은 상황.
특히나 주술사들이 바헬의 마법에 많이 죽은 바람에 분위기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단번에 칼리의 곁으로 공간 이동한 카이는 그곳에 모인 이들을 둘러보았다.
위훌루는 카이가 온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나?”
“네가 있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전사들의 상태를 보러 갈 생각이다.”
마야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주술사가 많이 죽어서 훈련생들을 봐줘야 하네. 족장님을 부탁하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물러나는 그들을 보고 카이가 칼리를 돌아보았다.
“마야는 그렇다쳐도 위훌루는 왜 자리를 비켜주는 건지 알아요?”
“말 그대로 전사들의 상태를 보러 간 거겠죠.”
태연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고 카이는 픽 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것은 몰라도 아마 둘이 서로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은 아는 눈치였다.
카이는 그러나 단순히 마음만 주고받을 생각이 없었다.
카이는 품에 손을 넣고 잠시 주저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 고백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단순히 만나는 것이 아니라 결혼까지 생각한 프러포즈는 더욱.
그러나 이미 마음먹고 왔으니 물러날 곳은 없다.
“나와 결혼해 줄래요?”
칼리는 가만히 그가 보여주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신령족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대륙인의 감성이 잔뜩 들어가 있었지만, 아름다웠다.
그걸 알아본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같은 시국에 말이죠?”
웃음기 섞인 그녀의 표정을 보고 카이도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시국은 상관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원하고, 당신이 나를 원하니까 함께 하자는 겁니다.”
카이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대족장의 지위를 내려놓지 않아도 됩니다. 서로 오가며 함께 할 수 있으면 족하니까요.”
아직 공간 이동 아티펙트는 만들지 못했다. 용맥을 이용한다면 어떻게 게이트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직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무리해서라도 게이트를 열 생각이었다.
이쪽 도시에도 용맥을 끌어온다면 마나가 부족할 일은 없었으니까.
카이는 말재주가 없었지만, 그 마음만은 칼리에게 전해졌다. 칼리도 일족의 남자들은 거의 만나지 못했다. 대족장이 되면 이곳에서 나가지를 못하니까.
짝이 될 남자가 정해져야 그제야 만날 기회를 얻게 되는데 그것은 결혼이 아니라 대족장의 뒤를 이을 아이를 가지는 것에서 끝나는 만남이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대족장이 이런 사치를 누려도 되나?
일족을 위기에서 구해준 영웅이기도 한 카이를 바라보던 칼리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좋아요.”
대족장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줄 수는 없지만, 지금은 이런 사치를 조금 누려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카이는 그녀의 확답을 듣고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칼리의 손이 살며시 카이의 등을 어루만지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주륵 눈물을 흘렸다. 그건 카이도 칼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카이?”
“아하하. 이거 왜 이러지?”
정말이지 마음을 닫고 살던 자신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칼리와 자신의 아이였다. 그리고 그렇게 열린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건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위로였고, 안도였으며 충만해지는 감정 때문이었다.
칼리의 손이 카이의 눈물을 훔치고 그를 가슴으로 품었다. 카이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마음이 안정되도록 기다렸다.
칼리의 허락을 받은 카이는 위훌루와 마야에게도 이 사실을 직접 전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위훌루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대족장이 결혼이라니? 아니 그보다 누구 마음대로 자네의 아이를 가지게 한 건가?”
위훌루가 난리를 피웠지만, 마야가 나서서 중재했다.
“칼리의 뜻이었어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그게 어떻게 대족장의 뜻대로 될 일이오? 일족의 가장 뛰어난 씨를 품어야 한다는 걸 잊었소?”
“위훌루. 정말 대족장이 마음도 없이 그저 아이를 낳아 대를 잇기만을 원하나요?”
마야의 물음에 위훌루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카이는 그런 위훌루를 쏘아보며 담담히 말했다.
“네 뜻을 묻는 것이 아니야. 우리가 결정했고, 진행할 예정이니까.”
“아무리 일족을 구했다고 해도 이건 받아들일 수 없다!”
카이는 위훌루가 발작하듯 소리치는 것을 보고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왜? 네가 마음에 품기라도 했다는 거냐?”
“그건···.”
위훌루가 쉽게 답하지 못할 때 칼리의 손이 카이의 손을 잡았다. 카이가 돌아보았을 때 칼리는 위훌루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내가 당신의 딸은 아니에요.”
위훌루는 그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그제야 카이는 그를 돌아보았다.
“어, 그러니까 칼리의 아버지?”
“전대 대족장을 품었으니 그 피를 이었지만, 제 아버지라고 할 수는 없죠.”
칼리도 뭔가 쌓인 것이 많았는지 말투가 칼날처럼 벼려져 있었다.
위훌루는 입을 꾹 다물고는 칼리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칼리는 그런 위훌루의 시선을 받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신령이 택한 카이를 안은 것은 저의 뜻이었고, 그와 결혼을 결심한 것 또한 제 뜻이에요.”
위훌루는 카이를 쏘아보다가 씹어뱉듯 말했다.
“신령이 원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까지 카이를 반대하고 싶었던 걸까?
카이는 그런 위훌루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물어보면 될 일이겠군. 신령도 지금 이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겠지. 안 그래?”
위훌루는 카이의 대꾸에 시선을 돌려 마야를 보았다. 마야는 한숨을 내쉬고는 나직하게 주문을 외웠고, 곧 그녀의 눈이 뒤집혔다.
그리고 늑대 신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있는 일이나 경사로군. 나는 이 결혼을 축복하겠다.>
카이에게 ‘뱀’의 사냥을 맡겼던 늑대 신령이었다. 만약 여기서 헛소리를 했다면 카이도 제대로 꼬장을 부릴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카이의 시선이 위훌루에게 다시 향했다.
“왜? 신령의 뜻도 거부할 생각인가?”
위훌루는 어금니를 꾹 깨물더니 뒤돌아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칼리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카이는 자신의 손을 꼭 쥐고 있는 그녀의 손에 들어간 힘을 보고는 이렇게 매몰차게 한 것이 진심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카이도 칼리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위훌루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의 뜻을 꺾고 싶어서 신령에게 묻자고 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마야의 몸에서 늑대의 신령이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카이는 칼리의 어깨를 가볍게 안아주고는 말했다.
“내가 설득해 볼 테니 여기 있어요.”
칼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야의 부축을 받았다. 아무래도 당차게 나서느라 다리의 힘이 풀렸나 보다.
밖으로 나간 카이는 위훌루의 마력을 감지해 냈다. 그의 마력을 따라 걸어가 보니 그는 신령의 숲에서 도시를 이루게 한 거대한 나무의 정상에 올라가 있었다.
카이가 날아올라 그의 뒤에 내려서자 위훌루가 인상을 구긴 채 입을 열었다.
“여기는 왜 왔나?”
“칼리가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했으면 해서.”
위훌루가 험악한 인상으로 카이를 향해 돌아섰다.
“이미 신령이 축복해 주지 않았나?”
“아버지의 축복도 받아야지.”
카이는 위훌루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보다 왜 이리 날 싫어하는 거지? 내가 대륙인이라 그런 건가?”
위훌루는 이를 뿌득 갈며 답했다.
“넌 이미 결혼했었지 않나? 이혼남이 칼리를 넘본다는 것 자체가 불쾌한 일이다.”
카이는 위훌루의 말에 슬쩍 뺨을 긁적였다. 칼리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저리 말하니 자신이 엄청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농락당하고 이혼당했다는 말은 전혀 위로될 것 같지 않았다.
위훌루는 입가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내 축복을 받고 싶거든 날 이겨 봐라.”
8성급 전사인 그의 말에 카이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돌싱 후 대마법사-하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