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결심
“재혼할 마음은 없습니다.”
워낙에 단호해서였을까? 클레바논 황제가 움찔할 정도로 단호한 말투에 함께 위력 시범을 구경하던 클란드라가 입을 열었다.
“너무 서두르셨어요.”
“흠흠. 마음이 급했군. 미안하네.”
클레바논의 시선이 가득찬 호수를 바라보았다.
“이런 장관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너무 감탄한 나머지 실례했군.”
제국의 황제가 먼저 사과를 하는 일은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런 그가 사과하는 모습에 카이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럼 잔금은 어떻게 할까요?”
“준비되는 대로 보내주겠네. 혹시 현물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청구하게.”
카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바논 황제는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엉뚱한 소리까지 했다.
“그 모든 거래는 클란드라 황녀가 맡을 걸세. 황태자는 바쁘고, 내가 믿을 아이는 이 아이밖에 없으니까.”
카이도 클레바논 황제가 황태자를 제외하고는 가장 믿는 이가 클란드라 황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계속 들이미는 것이겠지.
“그러죠. 뭐 제 돈 떼먹지는 않을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카이가 퀸과 함께 움직일 수 있고, 그 둘의 전력이 제국의 최고 전력에 맞먹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엉뚱한 생각은 먹지 않으리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오히려 돈으로 친분을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을 클레바논 황제도 아는 것이겠지.
카이는 위력 시범이 끝난 것을 확인하고는 일행을 데리고 그대로 사라졌다.
클레바논 황제는 카이가 온전히 사라진 것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게 고작 하루 만에 만들어지는 것이오?”
테오르는 그 물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에 9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고금에 통틀어 가장 근접한 인간이니 건들면 안 되오.”
“그 정도요?”
클레바논 황제는 테오르가 얼마나 자존심이 높은 이인지 안다. 그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칭찬을 들을 일은 없었다.
검성이 그를 가르쳤지만, 검성은 검을 수련한 이. 마법사와는 다르다. 그런데 같은 마법사를 칭찬하는 일은 없다.
클레바논 황제는 그 말에 더욱 탐이 났다. 그러나 카이의 태도를 보니 정말로 재혼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남녀의 마음이란 것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클란드라에게 이 일을 맡긴 것.
클레바논 황제가 클란드라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돈을 아끼려고 하지 말고 감정 상하는 일 없게 해라.”
“예.”
클레바논 황제의 마음이 빤히 보였지만, 클란드라는 거절하지 않았다. 1조 프랑을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큰 힘을 손에 얻는다는 얘기였으니까.
바헬은 걸음을 옮기면서 투덜거렸다.
“너 여기가 어딘지 알고 가라는 거지?”
<물론이다. 너만큼이나 공을 들였던 이였으니까.>
“하. 나도 이 미친놈은 피해 다녔는데.”
바헬의 어깨에 올라 있는 작은 뱀. 우로보로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우로보로스의 비늘로 만든 인형이기에 그 안에 영이 깃들 수 있었다.
<네가 그런 말 하니 우습군.>
“이놈이야말로 미친놈이지. 싸움에 미친 놈.”
바헬은 그리 말하면서 눈앞에 서 있는 무너진 신전을 보았다. 하늘 신 시엘이 자리를 잡기 전에 대륙 동부에서 믿던 전쟁의 신의 신전이었다.
일종의 토속 신앙 같은 것이었지만, 망국이 되기 전까지는 실제로 제법 교세를 떨치던 곳이었다. 대륙 동부에서.
그랬던 곳이 지금은 모두에게 잊혔다. 교리와 검을 들고 설치던 하늘 신 시엘 교단의 힘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다른 신들을 모두 이단으로 몰아서 정리했던 덕분에 이제는 누구도 찾지 않는 폐신전.
그곳에 들어선 바헬은 전쟁의 신 신상 아래에 앉아있는 거구의 사내를 볼 수 있었다. 2미터에 달하는 키. 바위보다 단단해 보이는 사내는 그곳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곳에 들어선 바헬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바헬의 물음에 사내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쳤다. 그 시선에 바헬은 오싹함을 느꼈다. 이거 마주하는 것만으로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다.
사내는 바헬을 보고는 자신의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시 볼 줄은 몰랐는데?”
“너도 살아보니 알겠지. 인생사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거.”
사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마음대로 되던데?”
바헬은 그 말에 뺨을 긁적였다. 하긴 저 인간이라면 그런 말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여길 찾아온 것은 내 뜻은 아니었어.”
사내가 그제야 호기심을 보였다.
“그래? 난 또 빚 갚으러 온 줄 알았지.”
사내가 상의를 북 찢어버리자 그의 왼쪽 어깨에 눌어붙은 화상 자국이 보였다.
그걸 본 바헬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 상처를 남길 때 죽여버렸어야 했다. 그런데 저 상처를 입으면서 저 미친놈이 8성에 오를 줄 알았던가?
물론 막 8성에 오른 놈을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당시 대결을 벌이던 절벽에서 시간을 뚫고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잡지 못했다.
그 뒤로는 바헬도 피해 다니고 있었다. 7성에서 8성의 벽을 마주했던 놈도 마주치면 안 될 정도로 본능이 뛰어난 놈이었다.
그런 놈이 8성이 되었으니 마주치고 싶지 않아 알아서 피해 다녔다. 그랬던 놈을 제 발로 다시 만나러 올 줄은 몰랐다.
투신 헥토르.
대륙 최강자 중 하나였다.
헥토르는 바헬을 바라보다가 그의 어깨에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그놈은 왜 데리고 온 거야?”
바헬은 그 말에 어깨에 올린 우로보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협력하기로 했거든.”
“왜? 영생이란 말에 혹해서? 그 정도 나이 처먹으니까 슬슬 죽음이 다가오나?”
전쟁의 신을 모시는 투사인 투신 헥토르는 자신을 찾아온 우로보로스의 말을 듣지도 않고 꺼지라고 했다.
영생이니, 새로운 힘을 주겠다느니 했지만 다 관심 없었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믿는 신의 가르침대로 투쟁만이 있을 뿐이라고 여겼으니까.
“빚을 졌으니까.”
헥토르의 시선이 바헬에게로 향했다. 그의 얼굴을 가르는 흉터. 그 흉터에 깃든 힘을 읽은 헥토르가 물었다.
“죽었었냐?”
바헬이 그 말에 쓴웃음으로 답할 때 헥토르가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누구한테?”
“8성에 새로이 오른 마법사가 있다. 그리고 그놈의 곁에는 뛰어난 검사가 있다. 그래서 온 거다.”
“8성?”
8성에 오른 투신 헥토르는 더는 싸울 상대를 찾지 못했다. 7성 몇 명을 만나보았지만, 막상 만나고 보니 너무 시시해진 탓이었다.
자신의 삶을 불태울 투쟁 만이 자신의 성장 동력이자 신의 교리를 따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런 그에게 8성은 목표였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 바헬은 그의 추적을 피했고, 나머지 둘은 제국의 황궁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으니까.
헥토르는 그들을 찾아갈 수 없었다. 괜히 그들을 찾아가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요즘에는 홀로 명상을 통해 수련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놈은 어디에 있는데?”
“엘도 왕국. 지금은 가장 귀찮게 하는 놈이지.”
헥토르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 그러니 좀 도와라.”
헥토르가 목을 좌우로 꺾으며 답했다.
“뭘 도와 달라는 거냐?”
“네 힘. 네 밑에 있는 아이들. 대신에 투쟁할 기회를 주지.”
영생도, 새로운 힘도 다 필요 없었다. 하지만 투쟁은 다르다. 그것도 8성에 올라 더는 투쟁할 상대를 잃어버린 그에게는 그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좋아.”
헥토르가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와주지. 대신 놈은 내 거다.”
황제의 부탁으로 만든 8성급 아티펙트였지만, 덕분에 8성급 비전 마법을 보았다. 덕분에 태초의 물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
지금 소환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넷이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태초의 속성에 대한 깨달음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모두 영지에 내려주고 카이는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수기가 많은 곳으로 떠났다.
퀸이 있는 이상 영지가 위험할 일은 없기에 카이도 마음 놓고 공간 이동을 할 수 있었다.
신성 교국의 벨트리안 호수 옆 별장에 도착한 카이는 짐을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태초의 속성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번에도 바로 깨달을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래서 며칠 지낼 것들을 준비한 카이는 벨트리안 호수를 바라보았다.
넓은 벨트리안 호수를 바라보던 카이는 손을 뻗었다. 그러자 물이 단단하게 굳는다.
얼지도 않은 채 단단하게 굳은 수면을 카이는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한걸음에 수십 미터를 쭉쭉 나가면서 카이는 벨트리안 호수 위를 거닐었다.
그렇게 걸으며 카이는 물에 대해서 생각했다.
수속성 마법은 그 흐름을 만들고, 압력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그 위력을 강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물을 끌어올 수 있는지도 필요했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 수면 위를 걷던 카이는 몰랐지만, 그의 발걸음을 따라 거대한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거대한 소용돌이가 호수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지만, 카이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카이가 그걸 의식한 것은 뒤에서 들리는 무시무시한 소리 때문이었다.
그가 직접 태초의 물을 소환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다른 태초의 속성들을 다루는 카이의 의념은 물에 닿는 것만으로 거대한 와류를 만들 정도였다.
카이는 무심한 시선으로 그걸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거대한 와류의 흐름은 강렬한 영감을 줬고, 그 영감을 따라간 카이는 무아지경으로 그 중심에 다다랐다.
이 호수가 끝이 아니다. 호수로 모여든 강줄기, 그곳에서 흐르는 물이 향하는 곳까지 모두를 관조하던 카이는 그곳에서 자신의 정신을 온전히 유지했다.
불, 바람, 얼음, 순수 마력에 이어 다섯 번째 태초의 속성.
카이는 그 힘을 손에 쥐었다.
카이의 손 위에 물방울이 하나 나타나자 그의 눈빛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카이는 자신의 손 위에 띄운 물방울을 응시했다.
물이 있는 곳 어디서든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태초의 물을 손에 넣은 카이는 호수 전체를 휘감은 와류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거대한 와류에 마치 거인의 손이 훑듯이 다섯 갈래의 흐름이 나타나 모이면서 호수의 와류를 흩어냈다.
크게 출렁이는 호수의 표면을 바라보던 카이가 양 손바닥을 겹치자 출렁이던 수면이 단번에 납작해지더니 잠잠해졌다.
그만한 힘의 여파를 단순히 손짓 한 번, 의념 한 번으로 이뤄내는 것을 보고 카이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태초의 속성을 다루면서 깨달은 것인데 이것들을 다룰 때는 물리 법칙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리 법칙보다 더 우선하는 힘.
그 가치를 깨달은 카이는 슬쩍 제국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테오르는 모르고 있을 터였다. 그가 보여준 비전 마법은 그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카이의 손에 쥐여줬다.
고작 호수에서 이 정도다. 조금 전의 와류에 힘을 조금만 보탰어도 호수 인근은 모조리 쓸려나갔다.
만약 바다에서 이 힘을 다뤘다면 어땠을까?
파도를 불러내 왕국도 쓸어버릴 수 있다. 마법으로 8성에 오를 때만 해도 도시 하나를 파괴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싶었는데 이 힘은 왕국도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힘이었다.
더욱이 마력조차 필요 없으니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나의 속성을 더 얻을 때마다 마법을 활용할 방법은 넘치도록 늘어난다. 하나의 속성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조합을 통해 수많은 방법이 파생했으니까.
카이는 그 힘을 온전히 손에 쥔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큰 힘을 손에 쥐니 문득 생각이 든다.
운명은 자신을 어디로 데리고 가려고 이만한 힘을 손에 쥐여 주는가?
인간의 한계라는 8성은 태초의 속성을 얻으면서 이미 초월했다. 그리고 엮이기 시작한 것이 신령, 악령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들만 엮이는 걸까?
카이는 자신이 들은 모든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았다.
흑마법사들에게 들었던 악마 피스토. 그 또한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이다.
그런 운명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운명조차 거스를 수 있는 힘.
태초의 속성에 휩쓸려 자아를 잃지 말라던 경고를 잊지 않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이 힘을 온전히 발현하기 위해 그릇을 키우는 일이다.
그리고 그건 태초의 속성과 하나가 되었을 때 조금씩 얻었던 것.
카이는 양팔을 벌린 채 뒤로 누웠다. 잔잔해진 호수 위에 대자로 누워서 뜬 카이는 눈을 감고 태초의 물에 ‘감응’을 시작했다.
돌싱 후 대마법사-독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