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내 아이
마야가 위훌루에게 타베시를 데리고 가라고 한 후에 세렌티를 데리고 잠시 자리를 비켰다.
카이가 그들을 구해준 것을 알았고, 카이가 얼마나 강한지도 보았기 때문인지 그들은 순순히 칼리와 둘만 있을 시간을 주었다.
칼리는 카이에게 차를 타주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뱀’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누군가 불러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겁니다.”
칼리는 그 말에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작은 소망이었다. 자신의 배 속에 아이에게 카이가 이 일을 알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됐는 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제 임신 한 달 차.
아이가 카이에게 그 소식을 전해줬다는 것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린다면 가장 먼저 그가 알아야 했다. 마야처럼 눈치챈 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알려줘야 할 일.
칼리는 그의 앞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카이를 품을 때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긴장되는 것은 왜 일까?
어차피 이 아이는 대족장으로 성장할 터였다. 대족장의 피를 이은 이상 그것은 아이에게 정해진 운명.
그러나 카이에게 이 말을 꺼내면 그도 같은 생각을 할까?
일족의 남자였다면 이런 것은 고민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합의하에 이뤄지는 것이었으니까.
칼리는 잠시 카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아이를 가졌어요.”
카이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답했다.
“축하합니다. 그런데 아이라면···.”
말을 하다 보니 점점 느려지는 것은 그 말을 꺼낸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카이의 얼굴표정이 삽시간에 여러 번 바뀌었다.
그는 확인하듯 물었다.
“제 아이입니까?”
카이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살짝 겁이 났다.
이미 한 번 자신의 아이라고 여기고 온 마음을 다해서 아끼고 사랑했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들었으니까. 그러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칼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당신의 아이예요.”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진심으로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양해를 구해야 할 것이 있어요.”
“뭐죠?”
“제 아이는 대족장의 지위를 이어야만 해요.”
카이가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말입니까?”
“예. 남녀 구분 없이 대족장의 지위를 이어야 해요. 제 피를 이었기 때문이죠.”
카이는 잠시 주저했다. 대족장이 대대로 이어진다는 것은 들었지만, 그게 설마 자신의 아이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를 안을 때 임신할 거라는 생각조차 못 했는데 아이가 생기고, 대족장을 물려받아야 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칼리는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사실 빌었어요. 당신에게 이곳이 위험함을 알려달라고.”
칼리가 고개를 들어 카이를 바라보았다.
“그 소원을 들어준 것이 아닐까 싶어요.”
카이는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가끔 내 자식은 천재고, 뭔가 특별하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아직 아이가 생긴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아이가 신령의 숲에서 자신의 영지까지 생각을 전달했다? ‘뱀’이 쳐놓은 결계를 뚫고?
그거야말로 자식 자랑이 선을 넘은 셈이다.
그때 카이는 문득 자신의 미간을 간지럽히는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전처럼 애처롭고 그리운 감각이 아니라 오히려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그걸 느낀 카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카이가 찻잔을 내려놓고 칼리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내밀었다. 칼리는 카이의 행동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미소만 짓고 있었다.
카이는 그녀의 배에 손을 올린 후에 입을 열었다.
“정말 네가 한 거니?”
카이의 물음에 다시 한번 미간을 자극하는 감각이 있었다. 잘못 느낀 것이 아니었다.
뱃속에서 태아 때부터 천재일 수도 있는 건가?
카이는 어이가 없었음에도 곧 미소를 짓고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네가 연락해준 덕에 네 엄마와 너를 구할 수 있었다.”
카이는 칼리의 배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고맙다. 너와 칼리를 구할 수 있게 해줘서.”
카이는 고개를 들어 칼리를 보았다. 가만히 미소를 짓던 카이가 입을 열었다.
“이 아이가 대족장을 물려받아야 한다면 그렇게 하죠. 언제든 보러 올 수 있고, 얼마든지 사랑해 줄 수 있다면 그거로 족합니다.”
칼리는 카이의 대답에 양손을 들어 그의 뺨을 잡고 가만히 입을 맞췄다. 가볍게 입을 맞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떼고는 말했다.
“고마워요. 허락해 줘서.”
카이는 그 말에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한 명만 대족장이 되는 거죠?”
“그럼요. 대족장은 한 명이면 되니까요.”
대수롭지 않게 답하던 칼리의 이마에 입을 맞춘 카이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그럼 아이는 셋만 낳을까요?”
“예?”
카이는 자신이 생각해도 웃겼는지 한참을 웃다가 답했다.
“아니죠. 식을 먼저 올려야죠. 비록 떨어져 지낸다고 해도 그게 순서가 맞는 것 같아요.”
“무슨 소리예요? 아이를 가졌다고 당신과 결혼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카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마음이 앞서서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기도 전에 먼저 지르고 보았다.
엘디아와 결혼할 때도 연애결혼이 아니라 정략결혼이었기에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 해 본 티가 났다.
카이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물었다.
“내가 싫은 건 아니죠?”
칼리는 미소로 화답했다.
“싫어했다면 당신의 아이를 가졌겠어요?”
“그거면 됐습니다.”
카이는 그녀의 배에 손을 얹은 채로 말했다.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해라. 잠깐 다녀올 곳이 있으니까.”
칼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손목을 잡았다.
“지금 어딜 다녀온다고요?”
카이는 고개를 끄덕인 채 답했다.
“아무리 ‘뱀’이라고 해도 지금 당장 이곳을 노릴 수는 없을 거예요. 그리고 다시 그만한 결계를 친다고 해도 이제는 내가 이쪽에 신경을 쓸 테니 결계가 펼쳐지면 바로 알 수 있기도 하고요.”
카이는 칼리의 손을 꼭 쥐고는 말을 이었다.
“바헬이 죽었으니 투신 하나 남은 상황에서 무리해서 공격을 가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럴 전력이 되지 않으니까.”
칼리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어떤 상황인지는 들었으니까.
전사장과 제사장 모두 살아있는 지금 신령족을 노리기는 힘든 상황이다.
“뭔가 보답도 못 했는데 간다고 하니 아쉽네요.”
“내 아들을 구하는데 무슨 보답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리 말한 카이는 칼리를 가볍게 안아주고는 그녀에게 뱀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보석을 건네줬다. 마비독에 걸린 이들이 아직도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분명 뱀의 독일 터.
그들을 해독하는데 쓰라고 보석을 전해주고는 곧장 공간 이동으로 떠났다. 신령의 숲에서 자유로이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그가 신령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라는 것.
대족장은 그냥 아이만을 품었다. 아이만을 임신을 시키던가.
그런 대족장 중에 결혼하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족장의 책무를 다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삶이니까.
그리고 대족장은 대대로 단명했다. 신령의 뜻을 받아들이고 신지를 관리한다는 것은 생명을 태우는 것과 마찬가지라 보통은 다음 대족장을 물려줄 때까지 밖에 살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결혼은 사치였다.
그러나 카이의 말이 싫지 않았다. 언제나 대족장은 한 명의 아이를 가지는 것도 힘들어했는데 정말로 이 아이의 동생들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칼리는 천천히 차를 마시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카이가 갑작스레 사람들을 모으자 응접실에 모인 이들은 카이를 보며 수군거리기 바빴다. 그중 대표로 질문을 던진 것은 덴다르트였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히죽거리고 있는 거냐?”
카이는 그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가리며 답했다.
“신령족에 습격이 있었습니다.”
“뭐? 거기는 8성에 이른 이가 둘이나 있다면서.”
“예. 바헬이 투신 헥토르를 데리고 습격했습니다. ‘뱀’이 직접 외부로의 소통을 막은 채로 벌인 일이었어요.”
덴다르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런 이야기를 웃으며 하는 거였냐? 그래서 어떻게 됐어? 네가 아는 걸 보니 가서 막고 온 거야? 바헬은? 헥토르는?”
카이는 그 말에 더는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그들을 찾아가 바헬과 싸웠고, 그는 스스로 불태워 죽음을 맞이했어요.”
“응? 스스로 불태워 죽었다는 게 무슨 말이야?”
카이는 바헬을 떠올리며 답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어요. ‘뱀’의 농간에서 벗어났죠.”
바헬은 8성에 오른 이후로 백 년이 넘도록 대륙에 패악질을 해왔던 대마법사였다. 그의 패악질을 미뤄 두더라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경지에 이른 마법사였는지는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말에 모두 잠시 말을 잊었다. 카이는 그런 그들의 분위기를 읽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덕분에 ‘뱀’의 계획은 어그러졌어요. 투신을 데리고 도망쳤지만, 투신의 뒤를 따르던 이들은 남아서 모두 처리됐고요.”
퀸이 가만히 말을 듣고 있다가 답했다.
“투신은 강해?”
“8성에 올랐으니 약하지는 않겠지. 얼마나 강할지는 몰라도.”
옆에서 듣고 있던 메르샤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정말 너희 말을 들어 보면 8성이 만만해 보인단 말이지. 괴물들 같으니.”
그녀의 중얼거림에 카이는 픽 웃음을 흘리고는 시선을 돌려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저 아빠 됐어요.”
그 말에 좌중은 침묵했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고 덴다르트가 대마법사 답게 빠르게 이성을 되찾아 입을 열었다.
“뭔 소리야?”
카이는 그 물음에 뺨을 긁적이며 답했다.
“대족장 칼리가 제 아이를 가졌어요.”
덴다르트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무슨 손만 잡아도 아이를 가진다고 하더냐? 제자야. 아이란 원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지 정도는.”
덴다르트가 어색하게 멈춰선 채 물었다.
“뭐야? 그럼 대족장이랑 잤어?”
카이가 살짝 귀를 붉히며 대답을 피하는 사이에 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매일 아빠랑 자는데?”
그 말에 좌중이 모두 고개를 돌렸고, 메르샤가 한숨을 내쉬더니 설명을 시작하려다가 덴다르트에게 끌려갔다.
카이는 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 동생이 생길 거야.”
“동생? 진짜?”
“조금 기다리기는 해야지. 앞으로 한 아홉 달은 기다려야 할 거야.”
카이의 설명을 들은 퀸이 씨익 웃었다.
“나 기다리는 거 잘해. 그리고 동생도 예뻐해 줄 거야.”
카이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퀸이 가장 걱정이었는데 그 고비를 넘긴 것 같았다.
카이의 시선이 일행을 돌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 결혼할 생각입니다.”
“뭐?”
“미쳤어?”
다들 경악하며 내뱉는 이유는 그의 이혼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카이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있습니다.”
카이의 시선이 에르케를 향했다.
“프로포즈를 할 반지를 만들어줘.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카이의 말에 에르케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프로포즈 반지를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거예요. 당연히 제가 만들어줘야죠.”
“최대한 빨리 부탁해.”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게요.”
“고마워.”
덴다르트가 뺨을 긁적이다가 물었다.
“그런데 지인들만 불러서 결혼식을 올릴 거냐?”
솔직히 지금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카이였다. 그런 카이의 결혼식이라면 세기의 결혼식이라고 불리며 대륙 모두가 축하해 주리라.
카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인들만 불러야죠.”
카이가 아는 지인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 중 시간이 되는 이들만 불러서 조촐하게 치를 생각이었다.
투신 헥토르가 인상을 굳힌 채 자신의 앞에 나타난 반 영체인 우로보로스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내 싸움을 막은 거냐?”
<네가 죽기에는 너무 작은 자리였지.>
죽더라도 싸우다 죽는다. 그것이 전쟁의 신을 모시는 자들이 가장 바라는 것. 그러나 그렇게 싸우던 그를 데리고 빠져나왔다.
<바헬이 죽었다.>
헥토르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안 죽는다며?”
<···스스로 죽음을 택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헥토르는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생각에 잠겼다. 대수림 안에 있는 신령족. 그곳의 전사장은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할 정도의 강자였다.
그 싸움을 떠올리던 헥토르가 말했다.
“널 따르면 또 그만한 자들과 싸울 수 있나?”
우로보로스가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네가 원하는 전장에서 죽을 수 있을 거다.>
“그럼 됐어. 일단 오늘 얻은 것들을 되돌아봐야 하니 다음 일은 한 달 후에나 보자고.”
우로보로스도 바헬이 죽을 때 그의 힘을 취했다. 덕분에 공간 이동으로 몸을 빼낼 수 있었던 것.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그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한 달 후에 보지.>
돌싱 후 대마법사-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