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위로
카이가 도착한 곳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집을 볼 수 있었다.
집 앞에 펼쳐진 정원은 들꽃이 잡초와 함께 자라있어 관리가 되는 것 같지 않았다. 카이는 그런 정원 옆 느티나무에 매달린 그네를 타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 소녀의 곁에 서 있는 문그록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갑작스레 나타난 카이를 보고는 반사적으로 소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런 문그록을 보며 카이는 앞으로 나서지 않고, 주위에 결계를 쳤다. 문그록은 물론이고 누구라도 쉬이 도망칠 수 없는 결계를.
문그록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보내다오.”
그네에서 내린 아이는 문그록의 뒤에 서서 긴장한 채 있었다. 카이는 잠시 그런 둘을 바라보다가 대답하지 않고 덴다르트를 돌아보았다.
덴다르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 아이가 누군 지부터 말해야지.”
문그록은 잠시 덴다르트를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답했다.
“내 딸일세.”
“네 딸? 네 딸은 소중하고, 내 여동생은 소중하지 않았다는 거냐?”
“어떻게 알았나?”
덴다르트가 목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그 아이의 영혼에게 직접 들었다. 네가 그녀의 가슴을 찌르고, 절벽 아래로 차버렸다는 얘기를.”
덴다르트를 중심으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퀸이 카이를 돌아보았다.
돕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카이는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덴다르트가 직접 나서겠다고 한 일. 우선은 그에게 맡길 일이었다.
7성에 오른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는 태생이 워 메이지였다. 카이에게 전투란 어떤 것인지 가르친 이가 덴다르트니 그가 당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문그록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런 덴다르트의 앞에서 검을 뽑았다.
“물러나 있어. 소렌.”
“아빠.”
문그록은 소매를 붙드는 그녀를 가볍게 뿌리치고는 덴다르트를 바라보았다. 8성 대마법사가 함께 하니 자신이 이곳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리고 딸의 목숨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검을 들고 그들 앞에 선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검사다. 그 재능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7성에 오를 정도로 뛰어났었다.
그런 문그록이 대륙 서부의 암흑가를 통일하고, 이번에 담배에 수작을 부린 것은 모두 천성적으로 약했던 딸 때문이었다.
3년 전에야 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무척이나 사랑했던 여인이 그를 떠났고, 아이를 가진 것도 죽을 때까지 비밀로 했었다.
그런 그녀가 죽으면서 딸의 존재를 알게 됐다. 선천적으로 약한 딸을 만났을 때 어떻게든 그녀를 살리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나타난 것이 ‘뱀’이었다.
대륙 서부의 암흑가를 통일하라고 지시했고, 아프록시아 잎을 관리하게 되면서 막대한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손에 넣은 돈으로 딸을 치료하려 했지만, 선천적인 문제라 치료할 수 없다고 들었다.
그리고 ‘뱀’은 그런 딸을 일으켜 줬다. ‘뱀’이 주는 물을 마시면 몸을 움직일 수 있던 딸에게 이번 일만 해내면 완전히 치료해주겠다는 말에 담배가 문제를 일으킬 것을 알면서도 행했다.
다만 그 와중에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아니타가 나서면서 일이 꼬였다.
그녀를 따돌리려 했지만, 비밀에 접근한 그녀를 어쩔 수 없이 죽였다.
그 죄책감을 품에 안고 딸과 은거할 생각이었는데 덴다르트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냥 죽어줄 마음은 없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딸 소렌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한 일이 모두 의미가 없어진다.
문그록이 앞으로 나서자 덴다르트가 곧장 마주쳐 달려갔다. 덴다르트의 발밑으로 얼음 길이 열리며 그 위를 따라 움직이니 문그록의 공격도 피해냈다.
그렇게 문그록의 공격을 피해내면서 덴다르트는 냉기로 만든 방패를 펼쳤다.
쩌저정!
문그록의 검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검기가 맺히고 냉기로 만든 방패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런데 점점 더 거리가 벌어진다. 문그록은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마력을 몸에 두르고 있어 냉기에 저항하면서 덴다르트를 따라잡는 데 어째서인지 점점 느려진다. 조금씩 몸에 서리가 내려앉는 것을 보고 문그록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예상보다 상대가 더 강하다는 것을 느낀 문그록도 자신의 전력을 끄집어냈다. 덴다르트를 넘지 못하면 그 뒤는 없다.
지금 이곳에 온 이들이 자신과 소렌의 목숨을 노린다면 어떻게든 하나라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그록의 마력이 쿵쿵 거리며 가속한다. 그리고 문그록의 전신에서 타오르듯 마력이 일어나며 몸에 끼고 있던 서리가 흩어졌다.
그리고 단숨에 덴다르트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대로 덴다르트를 벤다.
그렇게 여겼을 때 덴다르트는 어느새 지팡이를 하나 들고 있었다. 저게 뭔가 싶었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전격이 날아들었다.
문그록의 검이 그 전격의 그물을 잘라냈다.
쩌저저정!
전격의 그물을 잘라내며 문그록의 검기가 상했을 때 그의 발밑에서 휘몰아친 냉기에 두 다리가 얼어붙었다. 피가, 마력이 굳는다.
7성급 전격 마법을 베어내면서 이건 기회라 여겼는데 어떻게 또 다른 7성급 마법을 쓸 수 있는 걸까?
연달아 7성급 비전 마법을 사용할 줄 몰랐다. 그것도 전혀 다른 속성으로.
덕분에 문그록이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다리가 얼었다.
그런 문그록을 향해서 덴다르트가 손을 뻗었다.
콰드득.
다리는 물론이고 위로 뻗어 올라온 냉기가 목 아래까지 모두 얼려버렸다. 그제야 그에게 다가온 덴다르트가 문그록의 눈앞에 섰다.
문그록은 이를 악물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덴다르트는 그런 문그록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지금 고민 중이다.”
“뭘 말이냐?”
“네 딸 앞에서 널 죽일지. 아니면 네 앞에서 네 딸을 죽일지.”
문그록의 눈이 사납게 떠졌다. 그런 그를 보면서도 덴다르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결정할 기회를 주마.”
문그록은 덴다르트의 말에 이를 뿌득 갈았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런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소렌을 먼저 죽여다오.”
덴다르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판단이다.”
콰드드득.
문그록의 목을 타고 냉기가 빠르게 올라갔다.
“안···!”
마지막 말은 들리지 않았다. 문그록의 머리가 얼음 속에 갇혔으니까.
그렇게 문그록을 죽여버린 덴다르트가 얼어붙은 그의 턱을 움켜쥔 채 말했다.
“결정하라고 했지 들어준다고는 안 했다.”
덴다르트가 돌아서서 소렌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덴다르트가 손짓하자 그녀의 발목까지 얼어붙었다. 사색이 된 그녀의 앞에서 덴다르트가 입을 열었다.
“너를 살리기 위해서 네 아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다면 네 죽음이 억울하지는 않을 거다.”
“사, 살려주세요!”
두려움에 질린 소렌을 내려다보며 덴다르트는 무심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그 눈을 바라보던 소렌은 새하얗게 질렸고, 곧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덴다르트는 그런 소렌의 얼음 결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카이. 볼일은 끝났다.”
카이는 덴다르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카이는 걸음을 옮겨 문그록의 앞에 섰다. 아니타를 죽인 자. 자신의 딸을 위해서 수많은 이를 죽음에 몰아넣은 자.
그런 자를 그냥 죽일 마음은 없었다. 카이가 손을 내밀자 문그록의 영혼이 느껴진다. 카이는 가차 없이 그 영혼을 조각했다.
7성에 오른 강대한 영혼. 그 영혼은 카이의 구속에 저항했지만, 카이는 그걸 찍어 누를 수 있을 정도로 영혼의 격이 높았다.
최상급 영혼석을 만들 때는 이미 모든 감정을 깎아내고 조각하는 것이었기에 영혼의 격을 따질 필요가 없었지만, 문그록의 영혼은 지금 이 순간 극한의 분노와 절망에 가득 차 있었다.
7성에 달한 강대한 영혼이 극한의 감정에 몰입했으니 그 영혼을 빚어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이는 그 영혼을 조각해 영혼석을 만들었다. 최상급 영혼석도 도달하지 못할 수준의 영혼석.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영혼석을 손에 넣은 카이는 문그록의 시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나중에 에빌 마탑으로 보내죠.”
“그러든지. 아니타에게 보여준 이후에는 관심 없으니까.”
카이가 문그록의 시신을 챙길 때 페코는 소렌의 시신 앞에 섰다.
<이 아이 치료해준 게 아니군.>
“무슨 소리야?”
<영악한 ‘뱀’이 속였다는 얘기다. 이 아이는 사실 꼭두각시였다는 얘기지. 치료해 준 게 아니라 조종했다는 얘기니까.>
“그걸 몰랐다고?”
<원래 인간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싶어 하더군.>
카이는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소렌을 돌아보다가 기이함을 느꼈다. 이 아이의 몸에 남아있는 흔적. 그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이거 설마 태초의 어둠을 사용한 건가?”
<그걸 알아볼 수 있는 건가?>
카이는 처음 느끼는 감각에 인상을 굳혔다. 카이의 마력이 소렌의 내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짙은 어둠을 직시했다.
그 흔적만 남은 것 같았지만, 카이도 아직 만나보지 못했던 어둠이었다.
그 짙은 어둠을 바라보던 카이는 그것이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저런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거지?”
카이는 다속성을 다룰 수 있지만, 그 깊이에 있어서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부족하다.
자신은 태초의 바람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거리를 두려 하는데 늑대의 신령은 태초의 바람을 친구라고 칭하며 다루는 수준이 달라 보였다.
그러니 깊이라면 자신이 그들을 따를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들에게 없는 것을 가져야 ‘뱀’과 싸울 수 있으리라.
“돌아가죠.”
티투스와 훈련 중이던 아니타는 연병장 한쪽에 나타난 무리를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덴다르트가 서 있었다.
“오빠?”
잠시 검을 내리고 숨을 고르는 그녀에게 덴다르트가 다가갔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덴다르트가 가방을 열며 말했다.
“일단 이걸 보고 얘기하자꾸나.”
덴다르트의 가방에서 꺼낸 것은 문그록의 얼어붙은 동상이었다. 아니타는 순간 그걸 보고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죽였던 그 순간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마치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았던 그 눈빛.
고아원에서 만나 함께 했던 그는 언제나 자상했고, 따뜻한 남자였다. 그가 암흑가를 손에 넣겠다고 했을 때도 그를 믿고 따랐다.
그런 그가 담배에 수작을 부린 것을 알아챈 자신의 가슴에 검을 꽂을 때의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얼음 동상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한 거야?”
아니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덴다르트는 담담히 답했다.
“내가 직접 얼려서 가지고 왔다.”
아니타가 고개를 돌려 덴다르트를 보았다. 그가 7성에 올랐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만큼이나 강할 줄은 몰랐다.
아니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문그록의 동상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영혼도 느껴지지 않는 동상. 모르고 보았다면 그를 얼음으로 조각한 동상이라고만 여겼을지도 몰랐다.
“원한다면 깨버려라.”
아니타는 그 말을 듣고는 덴다르트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도 마법사다. 7성 육체 강화자의 시신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그걸 깨버리라고 하는 걸 보니 새삼 그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해 준 것인지 깨닫는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있지만, 남보다 먼 사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찾아와 인형에 들어가게 해주고 복수까지 해주었다.
아니타는 시선을 돌려 문그록의 시신을 돌아보았다.
“고마워.”
“고맙기는 뭘. 오빠가 이 정도는 해줘야지.”
아니타는 덴다르트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덴다르트가 그녀를 안고 등을 두드려주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째서인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니타는 마음으로 울었다. 속절없이 마음으로 흐느끼던 아니타의 등을 덴다르트의 손이 천천히 두드려줬다.
아니타는 그 손길에 큰 위로를 받았다.
돌싱 후 대마법사-순수 마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