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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 후 대마법사-96화 (96/150)
  • 096화 동침

    태초의 불, 태초의 바람.

    그 둘을 보는 것만으로 영감이 떠오르고 직관이 그 사이를 가로지른다. 치달리는 직관을 따라간 카이는 8성에 올랐을 때만큼이나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무아지경에 빠진 카이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그 손바닥 위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크지는 않았지만, 얼마든지 그 크기를 조절할 수 있었다.

    바헬이 태초의 불꽃을 만들어 사방을 태울 때 어떤 마력의 움직임이 없이도 가능했던 것은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순간에 바헬은 잠깐이지만 8성 그 너머를 보았다는 얘기였다.

    태초의 바람을 인지하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손을 뻗은 카이는 바람에 닿는 순간 놀라운 경험을 했다. 세상 어디에도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바람.

    그 바람에 올라탄 순간 신지 안의 모든 것이 눈에 담겼다. 신지라는 것이 어떻게 격리되어 있는지 확인한 카이는 갑갑함을 느꼈다.

    태초의 바람은 공기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이곳에는 격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카이는 바람에 몸을 싣고 주위를 떠돌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롯이 선 자가 아니라면 바람에 휘말려 그 자유로움에 매몰될 판이다.

    카이는 바람과 자신을 분리하고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다. 눈을 뜬 카이의 앞에는 칼리가 지친 기색으로 서 있었다.

    “이제 정신이 들었어요?”

    늑대의 신령이 깃들어 있을 때와는 달랐다. 카이는 그녀가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온 것을 보았지만, 안색이 나쁜 것을 보고는 물었다.

    “시간이 오래 지났나?”

    “하루 지났어요.”

    카이는 그 말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태초의 바람에 깃들어 주위를 잠깐 돌아본 것 같았는데 하루가 지났다고 하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것 같아 깨우지 않았어요.”

    “고마워.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었어.”

    카이는 잠깐이지만 태초의 바람과 합일하면서 다음 단계로 나갈 한 걸음을 내디뎠음을 알았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그 너머를 보게 된 것.

    이곳에 있는 최초의 짐승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과 같은 곳에 잠깐 올라섰음을 알았다.

    카이는 곧 정신을 집중해 태초의 바람을 소환했다. 이건 마법을 일으켰다기보다는 소환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태초의 바람을 부르고 그 안에 자신의 의지를 투영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자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괜히 바람에 매몰되었다가는 몸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시간 선에 휩쓸릴지도 몰랐다.

    그 잠깐 사이에 하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게 소환한 태초의 바람을 바라보며 카이는 그걸로 뭘 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있었다. 다만 이건 이렇게 갇힌 곳보다는 밖에서, 바람이 있는 곳에서 제대로 사용한다면 이것은 태풍이 될 수도 있고 선선한 바람이 될 수도 있다.

    그 모든 가능성을 품은 태초의 바람을 손에 넣었다.

    태초의 불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이곳에서 태초의 불을 소환하면 안 될 것 같아 잠시 인내하기로 했다.

    카이는 태초의 바람을 흩어버리고는 고개를 돌려 늑대를 바라보았다. 고고하게 서 있는 늑대도 힘이 다했는지 석상처럼 있었다.

    “이제 나갈까?”

    “그러죠.”

    신지를 벗어나는 곳에서 넝쿨이 모두 흩어지더니 칼리는 다시 녹광을 은은히 뿜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카이는 뺨이 붉어지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카이는 눈을 떼지도 못한 채 칼리의 나신을 보면서 다시 어둠을 헤쳐나왔다.

    어둠을 벗어난 칼리가 늑대 가죽을 걸칠 때 카이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를 등진 채 입을 열었다.

    “여러가지 도움을 많이 받았군.”

    칼리는 흘끔 카이를 돌아보더니 성큼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유달리 긴 속눈썹이 천천히 깜빡인다.

    카이가 살짝 얼굴을 붉힌 채 바라보았다. 커다란 늑대 가죽을 두르고 있었지만 벌어진 틈 사이로 가슴골이 보였으니까.

    당황한 카이를 보며 칼리는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신령이 택한 당신이라면 자격은 충분해 보이는데 어때요?”

    카이는 코앞에 선 칼리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원래라면 누구와 결혼하는 거지?”

    “새로운 대전사나 제사장. 성별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그들과 결혼하며 혈통을 유지하죠.”

    칼리가 그리 말하고는 조금 더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카이의 검지에 막혔다.

    “우리 어제 처음 만났어.”

    “그래서요?”

    카이는 가만히 그녀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다가 손을 치우며 말했다.

    “네가 먼저 유혹했다.”

    그 말과 함께 카이가 그녀와 격렬하게 입을 맞췄다.

    바닥에 쓰러진 퀸이 대자로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수림의 연무장은 하늘이 보였는데 그곳을 올려다보던 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앞에서 위훌루가 미소 짓고 있었다.

    “너 공간을 벨 줄 알아도 시간은 쪼개지 못하는구나?”

    공간을 찢어내는 참격을 검성에게 배웠던 그녀는 시간마저 쪼개서 다른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위훌루에게 일격을 당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는데 만약 적으로 만났다면 위훌루의 일격에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육체가 단단하니 죽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위험했을 터였다.

    그리고 저 정도는 되어야 도움이 된다는 말이었다.

    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검을 들어 위훌루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해볼까?”

    위훌루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퀸은 지금 7성과 8성 사이에 걸쳐져 있었다. 그러니 대전사를 꿈꾸던 녀석들이 모두 고꾸라졌다.

    그러나 반쪽짜리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보여줬다. 시간을 쪼개는 법을.

    마법사들처럼 시간을 잡아늘리는 것이 아니라 우직하게 시간의 벽을 뚫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달려드는 것을 보니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녀석이 있었다면 다음 전사장으로 키워줬을 텐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아이는 지금 인질이다. 신지에 들어갔을 칼리의 안전에 위협이 생긴다면 박살 내버릴.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사정을 뒀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지?

    그래서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 도끼를 들었다.

    “와 봐라.”

    퀸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 전처럼 공간을 베어내는 참격을 날리는 대신 곧장 달려드는 퀸을 보며 위훌루가 성큼 다가왔다.

    시간의 벽을 뚫고 들어간 위훌루의 눈에 퀸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위훌루가 도끼를 휘두르려고 꼭 쥐었을 때 카이의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퀸의 손목이 돌아가고 검이 움직인다. 그 모습에 위훌루의 눈이 커졌다.

    단 한 번 보여줬을 뿐인데 지금 그녀의 검이 그려내는 궤적을 따라 시간의 벽이 찢어진다. 그리고 같은 시간 속에서 퀸의 검이 날아들었다.

    너무 놀랐지만 위훌루가 조금 먼저 들어섰기에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반응을 보고 도끼를 휘둘러 검을 밀어내고 무릎으로 그녀의 명치를 노렸다.

    그런데 그녀는 검이 밀리는 힘을 이용해서 몸을 돌리며 오히려 뒷발 차기를 날렸다. 그 공격이 어찌나 빠른지 팔을 들어 막아야만 했다.

    뻐억!

    위훌루가 뒤로 훅 밀려나면서 시간의 흐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퀸도 무리해서 쫓아오지 않고 둘이 거리를 벌린 채 마주 바라보았다.

    위훌루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리며 손목을 천천히 돌렸다. 뒷발 차기에 맞은 팔목이 퉁퉁 붓고 있었다. 마력으로 보호했는데도 이런 걸 보면 전사들이 맞았다면 팔이 부러졌을 위력이었다.

    위훌루가 퀸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금 전에 어떻게 한 거냐?”

    퀸은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더니 답했다.

    “네가 보여준 대로 했지.”

    한 번 보고 그 경지를 넘을 수 있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위훌루는 자신이 전사장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남달랐던 그는 적어도 재능이라는 면에서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수준이었다.

    전사장에 오르도록 단 한 번도 막힌 적이 없었으니.

    그런데 이렇게 보니 다르다. 자신의 재능조차 우습게 보일 정도의 재능을 지닌 여인이었다.

    “믿기 힘들지만, 대단하군. 그럼 조금 더 어울려 볼까?”

    “그 팔 가지고 되겠어?”

    “네가 걱정해 줄 정도는 아니야. 시작하자.”

    위훌루와 퀸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야광충이 밝혀주는 지하 통로에서 늑대 화신의 가죽을 깔고 누운 카이는 로브로 칼리를 덮어줬다. 8성급 아티펙트인 로브를 담요 대신 쓰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지만, 카이는 자신의 팔을 베고 누운 칼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의 긴 속눈썹을 보니 새삼 시선이 간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어둠 속에서 은은한 녹광을 뿜어내는 신비로운 그녀의 뒷모습에 반한 걸까?

    아니면 그녀의 도발에 넘어간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태초의 바람에 올라탔을 때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자신의 성격이 약간 변한 걸까?

    무엇인지 몰라도 후회되지는 않았다.

    다시는 여자를 안을 일이 없을 거라 여겼는데 조금은 충동적이 아니었나 싶으면서도 후회가 없으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카이가 손을 내밀어 얼굴로 흘러내린 잔머리를 정리해주는데 칼리가 눈을 떴다.

    그녀는 카이의 품에서 그를 올려다보다가 씨익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 카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가기 전에 몸이 먼저 가는 경우도 있나 싶으면서도 카이는 고개를 휘휘 내젓고 자신도 몸을 일으켰다. 칼리는 그런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결혼하자거나 그런 말은 안 할 테니까 그렇게 애틋하게 바라보지 말아요. 흔들리려고 하니까.”

    카이는 그 말에 픽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한 손짓만으로 마력을 움직여 그녀에게 늑대 가죽을 덮어준 카이도 마력으로 옷을 입었다.

    그 모습을 보고 칼리는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부럽네요. 어떻게 한 거예요?”

    “마력을 이용한 염동 마법이야. 가장 기본적인 거지.”

    “마법사들은 좋겠어요.”

    칼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카이는 문득 주위를 돌아보다가 태초의 바람을 소환해 보았다. 신지 안에서야 따로 격리된 공간이었지만, 이곳은 다르니까.

    그렇게 태초의 바람을 소환한 카이는 칼리의 허리를 살짝 안았다. 그녀가 왜 그러나 바라볼 태 카이는 바람을 타고 이동했다.

    걸어서 내려올 때는 한참이나 걸렸지만, 바람을 타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다. 단숨에 지하 통로의 끝까지 도달한 카이가 칼리를 내려주자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지하 통로를 막고 있던 넝쿨이 벌어지며 길이 열렸다. 그곳으로 칼리와 함께 올라온 카이는 제사장 마야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카이와 칼리를 보고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요?”

    카이는 그 말에 헛기침하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보고 칼리는 오히려 미소를 지은 채 되물었다.

    “뭐가 달라진 것 같죠?”

    “뭔가 자유로워진 것 같고, 느낌이 달라졌는데 아닌가요?”

    카이는 괜히 머쓱해서는 손을 내밀어 태초의 바람을 보여줬다. 확실히 외부에 나오니까 태초의 바람을 소환하는 것만으로 주위의 바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결마저 읽어낼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굉장한 이점이었다. 마력 감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주위를 인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기대면 안 된다는 것도 명심해야 했다.

    카이는 잠시 기운을 감지하다가 태초의 바람을 흩어내고는 곧장 몸을 날렸다.

    카이가 도착한 곳에서는 퀸과 위훌루가 섬뜩할 정도의 기세로 싸우고 있었다. 누구 하나 팔다리가 잘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거친 대결을 보고 카이는 중간에 들어가면서 둘의 시간과 공간을 얼려버렸다.

    우뚝 멈춰선 둘을 보고 카이가 입을 열었다.

    “뭐하는 거야?”

    비록 살기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둘 다 흥분했다는 것이 보였다. 위훌루는 카이를 흘끔 보고는 뒤로 물러나며 도끼를 거뒀다.

    “후우. 조금 흥분했군.”

    “그러니까. 이러다 누구 하나 죽겠어.”

    카이는 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검을 회수했다.

    “아빠. 왔어?”

    카이는 새삼 퀸을 보았다. 그녀는 위훌루와 싸우면서 시간을 뚫고, 공간을 베고 있었다.

    온전히 8성에 오른 그녀를 보니 새삼 그녀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는다.

    돌싱 후 대마법사-에빌 마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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