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위험
영주성 확장 공사를 명하고 카이는 제국의 황궁으로 향했다. 굳이 퀸을 데리고 갈 필요는 없었다.
용맥조차 마음대로 끌어올 수 있는 카이는 지금 홀로 두 명의 8성을 상대로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카이는 홀로 황궁으로 가서 물건을 건네받기로 했다.
퀸이 깨달음을 얻어 성장할수록 받아들일 수 있는 헬리움이 늘어나는 것 같으니 받기로 한 물건을 미루지 않고 찾으러 갔다.
카이는 앞에 늘어선 마차들을 보며 새삼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황궁에서 준비한 물건들을 바라보던 카이에게 다가온 클란드라가 내민 것은 보석함이었다. 카이가 받아서 열어보니 안에는 작은 구슬이 들어 있었다.
카이가 고른 구슬로 스스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황궁 보고에 있던 빙옥이에요.”
알고 있다. 카이도 이것을 보고 고른 것이었으니까.
마력을 빙계 속성으로 전환해서 저장이 가능한 물건으로 이걸 잘만 이용하면 연달아 두 번 이상 비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카이는 그 정도에서 만족할 생각이 아니었다.
이걸 이용해서 아티펙트를 만들면 빙계 속성의 8성 아티펙트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공간에 간섭하는 8성 대마법사에게는 통하지 않겠지만, 상대가 8성 대마법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올 시간만 벌 수 있으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8성 아티펙트를 활성화하는 것도 태초의 순수 마력을 손에 넣은 지금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이미 설계 방식도 모두 떠올렸다.
“그럼 준비가 끝난 것 같으니 그만 가보겠습니다.”
클란드라는 그 말에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금 모인 마차만 백 대가 되는데 이걸 모두 옮기겠다는 말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대신해서 옆에 있던 테오르가 물었다.
“이걸 무슨 수로 가져간다는 건가?”
카이는 대답 대신 태초의 순수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는 마차를 대상 지정한 후에 하나씩 날려 보냈다. 그 모습에 테오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자네가 함께 가지 않고도 보낼 수 있는 건가?”
카이는 그 대답을 듣고 테오르가 아직 그 영역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일단 자신이 포함되지 않으면 마력의 소모량이 상당했다. 그래서 일행을 데리고 이동할 때는 마정석의 도움을 받기도 했던 것.
그러나 카이에게 더는 마력 소모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한 동력을 손에 넣은 카이는 차례대로 마차들을 날려보냈다. 삽시간에 정리된 공터를 보고 클란드라는 솔직히 허망하기까지 했다.
1조 프랑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1조 프랑에 달하는 금화와 현물을 카이에게 넘겨주기로 한 것은 맞지만, 이걸 주고받으면서 뭔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고 했는데 그럴 틈이 없었다.
그렇게 마차를 모두 날려 보낸 카이가 테오르와 클란드라를 돌아본 채 말했다.
“대륙 서부에서는 각 왕국이 모두 경계를 한 채로 ‘뱀’을 추적하고 있지만, 동부는 제국이 맡아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림자를 이용해서 추적하고 있어요. 다만 아직 뚜렷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네요.”
“그럼 대륙 동부는 부탁하죠.”
대륙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정보력을 지닌 제국의 힘을 이렇게 말 한마디로 빌릴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클란드라는 카이의 말에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맡겨주세요.”
카이가 공간 이동으로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는 클란드라에게 테오르가 웃으며 말했다.
“연인은 못 되어도 친구는 될 수 있을 것 같군.”
친구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공국을 받아내기 어렵지 않으리라.
얻어온 트리달리움의 양이 지금까지와는 그 수준이 달랐기에 카이는 우선 헬리움을 만들었다. 예전처럼 하나씩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 이제 8성급 지옥의 불꽃을 사용하는데 마력이 부족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 건넨 헬리움을 퀸은 무려 서른 개나 흡수했다. 성장이 끝났는지 외형적으로 뭔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그녀가 뿜어내는 기세가 전보다 훨씬 무거워졌다.
카이는 그녀를 위해 헬리움을 만들다가 떠오른 생각에 태초의 불꽃을 꺼내 들었다.
지옥의 불꽃은 8성 마법. 하지만 태초의 불꽃을 이용하면 그보다 훨씬 고화력을 낼 수 있다. 그렇기에 카이는 트리달리움을 쌓아놓고 태초의 불꽃을 이용했다.
바헬은 고작 불꽃을 넓게 퍼트리고 자신의 의지로 조종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카이는 훨씬 고열로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트리달리움은 열을 높이자 헬리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녹아 버렸다.
그 연구를 옆에서 지켜보던 덴다르트가 물었다.
“헬리움에 열을 가해보면 어때?”
“잠시만요.”
트리달리움은 태초의 불꽃에 녹아버렸지만, 헬리움이라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먼저 헬리움을 만들고 태초의 불꽃으로 열기를 가했다.
덴다르트의 생각이 옳았는지 헬리움은 태초의 불꽃에도 녹지 않았다. 다만 점점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작아진 헬리움이 끝내는 손톱 크기의 완벽한 구로 된 보석이 되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보석을 보며 카이는 그걸 띄우려고 하다가 실패했다.
헬리움만 해도 마력이 닿는 것을 거부하는데 이건 더 심했다. 태초의 마력을 손에 넣은 카이조차 이 보석은 도저히 마력으로는 만질 수 없었다.
결국, 손으로 집어 든 보석은 쥐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요동친다. 다행이라면 카이가 마력뿐만 아니라 독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인지 마력을 밀어내려고 하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카이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마력은 쭉쭉 밀려났다.
용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마저 밀려날 정도로 강력한 마력을 밀어내는 것을 보고 카이는 그 보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카이조차 온전히 다루지 못하는 보석을 보고 덴다르트가 물었다.
“대체 그건 뭐냐?”
마법사에게 있어 마력은 평생을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런 마력이 사방으로 밀려나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덴다르트는 대마법사에 오른 이인데 그조차 마력을 다루지 못하게 할 정도로 강력하게 마력을 방해할 수 있는 보석이었다. 이건 8성 대마법사라고 해도 다를 게 없었다.
독존한 카이만 만질 수 있는 보석. 모든 마법사에게 있어 독이나 마찬가지인 물건.
손톱만 한 물건을 바라보던 카이는 다시 헬리움을 만들어 태초의 불꽃으로 녹여 보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헬리움은 점점 작아지다가 녹아서 사라졌다.
다시 시도해 보았지만, 더는 헬리움이 보석이 되는 일은 없었다.
“뭐가 잘못 된 거냐?”
“모르겠네요.”
덴다르트의 물음에도 시원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모든 변수를 통제하고 있었는데 하나만 만들어진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카이는 고민을 멈추고 일단 퀸을 찾아갔다. 퀸에게 보여주자 그녀는 그 구슬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헬리움이랑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네. 이거 뭐야?”
“이번에 새로 만든 거. 뭔지는 아직 모르겠어.”
“이름은 지었어?”
“아니.”
퀸이 보석을 만지작거리다가 답했다.
“비기니움. 어때?”
“태초의 불꽃으로 녹였으니 비기니움이야?”
“응.”
카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이건 흡수 안 돼?”
“응. 흡수 안 돼.”
헬리움과 다른 건가? 퀸도 흡수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카이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예상치 못한 발견들은 모두 그에게 도움이 되었었다.
퀸도 헬리움도 그랬는데 이번에는 대체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됐다.
마야가 타준 차를 마시며 칼리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마야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느껴지십니까?”
칼리는 그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야는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말이 많을 거예요.”
대족장은 신지를 지키는 이들. 그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짝은 언제나 일족 중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난 이들을 골랐다.
여자 대족장이라면 전사들 중에서 구했고, 남자 대족장이라면 여자 주술사 중에서 짝을 찾아 대를 이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륙인의 아이를 품었다.
지금은 아직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지만, 이게 알려지면 말이 많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칼리는 신령이 선택한 그를 본 순간 깨달았다.
저 남자의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마음이 통했는지 두 번을 잤고, 그의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그걸 아는 것은 제사장 마야뿐이었다.
전사장 위훌루가 알게 되면 모든 전사가 알게 될 터. 곧 숨길 수 없는 때가 오겠지만, 그 전까지는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칼리의 시선이 저 멀리를 향했다. 마야의 시선이 돌아간 것도 같은 순간이었다.
둘의 시선이 저 멀리를 향했을 때 타베시와 세렌티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죠?”
세렌티가 빠르게 보고했다.
“전사들의 식사에 누가 독을 탔습니다. 지독한 마비독이라 경비가 허술해졌어요.”
“전사장은 어디 있지?”
마야의 물음에 타베시가 빠르게 답했다.
“전사들이 쓰러지고 나서 갑자기 난입한 자를 상대하는 중입니다. 전사장은 식사를 따로 해서 마비 독에 당하지 않았는데도 적을 막는 것이 전부입니다.”
“전사장과 대등하게 싸우는 자가 있다고?”
“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자입니다.”
타베시의 대답을 들은 칼리는 입술을 깨물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뱀’이 움직인 것 같네요.”
마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붉은 문신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나무뿌리가 움직이며 철옹성처럼 변했다.
“그를 불러야 합니다.”
칼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이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외부로 연락이 가지 않았다. 칼리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떻게 한 건지 몰라도 외부로 연락을 취할 수 없어요.”
마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뱀’의 꼬임에 넘어갔나 보군요.”
사실 뱀도 그들이 모시던 신령 중 하나다. 그를 따르던 이들도 많았는데 이번에 뱀이 벌인 일 때문에 대부분 돌아섰다. 그러나 아직도 그를 따르는 자들이 내부에 남아있었다는 뜻.
그들이 ‘뱀’의 뜻을 따라 움직였다는 것.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꽈아앙!
그때 외벽을 부수는 강렬한 충격과 함께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 안으로 불쑥 고개를 내민 것은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지닌 바헬이었다.
바헬은 안쪽의 인원을 확인하고는 씨익 웃었다.
“오랜만들이군.”
바헬의 말에 대한 대답은 타베시가 던진 도끼였다.
턱.
무서운 속도로 날아간 타베시의 도끼를 손으로 쥔 바헬이 씨익 웃었다.
“이건 이것대로 괜찮군.”
바헬은 자신이 죽기 전에 일으켰던 불꽃을 다시는 일으킬 수 없게 됐지만, 육체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다. 게다가 시간을 늘릴 수 있는 그에게 그만한 육체 능력은 날아오는 도끼를 손으로 잡아챌 수 있게 해주었다.
오직 마법에만 의존했던 때와 다르게 지금의 그는 마법은 물론이고 육체도 강화되었다. 그리고 육체도 전성기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넘치는 활력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선 바헬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래도 걸렸군.”
‘뱀’이 내거는 조건을 들어주면서 몇 번이나 신령족을 흔들었던 바헬이었지만, 이곳까지 들어올 수는 없었다. ‘뱀’을 모시는 이들이 점점 줄어가다 보니 섣불리 일을 벌이기 힘들었던 것.
하지만 자신이 온전히 ‘뱀’의 편에 섰고, 투신을 데리고 온 지금은 가능했다.
바헬이 미소를 지을 때 마야가 그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이미 넌 ‘뱀’의 하수인이구나.”
“걱정하지 마라. 너도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바헬이 손을 앞으로 내밀자 그의 손에서 불꽃이 나타났는데 그 불꽃은 전과 다르게 검은 불꽃이었다. 그걸 보고 마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건 ‘뱀’이 부리는 어둠의 힘을 품은 불꽃이었다.
마야는 이번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고는 칼리의 앞을 막아선 채 말했다.
“신지로 피하세요.”
신지로 가는 길은 대족장이 아니면 누구도 넘어가지 못한다. 그러니 가장 안전한 곳은 그곳이라 믿었다.
칼리는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저들이 이곳을 노렸다는 것은 보옥을 노리는 거예요. 신지의 문은 열 수 없어요.”
마야의 앞으로 세렌티와 타베시가 서는 것을 보고 칼리는 자신의 배에 손을 올린 채 기도했다. 제발 그가 이 위험을 눈치채고 와주기를.
돌싱 후 대마법사-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