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신지
세렌티가 안내해준 곳은 대족장이 머무는 나무로 만든 가옥에 비하면 분명 작았지만, 그 구조 자체는 마음에 들었다. 가옥 안에 신비로운 초록빛을 뿜어내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카이가 돌아보자 세렌티가 설명해 주었다.
“피로 회복과 어지간한 상처도 낫게 해주는 연못이에요.”
카이는 마법사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니 당연히 확인해 볼 생각으로 품에서 시약병을 꺼내서 연못의 물을 채취했다. 연못의 물을 눈앞에서 찰랑이던 카이는 그걸 가방에 넣고는 손바닥에 상처를 냈다.
그리고는 손을 연못에 담그니 손바닥의 상처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오!”
이건 포션을 부어서 만든 연못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효능을 지녔다. 이런 연못이 영지에 있다면 좋겠다 싶을 정도였다.
카이가 연못을 살펴보는 중에 세렌티가 물러갔고, 대신 밖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나?”
“들어 와.”
카이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안으로 들어온 것은 위훌루였다. 그는 안을 돌아보더니 도끼를 꺼내서 옆에 내려놓고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퀸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일 떠나기 전에 저 아이를 내게 맡기고 가라.”
“왜?”
“‘뱀’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가르침을 주겠다?”
“그래.”
카이는 위훌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실력은 확실히 보았다. 8성에 올라 공간을 베는 모습을 보였던 그는 검성만큼이나 강한이였다.
그런 이에게라면 퀸도 뭔가 배울 것이 있지 않을까?
카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위훌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보지.”
위훌루가 나가자 퀸이 카이를 돌아보았다.
“아빠랑 같이 갈 거야.”
“앞으로 ‘뱀’과 계속 싸워야 하는 데 네 도움이 필요해. 그러니 위훌루 전사장에게 뭐라도 하나 배워. 검성에 비견되는 강자니까.”
퀸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퀸은 검을 뽑아 들고 오늘 위훌루가 보여주었던 참격을 떠올렸다. 그가 휘두른 참격은 검성처럼 매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포악하고 위협적이었다.
어느 쪽이 더 뛰어나다고 우열을 가리기는 어려웠지만, 퀸은 검성처럼 깔끔한 참격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배울 것이 있다면 위훌루의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 훔쳐 배울 생각이었다.
카이는 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내젓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카이는 오늘 만났던 이들을 떠올렸다.
위훌루도 놀라웠지만, 제대로 실력을 보이지 않은 여인 마야. 그녀 또한 만만치 않았다.
마법이 아닌 주술을 다룰 것으로 보이는 제사장. 그런데도 8성에 오른 인물.
어떤 식으로 싸울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과는 확연히 다른 칼리. 품고 있는 능력만이라면 그들은 물론이고 세렌티나 타베시만도 못했다. 그런 그녀가 대족장인 것은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신지를 찾아가는 내일 어쩌면 그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카이는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았는데 어느새 다가온 퀸이 카이의 팔을 잡아 빼고는 팔베개를 하고는 눈을 감았다. 잠도 안 들면서 자는 척하는 연기가 상당히 늘었다.
카이는 픽 웃음을 흘리고 눈을 감았다.
아침이 되니 세렌티가 열매를 가져왔고, 그걸 먹은 카이는 퀸과 함께 세렌티의 안내를 받아 다시 대족장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
칼리는 어제와 다르게 전신을 덮는 커다란 가죽을 두르고 있었다. 늑대 가죽을 두르고 있는 모습에 카이가 옆에 선 펜리르를 바라보았다.
<전대 화신의 가죽이다.>
펜리르의 아버지 가죽을 두르고 있다는 건가?
카이는 잠시 칼리를 보았고, 그녀는 늑대 가죽 아래에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신지에는 허락 받은 이만 갈 수 있어요. 카이님을 제외하고는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카이는 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미 위훌루와 남아서 뭔가라도 하나 배울 생각이었으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면 되지?”
칼리는 마야를 돌아보았고, 마야가 손에 들고 있던 방울이 달린 지팡이를 흔들자 대족장의 의자 뒤쪽으로 나무가 움직이더니 깊은 구덩이를 보여줬다.
“신지가 지하에 있나?”
“맞아요. 그리고 이곳은 저희가 지키고 있죠. 같이 갈까요?”
카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따라 걸었다. 위훌루는 카이가 칼리를 따라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칼리와 카이가 지하로 사라지자 바닥이 다시 닫혔다.
위훌루는 시선을 돌려 퀸을 바라보았다. 전사장 후보 중에서도 그녀와 견줄만한 이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검사. 게다가 들고 있는 검도 보통 검이 아니었다.
자신의 도끼가 반파될 정도였으니까.
다행이라면 자신의 도끼는 스스로 파손된 부분을 수복한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도끼를 물려받은 이후로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그만큼 이 여인은 카이에게 소중한 이라는 얘기.
어차피 따라갈 수 없었지만, 그녀를 남긴 것은 인질의 의미도 있었다.
위훌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전사들을 소개해주지.”
퀸은 순순히 위훌루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향한 곳은 도시의 외곽에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말이 되어 있었는지 족히 백 명은 되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퀸은 그중 다섯 명이나 되는 사내가 7성에 이른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훌루가 휙 손을 휘두르자 그들이 뒤로 물러나 공터를 만들었다. 위훌루는 퀸을 보며 말했다.
“우리 애들의 실력 좀 봐주겠나?”
퀸은 그들의 경지를 짐작하고는 한 번쯤 붙어보고 싶었다.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만한 경지에 올랐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씨익 웃은 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얼마든지.”
퀸의 반응에 타베시가 가장 먼저 나섰다.
“제가 한 번 붙어보죠.”
지하로 들어가면 어두울 거라는 생각이 무색하게 안에 들어가니 벽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무슨 빛인가 싶어서 바라보니 반투명한 곤충이 떠다니고 있었다.
초록빛을 뿌리고 다니는 곤충을 바라보던 카이에게 칼리가 설명했다.
“야광충이라는 벌레예요. 대수림에서도 신지로 가는 이곳을 밝힐 뿐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됐어요.”
“그래요?”
광량이 지하 통로를 밝힐 정도가 되는 것을 보면 상당했다. 게다가 벽에 줄지어서 일정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집을 지키는 벌레 같아 보였다.
그런데 지하 통로는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신지를 이렇게 지키고 있었다면 ‘뱀’이 어떻게 빠져나간 거야?”
“보옥을 취하면서 이 길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어요.”
카이는 더 묻지 않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한 시간을 걸어 내려가서야 카이는 지하 통로를 가리고 있는 넝쿨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문처럼 앞을 막아선 넝쿨들.
그 앞에 선 칼리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이 열리듯 넝쿨이 좌우로 벌어졌다. 그 넝쿨의 뒤는 야광충도 없는지 컴컴했다.
카이가 라이트 마법으로 광구를 만들어서 앞으로 보냈지만, 그 어둠에 잡아 먹혔다. 그걸 본 순간 카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여긴가?”
“맞아요. 허락받지 않은 이는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죠. 이건 대전사나 제사장도 들어오지 못해요.”
카이도 뭔가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저 어둠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마력을 투사해 보았지만, 어둠에 닿는 순간 사라진다.
그때 카이의 앞에 선 칼리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두르고 있던 늑대 가죽을 벗었다. 그 안에는 나신의 칼리가 있었다.
칼리의 몸에서는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신비로운 은은한 녹광을 두른 그녀가 어둠을 향해 걸음을 내딛자 어둠이 그 녹광에 밀려난다.
“따라오세요.”
그리 말하고는 칼리가 앞장섰다. 카이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신지에 있는 이들은 동물의 정령들이니 인간처럼 굴지는 않을 터.
그러니 그들을 만날 때는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카이는 어제 처음 그녀를 만났다.
수만에 달하는 신령족을 이끄는 대족장의 나신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이 어둠 속에서.
그녀의 녹광이 밀어내지 않은 어둠은 카이조차 꺼림칙할 정도의 느낌이 들어서 그녀에게 시선을 두고 딱 한 걸음 정도 떨어져서 따라 걸어야 했다.
눈을 감고 따라가기에는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그녀의 나신에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나벨 성녀에게 푸른색 신성력이 어울린다면 칼리에게는 이 녹광이 너무나 어울렸다.
자유분방함과 고귀함, 성스러움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카이는 살짝 얼굴을 붉힌 채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뒷모습만으로 사람을 설레게 하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끝에 어둠이 완전히 걷혔다. 그리고 그곳에는 넓은 공동이 있었다.
분명 지하로 내려왔는데 어떻게 햇빛이 들어오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마치 전혀 다른 곳인 것만 같았다. 신선한 바람이 불고, 싱그러운 풀향이 나는 곳.
칼리가 손짓하자 머리 위에서 넝쿨이 내려왔고, 그녀의 몸을 감쌌다. 삽시간에 그녀는 넝쿨 옷을 입은 채 카이를 향해 돌아섰다.
미소를 지어 보인 그녀가 앞을 돌아보았다.
“이곳이에요.”
카이는 시선을 돌려 넓은 공동의 여섯 방위에 있는 존재들을 보았다. 지금은 석상처럼 변한 채로 있었는데 이것들을 과연 동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충 봐도 10미터는 넘어 보이는 덩치.
게다가 이곳에 있는 것은 껍데기일 뿐인데도 그 격이 느껴졌다.
어딘가 초월한 것만 같은 느낌. 이런 존재들이 살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싶었다.
그런 카이의 감정을 읽은 것인지 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 설명했다.
“최초의 존재들이에요.”
“그럼 점점 작아진 건가?”
“자세한 것은 몰라요. 하지만 최초의 존재들이라는 것은 알죠.”
카이는 그곳에 모인 이들을 돌아보았다.
곰, 여우, 사슴, 늑대, 독수리, 고릴라.
비어있는 자리는 뱀의 자리였겠지.
카이의 시선은 늑대를 향했다. 이곳에 불러온 것은 늑대의 신령이었다.
늑대는 유달리 덩치가 컸다. 다른 존재들이 대충 10미터 정도 된다면 이 녀석은 꼬리까지 20미터는 되는 거대한 존재였다.
‘뱀’을 잡기 위해서 이들을 대표해서 나선 것도 어쩌면 원래 늑대는 이들 무리의 우두머리가 아니었나 싶었다.
카이가 늑대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뭘 그리 감상하고 있나?”
카이가 돌아보니 칼리의 눈빛이 변해 있었다. 그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한 눈빛에는 아득한 세월이 담겨 있었다.
“아무 몸이나 막 들어올 수 있는 거냐?”
“아니. 대족장의 혈족은 우리와 교감이 가장 뛰어나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칼리가 지금은 그 격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뱀’이 시체에 깃들어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데?”
“당연한 이야기다. 이 아이의 몸에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이곳이 신지이기 때문이지.”
“그럼 ‘뱀’이 지금의 너만큼 강하지는 않다는 건가?”
칼리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뱀’이 자신을 품을 ‘그릇’을 찾았다면 가능하겠지.”
“가능하다고?”
카이의 인상이 찌푸려질 때 칼리는 사슴의 정령 앞으로 다가가서는 손을 들어 올렸다. 고개 숙인 사슴의 뿔이 살짝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칼리의 손위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는 사슴의 피가 점점 단단하게 뭉치더니 핏빛 보석으로 변했다. 칼리는 보석을 들고 카이에게 돌아와 건네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설령 ‘그릇’을 찾았다고 해도 보옥 하나만 가진 상태에서는 ‘그릇’에 완벽하게 안착하지 못할 테니까.”
‘뱀’의 ‘그릇’이 되는 조건은 모르겠지만, 최악의 상황은 항상 염두에 둬야 했다.
칼리가 보석을 건네며 말했다.
“이거면 ‘뱀’의 독도 해독할 수 있을 거야. 가지고 있다면 ‘뱀’의 독에 당하지도 않을 테고.”
카이는 핏빛 보석을 손에 쥔 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보석이 품고 있는 힘은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보석을 손에 쥔 카이가 칼리를 보며 물었다.
“태초의 속성에 대해 아는 것이 있어?”
태초의 존재라면 뭔가 아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었더니 칼리가 웃으며 답했다.
“태초의 바람은 내 벗이었지.”
칼리가 손을 내밀자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바람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그 회오리를 본 카이는 바헬이 만들었던 태초의 불꽃이 떠올랐다.
하나만 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것.
두 개를 본 순간 카이는 무아지경에 빠졌다.
돌싱 후 대마법사-동침